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공성전(6)
직계파의 성에 설치된 함정.
이는 <이스페리아> 내에서도 꽤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함정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은 데미지.
함정의 설정자체가 하 가문의 첫째, 그러니까 검친련 수연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방어력으로는 쉽게 버티지 못한다.
그러니까 한발 맞고 즉사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수가 문제였다.
블록을 밟은 순간.
장치가 발동되며 수십 개의 마력화살이 날아오고, 뒤이어 저주 마법진의 발동.
한 발을 맞고 버티는 것과 수십 개의 마력화살을 맞으면서 버티는 건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저주 마법진까지.
그래서 정석대로라면 본 함정을 파훼하는 방법은 총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는 고기방패.’
말 그대로 방계파의 병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부어, 함정의 마력이 다 할 때까지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법이었다.
허나 같은 병력을 쓴다는 면에서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게 두 번째. 함정자체를 해체하는 법.’
우선 핵심 마력 기관을 찾아 파괴하고, 마력화살을 무력화시킨 후.
마법 해제 스크롤을 이용해 부여된 저주마법을 상쇄시킨다.
그럼 함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준비해야할 물건이 많고, 마력 기관을 찾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안정성만큼은 확실히 보장되는 방법이며, 무엇보다도 첫 번째와는 달리 병력의 소모가 없는 탓에 거의 정석으로 여겨지는 공략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던 현성은 여간 이 방법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는 가뜩이나 병력의 수가 적은 마당에 병력을 소비하는 게 별로였으며.
두 번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성에 침입했을 때부터 일종의 타임어택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
자칫 함정해체를 하다 시간이 끌리면, 뒤이어 합류한 직계파의 본대병력에 포위당해 그대로 게임오버.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방어구부터 온갖 물약을 사용해 방어력을 극한까지 올려보았다.
허나 함정의 끝에 도달하기 직전.
결국 누적된 데미지를 버티지 못해 사망.
‘심지어는 격투가 클래스의 금강을 써도 불가능했지.’
그런 관계로 이 방법은 실패.
그 다음에 사용한 방법은 과거 정령의 신전에서 사용했던 꼼수였다.
성 아래 바닥을 파고 들어가 함정이 끝나는 지점까지 가는 법.
‘여기서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어느 특정 지점부터는 땅이 파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꽉 막힌 느낌.
나중에 현성이 알게 된 사실로는 이게 시스템적으로 막아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 그 원인은 정령의 신전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당시 정령의 신전에서 현성의 기행덕분에 야근을 때려야했던 제작사들의 분노가 담긴 셈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꼼수들을 사용해 봤으나, 함정은 쉽사리 공략하기 힘들어보였다.
사실 그 시간에 그냥 함정해체를 했으면 진즉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성은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방법을 연구한 결과.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했던가.
방어력 몰빵도, 꼼수도, 안 통한다면 결국에는 정석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함정공략의 정석은 무엇인가.
‘보고. 피한다.’
혹 리듬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을 만나본적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폭풍같이 몰아치는 노트를 도대체 어떻게 보면서 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단순한 원리였다.
내려오는 노트를 보고. 입력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물론 이는 그들만의 세상이며, 일반인들에게는 쉬이 그 영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현성 역시 그랬다.
그렇지만 점차 함정에 도전하면서, 그에게도 비슷한 영역이 허락되기 시작했다.
일종의 반복을 통한 학습이었다.
이 블록을 밟으면 오른쪽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저 블록을 밟으면 왼쪽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현성은 비슷하게 그들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완벽하게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 허나 패턴을 전부 외워버린다면?’
과거 선천강에서 데일런트를 상대했을 때 써먹은 방식이었다.
블록의 위치. 화살의 궤적. 저주 마법진의 발동타이밍.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외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지만 현성에게는 현대의 기술력이 존재했다.
바로 녹화.
혹시 앞서 말한 방어력 몰빵 방법을 기억하는가?
물론 이 방법으로는 함정을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거의 끝까지 가는 건 성공했다.
이에 현성은 해당 장면을 녹화하여, 느리게 재생시킨 뒤.
어떤 블록을 밟을 때. 어떤 함정이 발동하는지.
그 패턴을 하나하나 다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현성이 모든 패턴을 외운 순간.
그는 아무런 꼼수도 쓰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함정을 보고 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철컥. 티디딩! 철컥, 철컥. 카앙! 티디디디딩!
그대로 현성은 파죽지세로 함정을 돌파해나갔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이리저리 스텝을 바꿔나가며 블록을 밟는 그는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그가 거의 마지막 지점까지 다다르고.
다음 블록에 발을 내딛었다.
그와 함께 현성이 눈을 부릅떴다.
‘이제 여기가 관건…!’
-철컥.
블록이 눌리면서 양 방향에서 동시에 마력화살이 날아왔다.
거기다 정확히 2초 뒤 발동되는 저주 마법진까지.
다른 패턴들과는 달리 이 패턴은 피하거나 상쇄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요한 게 추가적인 도움.
곧바로 현성이 양손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을 따라 딸려 나온 건 다름 아닌 방패와 단검.
