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하 가문(5)
병원에서 현성이 시연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 이후.
이 사실은 하 가문 내에서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퍼졌다.
애초에 대부분은 첫째와 둘째가 이끄는 직계혈통 쪽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시연과 방계파에게 직접 나서 지원을 약속한 가문은 수가 적었으며, 여기서 새로운 가문의 등장은 금방 티 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병원에서의 일이 있은 지 불과 이틀 뒤.
그 사실은 하 가문의 둘째.
하진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검술명가 하 가문의 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층에 위치한 집무실.
“흐음…….”
그곳에는 하얀 백발의 남성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보면 전형적인 미남처럼 보였지만,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까.
섣불리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하 가문의 둘째, 하진우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은 한 사진에 줄곧 머물러있었다.
흑발과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
유현성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류였다.
그대로 한참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그가 마침내 손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그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무슨 대단한 놈인가 했더니 결국은 쓰레기군.”
한창 가문승계문제로 날이 서 있던 와중.
얼마 전 그의 귀를 타고 한 소문이 들어왔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시연이 속한 진영에 새로운 가문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소리였다.
이에 어떤 얼간이인가 싶어 관련 정보를 찾아오라 시켰건만.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별 볼 일 없었다.
이름 유현성. 현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그 휘하에 있는 거라고는 메이드 하나가 전부.
원래대로라면 그가 아닌 위에 있는 그의 누나가 가주가 되었어야 했으나, 누나는 현재 가문에서 나와 행방불명.
그러니까 현성은 그냥 이름만 있을 뿐인 몰락가문의 가주였다.
“누가 고아년 아니랄까봐 꼬이는 놈도 비슷비슷하군.”
진우가 피식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다른 방계의 놈들이 더 나을 정도였다.
하여간 이래서 시연은 안 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서류를 몽땅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화르륵!
그와 함께 벽난로를 타고 단숨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대로 그가 타오르는 붉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하시연. 하 가문의 셋째로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그녀는 외부에 들여온 자식.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양녀였다.
그것도 부모 없는 고아.
덕분에 처음 가주,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데려왔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자하니 10년 전 대변동 때 무너진 지하철에서 구조했다던가.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들여올 게 없어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던 쓰레기를 주워오다니.
“……가문의 수치가 따로 없지.”
거기다 그 장소가 검술명가라고 불리는 하 가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게 하 가문이 어떤 곳인가.
검술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명실상부 정점에 서있는 가문.
그 위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될 고귀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문에 고귀한 피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고아가 들어왔다고?
진우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 가문은 언제나 정점에 있어야 했으며, 그 정점이 허락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온전히 그 핏줄이 흐르는 직계뿐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그의 누나, 하수연을 비롯한 가문의 주요 어른들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이었다.
혈통을 유지해야 그 명맥도 이어지는 법.
그렇기 때문에 진우는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돌인 시연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검 좀 잘 휘두른다고 추앙받는 꼴이란.’
진우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천재(天才). 하 가문이라면 어릴 적에 누구든 들어본 말이었다.
그의 누나도 그랬으며, 심지어는 제일 어린 연서마저도 그랬다.
허나 시연은 달랐다.
외부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에게 허락된 건 천재라는 단어대신 고아라는 말이 전부였다.
이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다른 천재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음 시연이 검을 잡은 날.
그 날을 시작으로 모든 평가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천재? 그런 단어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축복, 아니 운명.
그녀는 검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였다.
불과 7세에 불과한 아이가 검기를 발현했다.
압도적인 기량.
7세에 검기를 발현한 기록은 초대 가주.
그리고 시연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가문의 검식을 모두 익혔을 때.
그녀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하 가문의 검무(劍舞)를 펼치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검무를 펼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건 초대 가주가 만들어낸 유일한 검술이자, 비급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검이었으니까.
허나 그걸 시연이 해냈다.
이에 시연이 검무를 펼치던 그 날.
그녀는 고아라는 말 대신, 비로소 하시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녀를 하시연으로 부른 건 아니었다.
‘……인정할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하진우였다.
감히 고아주제에 하 가문의 성을 쓴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역시 천재라고 불리던 몸 아니었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아니 자신이라면 더더욱 잘 할 수 있음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점점 벌어졌으며, 시연이 10살이 되던 해.
마음 깊은 곳, 그는 무언가 무너지는 걸 느꼈다.
후에 그는 그때 무너졌던 게 자신의 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하 가문의 넷째, 연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남은 선택지는 두 개였다.
첫 번째. 인정대신 증오를 품고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두 번째. 동경을 품고 그 뒤를 쫒거나.
진우와 연서.
둘 다 자신의 검이 무너진 건 똑같았으나.
그 결과는 달랐다.
진우는 시연을 증오했으며, 연서는 겉으로는 증오하는 듯 했으나 결국 그 이면에는 시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오와 동경.
