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하 가문(4)
“……가문승계가 뭐?”
연서의 말에 현성이 물었다.
뭔가 꼭 뒤에 할 말이 있는 거 같았는데.
그런 현성의 물음에 연서의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가문승계는……”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네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야.”
“그래서?”
“외, 외부인이 쉽게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지.”
그러면서 연서가 시연의 이불자락을 꼭 잡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도와주고 싶은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안건은 같은 가문이 아니고서는 힘들단 말이지. 나처럼.”
좋아. 제법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연서가 나름대로 자신의 답변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에 현성이 빤히 연서를 바라보았다.
맨 뒤에 ‘나처럼’에 강세를 넣은 거까지.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주제에 욕심만 그득그득하기는.’
삐뚤어진 애정이란 이토록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그 애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맞는 말이야. 가문의 일은 내부의 사람들의 일이지.”
“그, 그래?”
현성의 말에 연서가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현성이라면 물러나지 않을 줄 알았거늘.
의외로 얌전히 물러서는 기세였다.
아무튼 그럼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나 혼자 언니 곁에……”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지금 상황이 많이 불리하다고 하지 않았나? 대항할 세력은 어떻게 모으게?”
“그거야 다른 가문의 가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겠지.”
실제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방계의 세력이 모자라면, 다른 가문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서의 대답과 동시에 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럼 됐네.”
“……뭐가?”
“우리 가문이 도와줄게.”
그 말에 연서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래. 그게 니가 말한다고 되는 일인 줄 알아? 그런 건 가문의 가주가 나서서 여러 조건을 따져보고 서로 절충안을 제시하여……”
“맞아. 그래서 말했잖아.”
“…….”
이에 연서의 직감을 타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러면서 연서가 그를 바라본 찰나.
현성이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줬다.
-처억.
그건 다름 아닌 검은 엠블럼에 호루스의 눈을 연상케 하는 그림.
유 가문의 문양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가주라고.”
“……?”
그와 동시에 연서가 멍하니 검은 엠블럼과 현성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상황파악을 끝낸 연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현성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니가 뭔데!”
“……가주라니까.”
현성이 엠블럼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니까 왜!”
“왜는 무슨.”
그런 연서의 외침에 현성이 심드렁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꼬우면 니가 가주하던가.”
“이잇…!”
연서가 분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현성이 곧바로 그녀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환자 앞이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지?”
“…….”
이에 연서가 병상에 누워있는 시연을 흘깃 바라보고는 슬쩍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서야 어릴 때부터 워낙 솔직하지 못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현성과 저렇게 친했던가?
그대로 시연이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둘이 많이 친해 보이네?”
시연의 물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서와 현성이 즉답했다.
“내가 쟤랑?!”
“딱히.”
그런 둘의 모습에 시연이 자기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아카데미에서 또래의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줄곧 혼자였던 탓에 느껴보지 못한 기분.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 한 구석이 순간 홀가분해졌다.
“……언니가 웃었어?”
그와 함께 시연을 바라보고 있던 연서가 미간을 좁혔다.
세상에. 여기서 시연이 웃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연서가 눈을 부비며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하 가문에 있으면서 시연이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장 연서가 기억하는 마지막 웃음만 해도 시연이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할 당시.
아픈 몸을 이끌고 온 가주의 칭찬에 웃은 게 전부.
심지어 그마저도 먼발치에서 봤던 터라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아무튼 그때를 제외하고서는 웃음이라고 할 만한 걸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검을 휘두를 뿐.
그것이 하 가문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연이었으며.
이는 아카데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이미지였다.
헌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시연이 웃고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초근거리에서 말이다.
그대로 연서가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이, 이런 희귀한 모습을 놓칠 수 없…!’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려던 연서가 멈칫거렸다.
이렇게 대놓고 찍어도 되는 걸까.
냅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무조건 의심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다.
그도 그럴게 언니의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 소장하고 싶다고 어떻게 말하는가.
‘큭, 그래도 찍고 싶은데……’
연서가 지금껏 본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이에 현성이 그런 연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나마나 또 이상한 삽질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도 그런 기질이 있던데.’
혹시 삽질은 하 가문의 특징이었나.
현성이 연서와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허나 그도 잠시.
“……너 뭐하냐.”
현성이 연서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연서가 한 박자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벼, 별거 아냐.”
“퍽이나 그러시겠다.”
어째 오늘따라 많이 망가지는 연서였다.
