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하 가문(8)
하지만 그도 잠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시연이 현성의 손을 잡은 채 멈칫거렸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어?”
“그게……”
그러자 시연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춤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시연이 그동안 배워온 거라고는 검이 전부였다.
그나마 춤이라고 한다면 비기 검무(劍舞)말고는 없었다.
‘…부끄러워.’
시연이 자신의 드레스 끝자락을 움켜잡았다.
물론 처음에는 현성의 제안에 기뻐 자신도 모르게 승낙했으나, 뒤늦게 춤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곧바로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대로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리드할게.”
그와 함께 현성이 음악에 맞춰 발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몸을 틀며 속삭였다.
“천천히, 긴장하지 말고 따라와.”
“……으, 응.”
이에 시연이 현성을 따라 조금씩,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잠시 뒤.
시연은 어느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마치 처음 하 가문에서 가르쳐주는 검로에 따라 초식을 펼치는 것처럼.
시연은 현성의 리드를 따라 한 번, 두 번,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때? 괜찮지?”
현성이 그런 시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시연이 작게, 아주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좋아.”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연회장의 음악이 끝나갈 때 쯤.
현성이 시연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둘을 지켜보고 있던 연서가 중얼거렸다.
“……잘 추네.”
실제로 현성과 시연은 둘 다 검은 계열의 옷을 입은 것도 그렇고, 제법 합이 잘 맞는 커플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현성이 시연의 허리를 잡고 턴을 돌때는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연서를 비롯한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현성과 시연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 춤이 끝난 직후에는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에 연서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혀를 찼다.
“쯧.”
당연하게도 그녀의 언니, 시연은 따로 춤을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면, 이는 온전히 현성의 덕이었다.
동시에 현성이 이토록 춤을 잘 추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호감도 작을 위해.
피의 왕국에서 레이첼에게 그랬듯이, <이스페리아>에서는 히로인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한 이벤트 씬이 몇 개 존재한다.
그리고 하시연의 경우에는 방금 전의 연회장 씬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플레이어가 시연에게 춤을 출 것을 제안하고, 완벽하게 춤을 이끌어나갈 경우.
시연의 호감도가 상승한다.
이 때문에 과거 현성은 보스몬스터의 패턴을 외우듯.
연회장에서의 모든 춤 동작을 하나하나 외우는 기염을 토해냈다.
오늘 그가 이렇게 시연을 리드할 수 있던 것도 전부 이때의 기억 덕분.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연서가 보기에는.
현성은 그저 모든 걸 계획하고 있는 고단수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병실에서 열을 잴 때부터 같이 춤을 출 것을 제안하는 것까지.
‘……하여간 보통 녀석이 아니야. 아주 여우같은 놈이 따로 없어.’
연서가 그렇게 생각하며 현성을 째려보았다.
그러면서 그녀가 시연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그를 향해 박수를 쳤다.
허나 그 표정만큼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여어, 그림 좋던데.”
무엇보다 삼류 악역 같은 대사는 덤.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럽냐?”
그런 현성의 말에 연서가 발끈거리며 대답했다.
“누, 누가 부럽대!”
맞다. 부럽다.
부러워 미치겠다.
하지만 이미 기회는 저 멀리 떠나고 난 뒤.
연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마침 그 찰나였다.
연서의 품을 타고 작은 진동이 울렸다.
-우우웅.
그건 시연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둘이 동시에 스마트 폰을 바라보았다.
그런 화면에는 짧은 메시지 창이 떠있었다.
마침 연회에 귀빈들이 왔으니, 하 가문의 사람들은 잠시 얼굴을 비추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이에 시연이 메시지를 확인하기 무섭게 재빨리 시연의 옆에 딱 붙었다.
그러고는 현성을 향해 당당히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봤지?”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거 같네.”
연서가 묘하게 으스대는 말투로 말했다.
그와 함께 감추려 하지만,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그녀의 입 꼬리가 실시간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현성이 그런 연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 딴에는 시연을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애가 따로 없었다.
아니 실제로 애가 맞긴 하구나.
“그래, 다녀와라.”
이에 현성이 손을 휘휘 까닥이며 말했다.
그러자 연서가 승리의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시연의 팔을 끌었다.
“가자. 언니.”
“그래야지.”
그런 연서의 말에 시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 연회장을 나서기 직전.
“연서야. 잠깐만.”
“……응?”
시연이 연서를 향해 잠깐만이라고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혹시 괜찮다면 나중에……춤 좀 알려줄 수 있어?”
시연이 수줍은 듯 양 볼을 붉히며 말했다.
그 모습에 연서가 움찔거렸다.
그와 함께 현성이 방금 전 연서가 그랬던 것처럼.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지.”
“……고마워.”
그런 현성의 대답에 시연이 고개를 숙이며 생긋 웃었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하시연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방금 전 연회장에서의 이벤트 씬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에 현성이 만족스럽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연서의 입을 타고 이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온 건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이걸로 호감도도 올렸겠다.
이제는 다음 이벤트를 기다릴 때였다.
그대로 현성이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난 저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그럼 끝나는 대로 올게.”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곧 이를 마지막으로 시연과 연서가 연회장을 나서고.
혼자 남겨진 현성은 연회장 구석에 마련된 빈 테이블에 앉았다.
이어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에는 많은 손님들이 와있었지만, 전부 저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뿐.
