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하 가문(10)
연회장 상층.
따로 마련된 방.
그곳에는 진우가 서있었다.
커다란 소파.
화려한 샹들리에.
마치 고급 호텔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진우는 그대로 창밖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창밖을 타고 클래식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보아하니, 아래는 아직 연회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진우는 등을 돌리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말했다.
“들어와.”
이곳은 그를 포함해 그의 측근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
어차피 들어올 사람은 정해져있었다.
아마 기껏해야 비서겠지.
“도련님, 이제 슬슬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나 그의 비서였다.
이에 진우가 시계를 확인하며 등을 돌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시연과 연서는?”
“말씀하신대로 귀빈을 핑계로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허나 오래가지 못할 거 같습니다.”
“됐어. 이만하면 충분해.”
시연과 연서가 연회장에서 봤던 메시지.
애초부터 그건 현성을 둘에게서 떼어내기 위한 진우의 계략이었다.
그 다음에는 현성의 주변에 미리 사일런트 마법과 인식저하 마법을 걸고, 패거리들을 보내 놨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이면 현성은 기절해 묶여있던가, 반쯤 죽은 상태일 터.
그렇다면 시연과 연서가 연회장에서 도착하기 전에 먼저 내려가, 그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릴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
저번에는 그의 패거리들이 상대를 너무 심하게 패는 바람에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러게 괜히 바락바락 소리 지르면서 저항하기는.
하지만 그도 잠시.
진우가 연회장에서 나서기 직전.
현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 애송이를 굴복시키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주먹 한 대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지금쯤이면 질질 짜고 있겠지.’
제 주제도 모르고 태연하던 그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모습도 나름 기대되었다.
이에 진우가 싱긋 웃으며 발을 내딛었다.
“내려가지.”
“예,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진우가 방을 나섰다.
그때만 해도 그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 * * * *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연회장.
진우가 연회장 한 구석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기 전, 현성이 있던 테이블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애초에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것처럼.
고요하고,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연회장의 사람들은 테이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사일런트 마법과 환영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군.’
진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싼 돈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이에 그가 만신창이가 된 현성의 모습을 기대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처억.
그대로 그가 테이블에 도달한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저 멀리서 봤을 때는 멀쩡한 테이블은 이미 산산조각난지 오래.
바닥에는 붉은 피와 날카로운 유리 파편은 물론.
찢어진 옷부터 으스러진 의자까지.
아무래도 생각보다 거칠게 손님접대를 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멀쩡한 의자 한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힘없이 앉아있는 소년.
그는 바로 현성이었다.
그 모습에 진우가 작게 혀를 찼다.
“쯧, 이번에도 글렀군.”
아마 이번에도 경고를 전하기에는 늦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적당히 하라니까.
그때였다.
“아, 오셨습니까?”
의자를 지키고 있던 검은 정장의 남성이 진우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현성을 처리를 맡긴 패거리의 리더였다.
이에 진우가 대충 그의 인사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 그래. 다른 얘들은?”
“도련님을 부르러간다 했는데…오는 길에 못 보셨습니까?”
“……못 봤는데.”
진우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서로 엇갈린 모양이군요. 다음부터는 제대로 교육시키겠습니다.”
“아냐. 아무튼 그건 됐고. 어땠어?”
진우가 고개를 까닥이며 피투성이가 된 현성을 가리켰다.
그러자 리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 볼일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온갖 여유란 여유는 다 부리더니, 글쎄 한 대 걷어차이니까 그때부터는 아무런 반격도 못하더군요.”
“……그래?”
그 말에 진우가 입 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고아 년을 택한 머저리다웠다.
멍청한 놈 같으니.
차라리 제 주제를 알고 쥐죽은 듯 있었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몰락가문의 가주라고 했던가.
“이제야 어울리는 모습이군.”
진우가 작게 중얼거리며 현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어디 그 모습을 제대로 봐볼까.