그 둘 중 무엇도 시연이 있는 곳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재능이란 아름답고도 무서운 단어였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옆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패배자들에게 허락되는 건 오로지 절망감 뿐.
모든 빛은 결국 단 한명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꾸구국.
진우의 주먹이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시연이 15살이 되던 해.
그녀와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이라는 평가밖에 남지 않았다.
그 자의 이름은 하수연.
시연과 10살 터울 차이가 나는 하 가문의 첫째였다.
그러나 그 마저도 현재 가주가 병상에 누워있기 때문에 내려진 평가였다.
한마디로 암묵적으로 더 이상 평가내리기를 멈춘 거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가주가 아직도 건재했다면, 시연을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수연이 아닌 가주가 됐을 수도 있었다.
“……”
고요한 진우의 집무실.
그가 멍하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피잇!
그가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순간 그의 손을 타고 푸른 기운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퍼억…푸스스…..
그와 함께 타오르던 불꽃이 단숨에 꺾여 사라졌다.
이제 보이는 건 붉은 빛을 잃어가는 불씨 뿐.
그대로 잠시 뒤.
남은 불씨마저 꺼지고 나서야.
“후우.”
그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다.
어차피 전력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오른다면…….’
방금 전의 그 불씨마저 밟아 꺼트리면 그만이었다.
가문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라고?
아니. 이건 오히려 가문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었다.
진우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었다.
-뚜르르……
곧바로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지, 진우 도련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다름 아닌 하 가문의 하수인.
그런 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하진우. 그가 누구인가.
하 가문의 둘째이자, 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게 누구든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미친놈.
실제로 자신의 뜻이 곧 하 가문의 뜻이라며,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려나간 하수인이 몇 명인가.
이에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도련님? 다른 건 몰라도 전 결백합니다. 전 아무것도……]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사과하는 게 맞았다.
괜히 딴 소리를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잘릴 수도 있었다.
허나 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행히 하수인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이번 주말. 연회 열리는 거 알고 있지.”
연회.
가문 승계를 앞두고 열리는 자리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명목상으로는 연회라는 이름을 쓰지만, 본 목적은 다른 가문들을 초대하고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는 자리.
[예! 물론입니다!]
하수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연회는 왜 이야기하는 걸까.
그리고 그의 의문이 풀리기도 전.
진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 연회에는 알다시피 많은 귀빈들이 오지 않나.”
[그, 그렇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가문들이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자네의 생각에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아무나 오면 안 되겠지?”
[……맞는 말입니다.]
그대로 진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회에서는 그 기준을 좀 확실히 정해둬야겠어.”
[그럼 그 기, 기준은 어떻게……]
“그건 금방 알려주도록 하지.”
그러면서 진우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듣자하니 그 유현성이라는 놈.
몰락가문의 가주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가문에 다른 인물들은 물론이며, 재산도 있을 리 만무하겠군.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빙글 돌렸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현성의 가문에 있는 건 메이드 수연 하나 뿐이며.
거기다 재산이라고는 수연이 벌어오는 생활비가 전부였다.
애초에 사는 집조차 지키기 어려운데 재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뭐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지만…….”
허나 그 생각도 잠시.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조소했다.
역시 밟아 버릴 거면 대들 생각조차 못하도록 제대로, 확실히, 철저하게 밟아버리는 게 좋았다.
-서걱서걱.
그와 함께 진우가 펜을 움직이며 하나하나 이번에 열릴 연회의 기준을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몰락 가문의 가주 현성은 절대 넘을 수 없는 기준을 말이다.
그대로 그의 집무실에는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 *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어느새 주말이 다가오고.
예정했던 대로 연회가 열렸다.
이는 시연과 연서는 물론이며, 현성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연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그래, 연회라고 했느냐? 이거 기대되는구나.]
현성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알레시아가 말했다.
그런 그녀는 어딘가 즐거워보였다.
이에 현성이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정도로?”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 이게 몇 백 년만의 연회인지……게다가 레이첼과의 게임도 미루고 찾아온 곳 아닌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좀 즐겨 보거라.]
알레시아가 작게 웃으며 앞발로 현성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난 이런 자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말이야.”
[무슨 말이냐?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현성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그런 그는 연회인 만큼.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이었다.
깔끔한 턱시도에 검은 보 타이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드레스 코드는 블랙타이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현성의 흑발과 차갑게 내려앉은 눈 덕분일까.
그는 알레시아의 말대로 꽤나 턱시도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일 정도.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여기야.”
그 정체는 바로 연서.
이에 현성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시연이 서있었다.
가슴 밑에서 허리선이 절개되는 엠파이어 드레스였다.
그런 시연은 검은 진주를 연상케 하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소와는 다르게 올려 묶은 머리.
“안녕.”
그대로 시연이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