163화 공성전(7)
하얗게 빛나는 길쭉한 스태프.
사실은 말이 스태프지, 거의 둔기 혹은 봉을 연상케 하는 무기.
그대로 현성이 스태프를 바닥에 찍어 내렸다.
-쿠웅.
그와 함께 바닥을 타고 육중한 울림이 전해졌다.
동시에 현성이 스태프를 작게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곧 따라갈게.”
그 말은 곧 현성 혼자 병력을 막아내겠다는 소리.
수연만큼은 아니지만, 이들은 전부 하 가문의 검사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단신으로 막아내겠다는 건가.
“너무 무모합니다. 차라리 저희라도 같이…….”
이에 뒤에 있던 병사가 말했다.
시연과 연서는 후에 수연과 진우를 상대해야했다.
그럼 차라리 눈앞의 소년과 같이 막아내는 게 합리적이었다.
“아뇨.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현성은 단호했다.
그러면서 그가 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믿지?”
현성의 짧은 한 마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시연이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믿어.”
그대로 시연이 작게 숨을 고르고는 연서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여긴 현성에게 맡기고 간다.”
그 말에 병사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번에도 이 소년에게 모든 걸 맡기는 수밖에는 없는가.
여기서 더 이상 고집을 부리다가는 오히려 시간을 잡아먹는 꼴.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뭐해. 다들 준비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연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닥였다.
언니인 시연이 결정을 내린 이상.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지만.’
연서가 복도 중앙을 막아선 현성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가 병사들을 상대라고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누누이 말했듯 시간이 문제였다.
‘나간 본대병력이 합류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현성이라도 못 버텨.’
무엇보다 그전에 최상층에서 결판이 난다면?
그러니까 진우와 수연에게 나머지가 전부 당하기라도 하는 순간.
공성전은 그대로 종료였다.
그렇게 되면 공성전은 방계파의 패배로 끝나며, 지금껏 현성을 비롯한 방계파의 노력 또한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와 함께 애써 등돌려왔던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애초부터 승산은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거기다 수연의 실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만약 언니가 지면?
“…….”
연서의 손이 작게 떨렸다.
언니는 이런 상황이 두렵지도 않는 걸까.
하지만 그때였다.
“야. 또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현성이 연서를 향해 말했다.
그 말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너 지금 뭐라고…!”
“됐고. 이거나 받아.”
그러면서 현성이 연서를 향해 뭔가를 던졌다.
-휘익.
현성이 던진 건 다름 아닌 검은 팔찌.
이에 연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건…….”
뒤늦게 팔찌의 정체를 알아차린 연서가 그를 바라보았다.
과거 화이트레이 토벌전 때 현성이 썼던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어느새 그의 목에 감겨있는 검은 목줄.
아카데미의 실종방지목줄이었다.
이미 그 효과에 대해서는 직접 눈앞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성이 이걸 준다면 그 의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알아들었지?”
그런 현성의 말에 연서가 팔찌를 꾹 움켜쥐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그가 작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알아들었으면 가봐. 맡긴다.”
“……알겠어.”
그대로 연서가 등을 돌리며 시연과 병사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성의 최상층.
“다, 당장 막아!”
곧바로 직계파의 병사들이 시연과 연서를 막아서려 했으나.
그들의 앞에는 현성이 버티고 있었다.
이에 병사들은 우선 눈앞의 소년을 해치우고 갈 심산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때였다.
-터엉…콰앙!
맨 앞에 있던 병사의 몸이 덜컥 꺾이더니 벽에 부딪쳤다.
그대로 그가 스르륵 고꾸라지고.
현성이 하얀 스태프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어디 가려고.”
그러면서 그가 돌연 바닥에 선을 그었다.
-그그극.
그와 함께 현성이 자신의 발 바로 아래.
길게 그어진 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할게. 이 선 넘지 마.”
그런 현성의 말에 병사들이 멈춰 섰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병사들이 서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듣자하니 몰락가문의 가주라고 했나?”
“아마 꼴에 가주라고 폼 좀 잡고 싶었나보지.”
그들 역시 전부 하 가문의 검사들.
검술명가라는 이름 아래 검을 들어온 자였다.
그리고 이 정도 애송이는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럼 방금 당한 녀석은?
보나마나 기습으로 들어간 공격에 당한 게 분명했다.
즉 방심만 안하면 별 거 없다는 거지.
“됐다. 내가 정리하지.”
이에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갑옷 어깨에는 남들과 다른 표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표식은 다름 아닌 하 가문에서 한 분대를 이끄는 분대장임을 나타내는 표식.
그만큼 그의 검술실력 또한 하 가문에서 손가락에 들 정도였다.
-처억.
이어서 분대장이 현성이 그은 선 안에 발을 들이밀며 조소를 지었다.
“자, 넘었다. 그래서 어쩔 거지?”
그가 현성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들고 있던 스태프 끝이 십자로 펼쳐졌다.
-철컥.
그대로 그 끝을 따라 푸르스름한 빛이 모이며 형태를 이루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망치를 연상케 했다.
그와 함께 붉은 화염이 스태프를 타고 오르더니.
-부웅!
현성이 냅다 망치를 휘둘렀다.
갑작스레 솟아오른 화염.
곧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그가 재빨리 검을 빼들었다.
지금 막지 않으면 당한다.