정작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은 현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 현성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얼핏 보면 시연과 연서를 기다리는 듯 했으나, 그 둘이 자리를 뜬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일을 보고 온다 한들.
지금 당장 그녀들이 도착할 리는 없었다.
즉, 이 자리에서 현성이 기다리는 건 그 둘이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터억.
누군가 현성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기분 나쁜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가 몸, 아니 주변을 덮고 있는 것 같은 묘한 이질감.
이에 현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건 하얀 백발에 날카로운 눈동자.
“……이렇게 보는 건 초면이지?”
그가 현성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분명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허나 현성은 그의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거 하진우 도련님 아니십니까.”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하진우.
하 가문의 둘째이자, 이번 에피소드의 주요 빌런이었다.
“호오, 내 이름을 알고 있나?”
현성의 말에 진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진우가 현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흑발. 차갑게 내려앉은 두 눈.
자료에서 봤던 사진과 똑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당황하는 기색도, 겁내는 기색도.
일말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한 표정이 전부.
‘……건방져.’
진우가 내린 현성의 첫 번째 평가였다.
감히 이름도 모를 몰락가문의 출신 주제에 자신을 보고도 이런 반응이라니.
그야말로 고아인 시연에게 붙은 놈답게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그래. 아무튼 반갑군.”
허나 진우는 우선 이빨을 감추고 손을 내밀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현성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헌데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시연이와 연서라면 안 그래도 방금 급한 일이 생겼다고 나갔는데 말입니다.”
“아. 그랬지. 그런데 그 둘을 보러 온건 아니고…….”
진우가 주변을 흘깃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건 여전히 현성 말고는 보이지 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려 하 가문의 둘째가 직접 모습을 보였다.
이에 주변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법도 했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뿐.
현성과 진우가 있는 곳을 향해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마치 그 둘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뒤.
진우가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자네를 보러왔을 뿐이지.”
“……저 말입니까?”
“그래.”
동시에 진우가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우리 아끼는 시연이 쪽에 붙은 가문이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
“그래서 그 녀석 얼굴 좀 보러왔지.”
그러면서 진우가 팔짱을 꼈다.
“무엇보다도 난 무릇 모든 것에는 어울리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그런 면에서 너는 참 시연이와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진우가 싱긋 웃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고아와 몰락가문이라.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하지만 그도 잠시.
진우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했다.
“그런데 하 가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단 말이지. 시연이와 너. 둘 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타고 느껴지는 미약한 살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현성이 물었다.
그러자 진우가 걸터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요컨대 증명이 필요하다는 거지. 과연 니가 정말.”
그대로 진우가 현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 가문에 어울리는지.”
동시에 그때였다.
진우의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저마다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현성을 에워쌌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었다.
이 역시 원작의 전개와 동일.
즉 이게 바로 줄곧 그가 기다리던 이벤트였다.
“……이번에는 이 애송이입니까?”
그들은 진우를 따르는 세력들 중 하나.
그리고 그 역할을 간단했다.
진우의 명령에 따라 눈앞의 녀석을 처리하는 역할.
-뚜두둑.
그들이 주먹을 꺾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이에 가장 맨 앞에 서있던 자가 진우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진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항상 하던 대로.”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난 간다.”
그와 함께 진우가 현성을 흘깃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방금 말한 대로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 말에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들어가십쇼. 도련님.”
“그래. 뒷말 안 나오게 잘 처리하고.”
그대로 진우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떠나고 어느새 주변에는 현성과 그들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현성이 그들을 훑어보았다.
“…….”
그러자 맨 앞에 있던 녀석이 바깥을 가리켰다.
“혹시나 말하지만 소리 지르지 마라. 애송아. 어차피 안 들리니까.”
이어서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일런트는 물론, 환영마법까지. 아마 지금쯤 연회장에 있는 그 누구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다.”
진우가 등장했을 때 느껴졌던 기분 나쁜 감각.
그때부터 마법을 펼쳐둔 게 분명했다.
이를 증명하듯 주변의 그 누구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형님, 이 새끼 굳었는데요?”
녀석들이 자리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 현성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이에 형님이라고 불린 녀석이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와인병을 땄다.
그 다음 와인을 현성의 발에 부으며 말했다.
“긴장 좀 풀어드려야지.”
-투두둑.
곧 붉은 와인이 현성의 신발을 적셨다.
그리고 그가 와인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현성을 귀에 대고 말했다.
“그렇지? 귀여운 새끼 같으니.”
“……사일런트랑 환영마법이라 했지?”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주 마음에 드네. 그런데…..”
현성이 자신의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발. 어쩔 거야.”
“……뭐?”
“너 때문에 더러워졌잖아.”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니까 빨리 닦아.”
그 말에 녀석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야.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그 순간이었다.
줄곧 가만히 앉아있던 현성이 돌연 테이블에 있던 와인 병을 부여잡고.
그의 대가리를 향해 와인병을 후려 갈겼다.
-콰장창!
채 누가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
그 충격에 와인 병이 산산조각 나며 날카로운 소리가 삐져나왔다.
뒤이어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끄아아악!!”
와인 병에 머리통을 후려 맞은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런 그의 머리를 타고 피인지 와인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해? 안 닦고?”
동시에 그런 현성의 앞에는 어느새 퀘스트 창이 떠올라있었다.
[퀘스트 : 하 가문의 증명]
퀘스트 내용
-눈앞의 패거리를 제압하시오.(진행 중)
보상 : 힘 스텟 +5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