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하 가문(11)
그대로 잠시 뒤.
진우의 품을 뒤지던 현성이 입 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어서 그가 웬 검은 열쇠를 꺼내들었다.
“……찾았다.”
이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열쇠? 겉보기에는 그리 값비싸 보이지는 않구나. 재물이 목적이면 그 열쇠보다는 안주머니에 있는 반지를 추천하지.]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열쇠보다는 반지 쪽이 훨씬 귀해보였다.
허나 현성은 열쇠를 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은 이쪽이 먼저라서.”
후에 스토리 전개를 생각한다면 우선 열쇠를 챙기는 게 필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둘 다 챙기면 그만이잖아?”
현성이 열쇠에 이어 안주머니에 있는 반지까지 챙기며 히죽 웃었다.
[오, 역시 현성이군.]
그런 현성의 말에 알레시아가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마켓 때부터 느낀 거지만, 현성은 특히 이런 부분에 있어 확실한 일처리를 보여주고는 했다.
만약 이걸 업으로 삼았다면 꽤나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알레시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에 그가 만족스럽게 손을 털었다.
‘이걸로 대충 파밍할 건 다 파밍했고 이제 남은 건……’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살이 난 테이블.
바닥에 기절해있는 사람이 총 셋.
‘거기다 테이블 밑에 숨겨둔 녀석들까지 합하면 더 될 테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머리에 피 인지 와인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액체를 흘리고 기절해있는 하 가문의 도련님까지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 걸려있다 한들, 평생 들키지 않을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정리 정도는 해둬야겠군.’
-터업.
그대로 현성이 쓰러진 진우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었다.
많이 정리할 필요도 없다.
딱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진우를 그나마 멀쩡한 의자위에 패대기쳤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숨을 가다듬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런 그의 주변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깔끔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박살나있던 파편과 핏자국은 전부 지워둔 상태.
다만 시선이 주목되는 점이 있다고 한다면 테이블위에 저마다 널브러진 검은 정장의 남성들.
그들은 죄다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현성. 아무래도 이건 좀 어색하지 않느냐.]
이에 현성의 어깨 위에서 줄곧 그를 지켜보던 알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주변을 정리한 거까지는 좋았으나, 거구의 남성들이 전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있다니.
영 의심스러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본다면 어색할 수 있지.”
현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어색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마법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터억.
그대로 현성이 테이블 위에 빈 와인병을 올려놓았다.
그렇게 테이블 위는 물론이며, 바닥, 의자까지 하나 둘씩 늘어가는 빈 병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마지막 병을 놓았을 때.
[오. 이 모습은……!]
알레시아가 작게 감탄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건 그녀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과거 기사단과 함께 했을 당시.
연말에 모든 실적을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당시.
저마다 한 자리에 모여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고는 했다.
무엇보다 그대로 다음 날이 오면, 술판을 벌였던 자리는 그야말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했다.
그리고 지금.
그 광란의 술자리를 보낸 다음 날의 풍경이 여기서 완벽히 재현되었다.
테이블이며 바닥이며 이리저리 널브러진 술병.
“으으……”
널브러진 술병과 테이블에 기절해있는 인간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알레시아는 이런 풍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개가 되는 마법.
[대단하군. 술병하나로 방금 전의 어색함을 깔끔하게 지워버리다니.]
간만에 보는 마법 같은 풍경에 알레시아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가 현성을 향해 말했다.
[그럼 사일런트와 환각마법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이에 현성이 자신의 완성품(?)을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 바로 풀지는 말고 서서히 풀리게 두지. 뭐.”
[좋은 생각이군.]
오히려 바로 마법이 풀려버리면 갑작스레 나타난 술판에 의심을 살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천천히 풀어버리는 게 낫겠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멀쩡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털썩.
이제 남은 건 시연과 연서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서 자리를 비웠던 시연과 연서가 보였다.
그 모습에 현성이 태연하게 손을 들었다.
이에 머지않아 그를 발견한 둘이 연회장 구석으로 걸어왔다.
아니 걸어오려던 찰나였다.
-멈칫.
연서가 테이블 주변에 잔뜩 뻗어있는 장정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하지만 그도 잠시.
테이블과 그 주변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발견하고는 곧 별거 아니라는 듯 혀를 차며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연회만 열렸다고 하면 흥에 못 이겨 꼭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할 정도.
그대로 연서가 슬쩍 그들을 피해 현성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면서 그녀가 시연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뭐해, 언니. 안 앉아?”
동시에 연서가 보란 듯이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뺐다.
이러면 분명 시연은 이곳에 앉을 수 없을 터.
완벽한 계획이었다.
“…….”
하지만 연서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여전히 자리에 서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눈은 어느 한 군데를 향해 고정되어있었다.
