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하 가문(6)
[검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아이로구나.]
시연을 처음 본 알레시아의 감상이었다.
이에 현성이 손가락으로 알레시아의 머리를 간질거리며 대답했다.
“쟤가 하시연.”
그러자 알레시아가 그런 현성의 손길이 익숙한 듯.
기분 좋게 그르릉거리며 말했다.
[아, 그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라고 했던 아이 말이냐?]
“그렇지.”
[그렇다면 그 옆은?]
현성의 어깨위에 있던 알레시아가 고갯짓으로 연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연서라고. 시연의 동생이야.”
[호오…….]
그런 현성의 대답에 알레시아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연과 연서, 그리고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레이첼도 그렇고 보아하니 넌 참 여복이 많은 거 같구나.]
“……그런가?”
현성이 잘 모르겠다는 투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알레시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만약 기사들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네놈은 지금쯤 땅에 묻혔을 것이다.]
레드 후드 기사단.
그들은 저마다 무력은 뛰어났지만, 여자와는 영 인연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해가 어렵다면 현대의 군대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동시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티리카 님도 그랬나요?”
이에 알레시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말도 말거라. 적군은 그렇게 잘 잡으면서 여자의 마음은 왜 그리 못 잡는지…….]
그렇게 말하는 알레시아의 말투는 겉보기에는 장난스러웠지만, 여전히 티리카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그도 잠시.
알레시아가 품속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난 그동안 잠시 잠이라도 자고 있겠다. 혹 안에서 재밌는 일이 생기면 깨워주게나.]
“물론이지.”
그와 함께 알레시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진 게 아닌 단순히 투명마법을 쓴 것뿐이었다.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알레시아를 토닥였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럼 들어갈까?”
현성이 다가오는 시연과 연서를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연서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현성의 손을 잡고.
“흥, 기본적인 예의는 알고 있네.”
시연은 그런 연서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현성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그렇게 현성이 둘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던 찰나였다.
돌연 연서와 시연의 스마트폰을 타고 알림음이 떴다.
-띠링.
이에 둘이 동시에 알림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뒤.
연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그대로 연서가 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언니도?”
“응. 나도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러면서 시연이 현성을 향해 화면을 보여줬다.
그런 그녀의 화면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하 가문은 따로 이동하라고?”
그건 다름 아닌 하 가문은 예정된 연회장의 입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따로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연서가 작게 혀를 차며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쯧.”
연서의 메시지 또한 시연과 같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도 그럴게 지금껏 이랬던 적이 있었는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에 시연 역시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허나 그도 잠시.
시연이 저 멀리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며 멈칫거렸다.
그곳에는 실제로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자는 자신들과 같은.
그러니까 연회의 주최자.
하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시연이 스마트폰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자신과 반대파에 속하는 직계파의 하진우.
그런 시연을 보고 현성이 말했다.
“벌써 시작된 모양이네.”
안 그래도 병원에서 현성이 하 가문의 승계다툼에 참가의사를 밝힌 후.
시연은 그에게 미리 당부했다.
분명 첫째와 둘째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견제가 들어올 거라고.
아무리 시연 쪽의 상황이 불리하다한들.
직계파라면 그렇게 나올게 확실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하 가문의 주최로 열리는 연회부터 그 견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곧 뒤늦게 이를 눈치 챈 연서가 현성과 시연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야 따로 들어가면 된다지만, 문제는 현성이었다.
“현성, 넌 어떻게 할……”
그때였다.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둘은 먼저 들어가 있어.”
“……뭐?”
그 말에 연서가 미간을 좁혔다.
분명 입구부터 무슨 수작질을 부려둘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을 혼자 놔두라니.
그건 너무 위험했다.
“니가 그 인간이 얼마나 독한지 몰라. 차라리 그냥 우리랑 몰래 들어가자. 연회장 뒷문으로 가면 될 거야.”
연서가 자신의 오빠.
하준서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라면 보통 독종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연 쪽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둘째의 눈에 띠어 도움은커녕 반대로 박살난 가문도 존재했다.
자칫하면 현성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거기다 니네 가문 구리잖아.”
연서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지만, 후에 현성에게 직접 물어보고 들은 답이었다.
그의 가문은 몰락가문에다가 누나는 행방불명.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메이드 하나가 전부.
권세의 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혼자 보냈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게다가 그냥 구린 거면 몰라. 엄청 구리잖아.”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응?”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싶어서 말이지.”
현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연서가 악의 하나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치만 사실이잖아.”
“오냐. 너 잘났다.”
“맞아. 그것도 사실이지.”
뻔뻔한 연서의 대답.
그러고 보니 얘도 원래 둘째 못지않게 안하무인한 인간이었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혀를 찼다.
“퍽이나.”
그대로 현성이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입구가 떡하니 있는데 내가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나? 죄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연서가 신경질을 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러니까 분명 둘째가 수작질을 부려놨을……”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라고.”
현성이 그게 별 대수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현성의 모습에 연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그래.”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시에 연서가 언니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언니!”
언니까지 왜 이러는 걸까.
평소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허나 그녀의 얼굴을 본 그때.
연서는 알 수 있었다.