그러면서 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이, 머저리. 내 말 들리나?”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진우의 손이 닿기 무섭게, 현성의 모습이 흐릿하게 번졌다.
게다가 손끝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르륵.
곧 눈앞의 현성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 같은 모습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사라진 자리를 타고 묘한 향이 코를 찔렀다.
지독하리만큼 달콤한 향.
그리고 옅은 분홍색을 띠는 연기.
그와 함께 진우가 미간을 좁히며 재빨리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큭! 뭐야?”
뭔가 이상했다.
이에 그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뭐긴 뭐야. 환영마법이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깡! 하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진우의 뒤통수를 타고 느껴지는 격통.
이에 그가 비틀거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 이게 무슨……”
그러자 진우가 등을 돌린 그곳에는.
패거리의 리더가 한 손에 와인 병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비서는 기절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우가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돌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서서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에 서있는 녀석의 모습이 여러 개로 보였다.
“꽤 버티네?”
그런 진우를 바라보고 리더가 히죽 웃었다.
아니 리더가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서서히 바뀌는 얼굴.
그리고 잠시 뒤.
진우의 앞에는 다름 아닌 현성이 서있었다.
게다가 그는 방금 전 피투성이가 아닌, 생채기 하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으드득!
이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진우가 이를 갈았다.
정확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이 꼬였다는 거 하나는 정확했다.
“감히 하찮은 애새끼 따위가……!”
진우가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허나 손아귀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음은 물론, 팔이 제멋대로 부들거렸다.
‘파, 팔이……’
그 모습에 리더, 아니 현성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약빨이 도는 모양이네?”
“……뭐?”
그대로 현성이 그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이클레아의 특제 조합 넘버 78번. 거대 네펜데스의 액체와 옐로우 비의 마비침을 섞은 거야. 그걸 들이마시면 온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육체는 곧 통제권을 상실하지. 그리고 마비는 덤.”
“겨우 이 정도로 내가…컥…크흑……”
진우가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현성의 말대로 팔과 다리가 굳어갔다.
마비독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팔과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퍼지기 시작한 마비독은 천천히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목 바로 밑이 뻣뻣해졌다.
그리고 현재 주변은 사일런트 마법과 환영마법이 걸린 상태.
그 누구도,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현성을 빠트리려한 함정에 역으로 걸린 꼴.
‘제, 제기랄…!’
이에 진우가 재빨리 눈을 굴렸다.
뭔가 방법이 없나.
그리고 그때였다.
-씨익.
돌연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서 진우가 혀를 움직였다.
좋아, 아직 혀는 움직인다.
그와 함께 그가 있는 힘껏 외쳤다.
“해제!”
처음 이곳에 사일런트 마법과 환영 마법을 건 술자는 다름 아닌 진우.
그만큼 그의 말 한마디 하나면 마법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이 풀리는 즉시.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곳으로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만 가면 전부 해결되었다.
그도 그럴게 그는 하 가문의 둘째.
무려 이번 연회의 주최자이자, 주인공 아닌가.
그만큼 쓰러진 비서와 더불어 그의 모습을 발견하면 현성은 곧바로 연회를 망친 쓰레기이자, 하 가문의 둘째에게 위해를 가한 범죄자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여기서 비명이라도 질러준다면 이목을 끔과 동시에 자신은 완벽한 피해자의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진우는 이런 수 싸움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그야말로 판을 짜고 원하는 대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능력.
그의 진정한 힘은 비단 무력뿐만이 아닌, 이런 계략에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상대가 유현성.
그보다 더 한 자라는 것을.
“……시끄럽잖아.”
현성이 여유롭게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에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그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뭐야? 왜? 아무 일도……’
그런 그의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마법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 기현상에 진우가 다시 한 번 외쳤다.
“해제!”
하지만 여전히 마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마법이 해제되어야하는데.
“해…!”
진우가 이럴 수는 없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니 외치려했다.