그가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그의 검과 현성의 망치가 격돌했다.
-채앵!
이에 공격을 막은 분대장이 이죽거렸다.
기습은 좋았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느린 둔기로 근거리에서 기습을 한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이대로 공격을 흘리고……!’
그대로 그가 검을 꺾었다.
아니 꺾으려 했다.
하지만 웬걸.
“……?!”
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차 내려앉는 팔.
이에 그가 당혹스런 눈으로 자신의 검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설마 지금 힘겨루기에서 지고 있다고?
겨우 새파란 애송이한테?
그러나 곧 그의 검신을 따라 불길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끼기긱…끼익…!
검이 무게를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직 상황을 모르는 병사들이 외쳤다.
“분대장님, 봐주는 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끝내버리십쇼!”
그런 외침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봐주기는 무슨!
지금 이게 모든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공격을 버티는 게 한계.
그리고 그 순간.
뒤이어 들려오는 현성의 목소리.
“어금니 물어.”
“……뭐?”
동시에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이 부러지며, 그의 망치가 갑옷 채로 분대장의 어깨를 으스러트렸다.
-콰드드득…콰아아앙!
그와 함께 분대장의 입을 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어깨가…내 어깨가…!”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어깨는 이미 아래로 내려앉아 흉하게 덜렁거리고 있었으며.
방금 전까지 있던 그의 갑옷 어깨에 있던 분대장 표식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
그대로 현성이 나머지 병사들을 향해 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 넘지 마.”
단호한 그의 목소리.
그렇게 말하는 현성을 타고 익숙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이 처음 하 가문의 첫째, 하수연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무게였다.
* * * * *
한편 최상층으로 향하는 길목.
그곳에는 시연과 연서를 비롯한 별동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그들의 앞에 하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문이 보였다.
저 문 너머에 바로 진우와 수연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먼저 검을 빼들고 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우선 저희가 먼저 들어갈 테니 시연과 연서님은 그 후에……”
허나 그때였다.
시연과 연서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기분 나쁜 스산함.
마치 당장에라도 목 바로 아래에 검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 전부 문에서 피……!”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시연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연서가 몸을 던져 시연을 끌어안았다.
“언니! 안 돼!”
-서걱…콰아아앙!
그대로 살벌한 절삭음과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그와 함께 자욱한 먼지가 솟아올랐다.
이미 앞을 가로막던 문짝은 박살난 지 오래.
그리고 그 아래로는.
병사들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 모습에 시연이 연서를 뿌리치며 외쳤다.
“뭐, 뭐하는 거야!”
그런 시연의 말에 연서가 그녀를 향해 화를 냈다.
“언니야 말로 제정신이야?!”
방금 전 공격.
시연은 분명 공격이 날아올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건 연서도 마찬가지.
그러나 시연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가려 들었다.
만약 연서가 그런 시연을 막지 않았다면 시연 또한 쓰러진 병사와 같은 꼴을 당했을 터.
이에 연서가 주먹을 꾹 쥐며 언성을 높였다.
“자칫해서 언니도 휘말렸으면 어쩔 뻔 했어!”
“그치만 병사들이……”
“정신 차려! 리더는 언니잖아!”
그 말에 시연이 움찔거렸다.
현재 방계파를 이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
그대로 연서가 그녀를 윽박질렀다.
“만약 방금 전 공격에 언니가 당해 쓰러졌으면?”
“그건……”
“공성전은 그대로 끝이야!”
동시에 자욱한 먼지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연서의 말이 옳다.”
곧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하 가문의 둘째.
하진우였다.
그대로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휙 털어내며 말했다.
“한 집단을 이끌어야할 리더가 겨우 저딴 잡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다니.”
진우가 시연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 천한 것들은 안 된다니까.”
“…….”
그러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아니면 실은 빨리 끝내고 싶었던 건가? 응?”
“뭐래는 거야. 닥쳐.”
연서가 시연을 감싸며 진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에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가문을 이끌어야할 피를 타고났음에도 피 하나 섞이지 않은 고아 년을 감싸는 꼴이란.
“이거 원 언제쯤이면 철이 들 런지…하여간 하 가문도 갈만큼 갔구나.”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시연을 흘깃 바라보며 불쾌한 듯 읊조렸다.
“이젠 웬 쓰레기가 분수도 모르고 가주자리를 노리고 말이다. 그야말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꼴이군. 네년이 과연 가주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움찔!
그런 진우의 말에 시연이 주춤거렸다.
공성전 전부터 계속해서 들었던 의문.
과연 자신에게는 이럴 자격이 있는 게 맞는가.
목숨을 구해준 하 가문에게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를 지경에 역으로 검을 쥔 꼴이었다.
지금까지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해왔지만, 이렇게 막상 눈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아인 자신이 가주에 자리에 오르면?
하 가문은 그때부터 온갖 손가락질을 받으며 멸시를 당할지도 몰랐다.
그럼 시연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은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
그리고 그 끝에는.
“……또 버려질 거야.”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연은 그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다시 버려질까봐.
아무도 없는 곳에 자신 혼자 덩그러니 남을까봐.
그렇게 시작된 공포는 점점 그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안 버려. 절대로.”
연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잘 들어.”
“…….”
“만약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베어버릴 거야.”
그 말에 시연이 멍하니 연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연서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