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하 가문(1)
현성이 그런 레이첼과 알레시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둘이 여간 죽이 잘 맞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둘은 여기 있어.”
그러자 게임기 앞에 앉아있던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넌 어디가게?”
“현성. 분명 오늘은 레이첼을 꺾을 비기를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뭐?”
그 말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얍삽이 알려주지 마라.”
“글쎄. 얍삽이가 아니라 실력이라니까.”
“아니 그게 어딜 봐서 실력이야!”
그와 동시에 옆에 앉아있던 알레시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현성이 말했다.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 실제로 레이첼은 현성에게 매번지지 않는가?”
“그, 그건……”
“원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알레시아가 패드를 쥔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 평소라면 무려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말인 만큼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일 텐데, 저렇게 말하니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이에 현성이 바깥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이클레아 교수님을 뵈러갈 겸 이것저것 할 일이 있어서.”
“……윽.”
교수님이라는 단어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피의 왕국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는 아카데미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후로 그녀 역시 강의내용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일까.
레이첼은 부쩍 교수라는 단어를 기피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과연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원체 암기력이 좋은 탓에 성적 자체는 준수하게 나오는 편이라고 한다.
‘다만 문제라면 뭣도 모르고 그 좋은 암기력을 동네방네 자랑했다가 교수님들의 눈에 띄어 온갖 러브콜을 받았다는 거겠지.’
저번에는 마법학 교수 리플레카에게 시간나면 본인의 연구실에 한 번 들리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했었나.
심지어는 방금 전 현성이 언급한 이클레아도 호시탐탐 레이첼을 노리고 있었다.
‘저런 인재는 써먹을 수 있을 때 써먹어야한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데.’
현성이 측은한 눈빛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기억하자. 교수의 눈에 띈다면 그 최후는 연구실에 끌려가는 것뿐이다.
그대로 현성이 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럼 난 먼저 가본다.”
“다녀오거라.”
곧바로 알레시아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이어서 레이첼이 잔뜩 털이 선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다녀와. 혹시나 가서 내 이야기 하지 말고. 알겠지?”
“노력해볼게.”
그와 함께 현성이 방을 나섰다.
그렇게 그가 향한 곳은 이클레아의 연구실.
잠시 뒤.
-똑똑.
현성이 연구실을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피곤에 찌든 이클레아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흡사 좀비를 연상케 하는 소리.
“들…어와……”
-끼익.
이에 현성이 연구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이클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보고 있던 자료에 얼굴을 푹 묻었다.
“누군가 했더니…또 너야?”
예전에 여왕의 궁전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그를 본 이클레아는 반김보다는 두려움과 피곤함이 앞서고 있었다.
허나 현성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뻔뻔하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못 봐서 그리우셨죠?”
“……”
그 말에 이클레아가 짜게 식은 눈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녀가 대답했다.
“너 밤길 조심해라. 진짜.”
어째 레이첼한테도 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아니 올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부터 온갖 자료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 없었다.
이에 현성이 아슬아슬하게 쌓여진 책 위에 병 하나를 올려놓았다.
-타악.
“오늘은 그냥 안부나 전할 겸 왔습니다.”
“……이건 뭔데?”
이클레아가 일어날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까닥이며 방금 현성이 탁자에 올려놓은 의문의 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현성이 병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페가수스의 피. 선물입니다.”
그런 현성의 말과 동시에 축 쳐져있던 이클레아가 눈을 반짝였다.
페가수스의 피.
일주일 전 블랙마켓에서 가져온 물건 중 하나로, 연금술에 있어 상당히 희귀한 재료인 동시에 지금은 거래가 금지된 물건이었다.
“너 이걸 어떻게 구한거야?”
그만큼 이클레아의 반응도 이해되는 바였다.
“아무튼 고마워. 이건 잘 쓸게.”
이클레아가 한결 생기가 돌아온 얼굴로 작게 웃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확실히 연금술이 적성에 맞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근데 어쩌다 마법소녀가 됐는지……”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기 무섭게 이클레아가 휙 고개를 들며 그를 째려보았다.
이에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혼잣말입니다.”
그와 함께 현성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일 없죠?”
여왕의 궁전 이후.
현성은 블랙마켓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거였다.
특히 마족과 관련된 일이라거나.
“아니 딱히. 요새 아카데미가 학기 말이라 바쁘긴 한데 그것 말고는 별 일없어. 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도 없고.”
혹여나 현성이 없는 사이.
마족이 저번 여왕의 궁전 때처럼 다른 던전을 노리고 움직였다거나 그런 일은 없던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이클레아의 옆에서 뿅! 하고 튀어나온 귀여운 토끼 한 마리.
[역시 너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하지만 걱정 말라구. 소년. 내 매지컬 센스에 걸리는 건 아직까지 없으니까.]
토끼의 이름은 다름 아닌 로미.
과거 이클레아가 마법소녀 매지컬 레드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와 함께 행동하던 신수였다.
그동안은 이클레아가 마법소녀로서의 힘을 봉인해둔 탓에 나타날 기회가 없었지만, 저번에 여왕의 궁전에서 무려 이클레아 그녀가 스스로 마법소녀의 힘을 쓴 탓일까.