이에 연서가 왜 그러는가 싶어 시연이 바라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움찔.
술을 얼마나 마신건지 사람이 된, 아니 개가 된 진우가 뻗어있었다.
그 모습에 연서와 시연.
둘이 아무 말 없이 지그시 진우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연서가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하진우, 그가 누구인가.
하 가문의 둘째로 프라이드가 강하기로는 연서 못지않으며, 언제나 하 가문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취해야한다는 걸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자.
그런데 그런 진우가 연회장 구석.
잔뜩 술에 꼴아 머리를 처박은 채 뻗어있었다.
얼핏 보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
“……환각?”
그 모습에 시연 역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무엇보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린 저 붉은 액체는 무엇일까.
와인인가.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저 개, 아니 사람은 진우였다.
이에 어느새 연서와 시연 둘 뿐만이 아니라 연회장의 다른 손님들도 개가 된 진우 패거리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 술병 좀 봐.”
“저게 그 하 가문의 둘째라고?”
“…….듣던 소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대놓고 크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반응들은 다 비슷했다.
그도 그럴게 진우는 평소에 날카로운 인상을 유지하며 그토록 언행을 중시했지 않나.
그만큼 지금 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형님이 오늘따라 좀 달리시더라고.”
그 말에 연서가 현성을 빤히 쳐다봤다.
“……뭐?”
“내가 봤어.”
“너 설마 저거랑 만난거야?”
연서가 뻗어있는 진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거라니. 그래도 니 오빠 아니었나?”
“아무튼 너 저거, 아니 쟤랑 만났다면 어디 다치지는……”
진우가 현성과 만났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성격상.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당장 저번에 방계파에 붙기로 약조했던 가문의 사람이 의문의 사고로 병원신세를 진 게 일주일 전이었다.
그리고 말이 의문이 사고지.
그 뒤에는 진우가 있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만큼 현성도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현성! 괜찮아? 다친 데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시연이 재빨리 현성에게 달려갔다.
그 와중에도 연회장의 다른 손님들이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대로 시연이 현성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 베이거나 맞지는 않았어? 그게 아니면 혹시 협박이라거나……!”
다른 사람이 봤다면 평소의 시연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성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 모습이 평소의 시연이라는 걸.
지금처럼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안절부절 하고.
다른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며.
더 나아가 그녀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진짜 시연이었다.
이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시연. 난 괜찮아.”
“……그럼 다행이지만.”
그런 현성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이런 모습을 봤으면 누가 그녀를 하 가문의 최고의 검이라고 할까.
그와 동시에 어깨에 있던 알레시아가 작게 속닥거렸다.
[……제법 귀여운 아이로구나.]
그 말에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응…….”
재차 괜찮다는 현성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시연의 모습에 입을 틀어막고 있는 연서는 덤.
‘귀, 귀여워…!’
이에 현성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저건 언제 솔직해질까.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때였다.
“거기. 무슨 일이지.”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미건조하고 높낮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웅성거리던 연회장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처억.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허리까지 오는 긴 백발의 여성이었다.
고요하게 내려앉는 눈동자.
얼핏 보면 시연과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그 속에 검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스산함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앞의 분위기와 미모가 섞여, 그녀는 마치 인간이 아닌 무뚝뚝한 인형을 보는 듯 했다.
곧 그녀가 시연과 연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수연.
하 가문의 첫째이자, 직계 혈통파를 이끄는 리더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저건 뭐지?”
그녀가 테이블에 뻗어있는 진우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이 분위기에서 감히 어느 누가 하 가문의 둘째가 술에 취에 꽐라가 되었다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그때였다.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진우 도련님께서 연회장의 분위기에 취해 과음하신 모양입니다.”
현성의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자연스레 수연의 시선이 현성을 향했다.
그대로 그녀가 위아래로 현성을 훑었다.
“이상하군. 난 네놈한테 물은 적이 없는데.”
까칠하기 그지없는 대답.
그녀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진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하 가문을 잇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피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기본적으로 웬만한 유명가문이 아니면 그녀의 눈에는 벌레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다면.”
수연이 현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곧 그의 바로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러자 현성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유현성. 유 가문의 가주입니다.”
처음 진우를 마주했을 때와 같이 두려움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태도.
이에 수연이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유 가문?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내가 언제 이름을 물어봤나?”
-피잇.
동시에 수연의 손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러자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하얀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그대로 수연이 현성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차기 가주는 거의 수연이 확실했으며 이곳은 하 가문의 연회장.
적어도 이곳에서 그녀의 행동을 저지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검으로 말한다.
그것이 하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더 나아가 하 가문의 자격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
“네놈에게는 내 앞에서 입을 열만한 자격이 있느냐?”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