그리고 물론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연서가 시연의 눈치를 보며 현성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야, 니가 사진 좀 찍자고 해봐. 방금 전에 열 잴 때 보니까 완전 선수더만.”
하연서.
그녀는 눈치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소녀였다.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굳이? 웃는 게 뭐 대수라고.”
-움찔.
그러자 연서가 정색하며 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뭐야. 너 언니가 웃는 모습 더 본 적 있어?”
“넌 그동안 눈 감고 살았냐. 무슨 그런 걸 물어봐.”
“아니 그래서 본적 있어 없어?”
“당연히 있지.”
단호한 현성의 대답.
당장 맨 처음 선천강에서 만났을 때도 봤을 거다.
이에 연서가 분한 듯 현성을 째려보았다.
“큿.”
“아. 혹시 본 적이 없으신가봐?”
현성이 입 꼬리를 슬쩍 올리며 조소했다.
그대로 그가 연서에게 속닥였다.
“저런. 넌 시연이랑 같은 가문치고 아는 게 많이 없네.”
현성이 방금 전 연서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가문에 강세를 주면서 말했다.
“이씨…!”
그의 도발에 울컥한 연서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현성은 그런 연서를 가볍게 무시하며 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그래서 그 승계문제. 가능하다면 나도 도우고 싶은데 어때?”
이는 원작의 전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승계문제에 있어 도움이 필요한 시연.
그러자 주인공 유진은 흔쾌히 그녀를 도와주기로 한다.
‘유진도 따지고 보면 한 가문의 가주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에 현성은 이때만큼은 자신이 몰락가문이더라도, 가주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건…….”
현성의 말에 시연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한 가문의 가주가 직접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지금은 한 명의 손이라도 급한 상황이니까.
그러나 괜히 현성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하는 거 같아 미안했다.
그대로 시연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설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이에 시연이 움찔거렸다.
그럼 그렇지. 보나마나 그녀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았다.
하여간 시연은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제 몸도 못 챙기고 쓰러지지.
“시연아, 혹시 내가 선천강에서 했던 말 기억나?”
그와 함께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도와준다고 할 때는 그냥 받아. 지금은 혼자 다니는 게 편할지 몰라도 나중에 가면 힘들어진다?”
그 말에 시연이 휙 고개를 들었다.
기억났다.
처음 선천강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시연이 혼자 데일런트를 상대하기 직전.
현성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와 함께 시연이 아무 말 없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잠시 뒤.
머뭇거리던 시연이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도와줄래?”
그녀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하 가문에 들어간 이후로 처음 나온 말이었다.
검을 휘두르다 손에서 피가 흐를 때도.
마수를 상대하다 검이 부러졌을 때도.
해본 적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에 현성의 대답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든지.”
현성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걸로 현성 역시도 하 가문의 승계문제에 참여한 거나 마찬가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서가 팔짱을 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언니보다 내가 먼저 나서 거절했겠지만.’
그 대상이 무려 현성이었다.
무엇보다 연서는 직접 눈앞에서 그의 무위를 지켜본 적이 있던 만큼.
그라면 충분히 전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밭 속.
쓰러진 화이트레이 앞에 당당하게 서있던 그의 모습.
아직도 그때, 현성이 단신으로 화이트레이를 쓰러트린 장면이 생생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어린 나이에 가주에 오른 것부터 이미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그 이유는 단순히 현성의 가문이 몰락가문이기 때문이었지만, 연서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조금 더 미래의 일이었다.
‘……하여간 결론은 현성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는 거지.’
그래도 아직 첫째와 둘째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지만, 이상하게 눈앞의 현성에게서는 화이트레이 때처럼 사람을 기대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전력의 상승이니까. 충분히 좋아할만한 일이지.’
안 그래도 아무리 자신이 하 가문 내에서 시연을 지지한다한들, 그녀는 어디까지나 막내이기도 하고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입장.
그런 면에서 현성의 합류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했다.
‘다만…….’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래서 도대체 둘이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현성의 제안을 망설이던 시연.
그런데 그가 ‘선천강에서 했던 말 기억나?’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던지더니, 시연이 곧바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심지어는 먼저 도와달라고 말했다.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그대로 연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서.”
돌연 시연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연이 손을 뻗으며 작게 웃었다.
“너도 도와줄래?”
“……!”
그와 동시에 연서의 얼굴을 타고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과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해있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
하지만 그도 잠시.
“크흠.”
뒤늦게 연서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 그렇게까지 말한다면……도,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얼굴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에 그런 연서를 바라보고 있던 현성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솔직하기 못하기는.”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