그대로 현성이 작게 혀를 차며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응, 니 아가리 밀어서 잠금 해제.”
-짜악!
이에 진우의 고개가 반대로 꺾이며 휘청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현성이 손을 털며 말했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
아. 이 경우에는 잠금 해제가 아니라 잠금인가.
현성이 조용해진 진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게 무슨 상관이람.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진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 분명 해제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의 말에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확실히 원래대로라면 주변에 걸려있는 마법은 진우의 말 한마디에 해제되어야했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마법이 지워지지 않은 상태.
그리고 마법이 해제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잘했어. 알레시아.”
그건 바로 현성의 어깨에 있는 알레시아 덕분.
알레시아, 그녀가 누구인가.
무려 마나의 지배자라 불리는 드래곤이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쯤은 어린애 장난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알레시아에게 있어서, 마법의 술자를 바꾸는 것쯤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진우가 다시 이곳에 들어왔을 때.
현성이 당한 것처럼 환영마법을 건 것도 전부 그녀였다.
덕분에 그 결과.
사일런트와 환영마법은 그대로인 상태.
즉, 진우가 노리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시선이 이곳에 쏠릴 일은 절대로 없었다.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그리고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진우가 현성을 향해 소리쳤다.
이클레아의 특제 독에 당하고도 아직까지 소리칠 힘이 남아있다니.
역시 하 가문답게 육체 하나는 타고났다.
하지만 저항도 오래가지 못할 터.
이에 현성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술수는 지랄. 그건 니가 부렸지.”
입구에서부터 가문의 위세와 재산에 따라 현성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나.
연회장 안에서는 사일런트와 환영마법을 걸고, 그를 처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계략을 부린 건 그가 먼저였다.
“아무튼 그럼.”
그대로 현성이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와인병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진우가 움찔거렸다.
“자, 잠깐……”
“잠시 쉬고 있어.”
동시에 현성이 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가차 없이 와인병을 내려쳤다.
-콰장창!
그와 함께 진우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틀었다.
“커헉…!”
곧이어 진우의 머리를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에 그가 핏발 선 두 눈으로 힘겹게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놈. 나 하진우가 이대로 당할 것……”
“어? 아직 안 갔어?”
그 모습에 현성이 진우의 말을 자르며 혀를 찼다.
“쯧, 하여간 단단하기는.”
이어서 현성이 다른 와인 병을 꺼내 다시 한 번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콰창!
“크허허억! 가, 감히…!”
“거 드럽게 끈질기네.”
“나 하진우는 이걸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끝까지 입을 놀렸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입을 나불거리다니.
과연 검술명가 하 가문다웠다.
“아니 무슨 머리만 따로 단련했나.”
이에 현성이 투덜거리며 더욱 더 강하게 와인병을 휘둘렀다.
-쾅! 콰앙! 콰창! 쨍그랑!
그대로 한 번, 두 번, 세 번.
현성이 쉬지 않고 그의 머리통을 향해 와인병을 내리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와장창!
들고 있던 와인 병이 완전히 박살나며 그 파편이 공중에 반짝거렸다.
그와 함께 붉은 와인이 진우의 머리와 바닥을 적셨다.
얼핏 보기에 피와 와인은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새끼. 끈질기네.”
현성이 박살난 와인 병을 휙 던지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있던 알레시아가 말했다.
[현성. 내가 보기에는 그는 4번째에 이미 간 것 같네만…….]
“몰라. 알 게 뭐야.”
실제로 진우는 4번째부터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현성도 이를 알아차렸으나, 이대로 멈추기에는 뭔가 아쉬워 기어코 열 번을 채웠다.
덕분에 진우는 완벽하게 기절한 상태.
-퍼억!
그대로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현성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벽히 갔군.”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콧노래를 부르며 진우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는 게냐?]
그러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템 파밍.”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연회장.
쓰러진 진우의 품을 뒤지고 현성.
그런 그의 모습은 꽤나 즐거워보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