로미는 종종 이렇게 나와 얼굴을 비추고는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른 건 몰라도 누구보다 마족의 기운에 민감한 신수가 그랬다면, 별일 없을 터였다.
동시에 이클레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미의 귀를 부여잡았다.
-덥썩.
“야. 내가 마음대로 나오면 그날로 저녁은 토끼직화구이라고 했었지?”
[매, 매지컬 레드. 그게 아니라…..!]
그 말에 이클레아가 으드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내가 앞으로는 뭐라 부르라고 했지?”
그런 그녀의 말을 타고 미약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로미가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이클레아 교수님이요.]
“그래. 똑똑히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대로 이클레아가 로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직화로 구워지기 싫으면 말이야.”
[아, 알겠어……]
이것이 정녕 마법소녀와 신수의 모습인가.
불공정계약의 말로는 생각보다 훨씬 살벌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둘이 사이좋으시네요.”
이에 이클레아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시정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하하.”
그 말에 현성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것도 잠시.
이클레아가 손가락을 퉁기며 로미를 역소환시켰다.
“그럼 일단 넌 들어가 있어.”
[자, 잠깐…! 나온 김에 좀 더 공기라도 쐬고 들어갈……!]
“닥쳐. 신수라는 놈이 발랑 까져가지고는. 그 잘난 요정세계에 처박혀서 명상이나 하고 계세요.”
그 과정에서 로미의 저항이 있었으나, 곧바로 이클레아에게 제압되었다.
그렇게 로미를 보내버린 이클레아가 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아무 일 없어? 누나한테 연락이 왔다거나.”
그의 누나. 유하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는 역시 마족들의 움직임으로 이어질 터.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연락은 없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진즉에 현성이 수연에게 일러두었다.
혹시 누나에게 연락이 온다면 바로 알려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수연이 연락을 기다리기만 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본인이 직접 정보를 모아본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마족들은 당분간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못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현성이 먼저 선수를 쳐 여왕의 궁전에서 도플갱어 퀸을 처리했고, 무엇보다도 이번 블랙마켓에서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를 빼돌림과 동시에 그녀와 계약까지 맺었지 않은가.
덕분에 마족들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전력을 깎아둔 상태.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또 언제 어떻게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최대한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지.’
그러면서 현성이 이클레아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마족이 아카데미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거 말이지?”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스페리아>의 스토리 전개상.
후반부에 예정되어 있는 마족의 아카데미 습격.
이에 현성은 이클레아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 내부적으로 대비를 해둘 걸 요청했다.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지만…다른 교수들이 믿어줄 지는 모르겠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고.”
이클레아가 펜을 매만지며 말했다.
물론 그녀야 현성이 지금껏 보여준 모습들이 있으니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쉽사리 믿기 힘든 말이긴 했다.
지금껏 제대로 모습도 비추지 않은 마족들이 아카데미를 노린다니.
아마 미하일을 포함한 다른 교수들에게 말해도 별 근거도 없고 추측만 있는 이상.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입장이 분명했다.
“다른 교수들까지 믿게 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대비만 해주세요.”
“대비라면?”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게 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해요.”
만약 습격이 온다 한들.
교수들이 자리만 비우지 않는다면 피해는 줄일 수 있을 터.
지금은 그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현성이 이클레아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이걸로 전해줄 건 다 전해줬고, 들을 것도 다 들었다.
이에 이클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쥐었다.
“그래. 다른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주도록 하지. 그리고 이거.”
이클레아가 현성이 준 페가수스의 피를 흔들며 싱긋 웃었다.
“다시 한 번 고마워. 유용하게 쓰도록 할게.”
“별말씀을요.”
그러면서 현성이 연구실을 나가기 직전.
이클레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뭘?”
“귀여운 매지컬 레드의 팬으로서 말입니다.”
그런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클레아가 움찔거렸다.
그대로 연구실을 타고 수치심에 물든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라는 거야. 당장 나가!!”
“예예.”
현성이 이클레아의 외침을 뒤로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이걸로 첫 번째 볼 일을 끝냈다.
곧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그리고 연구실을 벗어난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학생회실로 향하는 복도였다.
그러자 때마침.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하시연.
그런 시연은 줄곧 한 손 가득 서류를 든 채.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단순히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
평소의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일과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하아…하아……”
평소에 비해 붉게 물든 얼굴.
가파른 숨과 불규칙적으로 비틀거리는 몸.
그와 함께 시연이 학생회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휘청.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지려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던 현성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로 무사히 현성의 품에 안긴 시연.
동시에 시연을 품에 안자마자 뜨거운 열이 확 올라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앓아누울 상태.
그동안 이 몸으로 어떻게 버틴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괜찮아?”
“…..현…성?”
그의 말에 시연이 뒤늦게 현성을 발견하고 입을 떼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
이에 현성이 그녀의 눈을 감겨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선 잠시 쉬고 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연의 의식이 끊겼다.
그렇게 텅 빈 아카데미의 복도.
현성이 잠든 시연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바빠지겠네.”
아카데미에서 쓰러진 시연.
이는 다음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