이어서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천장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파악!
그리고 날린 단검이 천장에 박힌 걸 확인한 뒤.
양손으로 방패를 들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마력화살과 방패가 부딪히며 그 충격이 전해졌다.
-쿵! 쿠궁! 쿠궁!
덕분에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야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대로 방패가 박살나기 직전.
마력화살이 멈췄다.
그 다음 현성이 재빨리 들고 있던 방패를 버리고 앞으로 몸을 던진 찰나.
그의 바로 위로 저주마법진이 새겨졌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저주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태.
-흠칫!
이에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연서가 낭패라는 듯, 이를 악물었다.
역시 현성으로도 무리였나.
허나 그때였다.
치이익, 천장에 달린 단검을 타고 마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은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천장에 박혀있던 단검이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저주 마법진은 소멸.
이에 사방으로 자욱한 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처억.
점차 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함정 끝에 도달한 현성이었다.
이걸로 함정은 클리어.
그러면서 현성이 무너져 내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단검이 폭발한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사전에 단검에 점착 슬라임 폭탄을 달아뒀기 때문.
점착 슬라임 폭탄.
슬라임의 채액과 폭약을 섞은 물건으로.
그 효과는 대상에게 부착 후 2초 뒤 폭파한다는 것.
이에 현성은 저주 마법진이 발동하는 시간을 계산하여 미리 단검을 던져두었다.
말하자면 함정의 함정.
그대로 그가 남은 먼지를 털어내며 시연과 연서를 향해 바라보며 말했다.
“됐어. 이제 넘어와.”
그제야 줄곧 굳어있던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현성을 믿었던 건 틀림없지만, 혹시라도 그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와 함께 연서가 박살난 천장과 현성을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진짜.”
그녀의 말에 뒤에 있던 다른 병사들 역시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빛은 연서의 말에 무언의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건 최상층에 있는 진우와 수연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게…말이 돼?”
성의 최상층.
지금껏 현성의 함정돌파를 본 진우의 첫 소감이었다.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었다.
모든 함정을 보고, 피했다.
거기다 마지막에는 단검을 폭파시켜 마법진을 소멸시키지 않나.
현성의 사람 같지 않은 기행에 그가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러면서 그가 병사를 향해 외쳤다.
“당장! 지금 당장 남은 병력까지 전부 저기로 투입시켜!”
“예? 하지만 그럼 외부경계는……”
“내 말 안 들려?”
진우가 당장에라도 병사의 목을 벨 듯.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에 손을 올리며 으르릉거렸다.
그가 함정을 돌파한 순간부터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밖에 나갔던 병력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녀석들이 빨리 함정을 돌파한 시간만큼.
남은 병력을 전부 쏟아 부어 시간을 끌어야했다.
그래야 후에 합류한 병력과 함께 상대를 포위시키고.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대로 진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너도 아래로 내려가서 죽을 각오로 녀석들을 저지해라.”
“…….”
“그게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든가.”
-움찔.
이에 병사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즈, 즉시 내려가겠습니다!”
곧바로 병사가 내려간 뒤.
화면에 비친 현성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자가 하나 있었다.
그 정체는 하수연.
그녀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멋지군.”
동시에 수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에 말했듯 성 안의 함정은 그녀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수연 역시 함정을 직접 경험해봤다.
그런데 저걸 저렇게 파훼한다고?
지금껏 저런 식으로 함정을 파훼한 사람은 현성이 처음이었으며, 그건 자신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쿵쿵!
동시에 지금껏 줄곧 멈춰있는 것 같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어떤 자극을 줄까.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만…….’
이미 현성이 예상보다 빨리 함정을 돌파함에 따라 변수가 생긴 상태.
여기서 그녀까지 나섰다가는 괜히 또 다른 변수를 만들 수도 있었다.
이에 수연이 화면 너머 현성을 바라보았다.
‘승리를 위해서는 참아야겠지.’
어차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림이 큰 만큼, 그 맛은 훨씬 뛰어날 것이다.
거기다 시연과의 전투까지.
기대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대로 수연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둘 다 어서 올라 오거라.’
* * * * *
그렇게 수연이 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는 와중.
시연과 연서 무리는 현성의 활약 덕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멈칫.
앞서가던 시연이 미간을 좁히고 발을 멈췄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직계파의 병력이었다.
게다가 그 수를 보아하니 성 안의 남아있는 모든 병력을 집중시킨 모양이었다.
이에 시연이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주 이곳에서 고립시키기 위해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냥 보내주지 않는 한. 이만한 수를 돌파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터.’
무엇보다 아직 진우와 수연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둘은 여전히 최상층에 있다는 뜻.
나중에 둘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힘을 비축해둬야 했다.
허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우선 여기에서……’
어차피 아무리 못해도 한 번 정도는 마주치리라 생각했다.
그대로 그녀가 검을 뽑았다.
아니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처억.
현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에 시연은 물론이며 연서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 현성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시연아. 먼저 위로 올라가.”
직계파의 성 복도.
현성이 그 중앙을 홀로 막아선 채 말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