시연은 평소처럼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평온하게 내려앉은 그녀의 말투.
“그럼 우리 먼저 가있을게.”
“……언니?”
그런 시연의 대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아. 그럼 조금 이따 안에서 봐.”
“응.”
이에 시연 역시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태연한 시연과 현성.
그리고 졸지에 그 틈에 낀 연서가 재빨리 그 둘을 번갈아보았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허나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이미 현성은 혼자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연서가 급한 대로 손을 뻗었다.
-터억.
하지만 시연이 이를 막아섰다.
그대로 그녀가 연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야지?”
이에 결국 참다못한 연서가 미간을 구기며 저 멀리 현성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언니의 손은 절대 뿌리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시연이 자신의 손을 잡은 게 여간 좋았던 모양이었다.
“……언니도 무슨 생각이야.”
화를 내려던 연서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시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믿으니까.”
“……뭐?”
단지 그거 하나 뿐?
연서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시연이 연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린 가자. 어차피 안에서 만날 텐데 뭐.”
그런 시연의 모습은 연서에게 있어 너무나도 낮선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믿는다.’ 라는 허무맹랑한 말로 넘어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이상하게도 현성이 엮여있다면.
아니 현성과 함께라면.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걱정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연서의 눈에는 그런 시연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항상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시연이 잠시나마 그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보면 언니도 나랑 같은 10대같단 말이지.’
무엇보다 귀엽지 않은가.
그거면 충분하다.
‘물론 그 모습이 현성 그 자식과 같이 있을 때만 나온다는 게 샘나긴 하지만…….’
아무튼 시연이 현성을 믿었다면.
그녀 역시도 현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의 선택 아닌가.
‘그리고 현성이라면……진짜 뭔가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니까.’
시연이 저 멀리 현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하 가문의 연회장 앞.
현성이 그 앞에 잔뜩 줄을 서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단순히 하 가문만 따로 들어가는 게 아닌, 다른 가문 내에서도 또 따로 나뉘는 모양이었다.
이에 언제 온 건지 모를 아저씨가 현성의 옆에 섰다.
“에잉, 귀찮게 갑자기 왜 안하던 짓을 하는 건지……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원단의 옷에 장식품을 둘둘 두른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나 재벌이요. 하는 모습.
“……그러게 말입니다.”
현성이 입구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아. 내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제임스 강. 조그마한 사업하나 하고 있는 사람일세.”
그러면서 그가 현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임스 강.
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제임스 그룹의 오너로.
현재 저명한 명품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동시에 최근에는 기존의 사업과 헌터들의 무기사업을 결합시켜, 헌터제 명품을 만드는 걸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 역시 이번 하 가문의 연회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연회의 빠질 수 없는 묘미는 바로 친목.
이에 벌써 주변에는 여러 인사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유 가문의 유현성이라고 합니다.”
“호오, 유 가문이라 처음 들어보는 곳이군.”
그런 제임스 강의 눈이 좁혀졌다.
현성의 가문을 재보려는 듯 했다.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지만,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어도 큰 힘을 가지는 가문도 있는 법이다.
이에 현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아마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밖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 처음 들어보실 겁니다.”
아. 해외 쪽인가.
제임스 강이 그렇게 지레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생긴 게 꽤나 귀티나 보여서 접근했더니, 꽤 잘나가는 가문인가보군.
허나 그 실상은 조금 달랐다.
‘누나는 집나갔고 수연도 지금쯤 마족의 흔적을 찾느라 나가있으니 밖에서 활동하는 셈이지.’
무엇보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지금 아카데미 밖에 있지 않는가.
현성이 대수롭지 않게 옷깃을 다듬었다.
그리고 그 와중. 어느새 현성과 제임스 강이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아, 제임스 강님 아니십니까?”
그와 동시에 제임스 강을 알아본 시종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러면서 시종이 곧바로 검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건네며 말했다.
“안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팔찌는?”
“이번에 진우도련님께서 준비하신 겁니다. 아마 재밌게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이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피식 웃었다.
‘……이게 둘째가 준비한 견제.’
그 밖에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벌써 알 수 있었다.
이 팔찌는 일종의 등급제.
가문의 권세 혹은 재물에 따른 분류가 분명했다.
‘그에 따라 입장에 제한이 걸리고 말이야.’
저번에 블랙마켓이랑 비슷했다.
아무튼 그렇게 제임스 강이 가장 높은 등급인 블랙등급을 받고.
이어서 현성의 차례가 왔다.
-처억.
그러자 시종이 그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겉보기에는 꽤나 있는 집 자식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제임스 강과 이야기까지 나눴지 않나.
그러자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 가문의 유현성.”
“유 가문이라…….”
그러면서 시종이 방명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도 잠시.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그래도 유명가문의 경우.
사전에 미리 표시해두었다.
그러나 그 명단에 유 가문을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시중이 말했다.
“혹 가문 명 말고 다른 특이사항 같은 건 없으십니까? 만약 없으시다면 이쪽으로……”
그가 황동색 반지를 내밀었다.
브론즈 등급.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
그와 동시에 제임스 강의 눈빛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아니 물들기 시작한 찰나였다.
현성이 싱긋 웃으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그럼 이건 어떤가?”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