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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41화 (141/240)

141화 블랙마켓(10)

본디 원작 스토리에서 블랙마켓 에피소드의 진행은 간단하다.

주인공 유진이 지훈을 이용해 블랙마켓에 잠입.

그 후 블랙마켓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분노하여, 칼스를 쓰러트리며 마침내.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를 구출해낸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는 주인공 일행에게 감사를 표하며, 드넓은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쳐 날아간다.

그러나 지금, 원작과는 사뭇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그대가 티리카의 후계자라고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런 알레시아의 말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손목에 있는 은빛의 건틀렛이 티리카의 후계라는 것을 증명하듯 반짝였다.

이에 알레시아가 현성의 얼굴과 건틀렛을 번갈아보았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무엇보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그의 내음.

과거 그녀의 친우, 티리카가 항상 끼고 다녔던 그 건틀렛이 확실했다.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구나.]

알레시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눈앞의 소년이 티리카가 아니란 것도, 그가 친우의 의지를 잇는 자라는 것도.

그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

허나 영겁의 세월을 사는 드래곤에 있어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모든 일들이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지그시 현성을 바라보았다.

티 없이 검은 흑발.

차갑게 내려앉은 눈동자.

겉으로만 보자면 티리카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왜일까.

자꾸만 그에게서 티리카가 겹쳐보였다.

그 이유는 단순히 눈앞의 소년이 티리카의 건틀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알레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단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그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온기.

그의 손길은 처음 티리카가 자신을 구해줬을 때처럼,

전쟁터 속 죽어가던 자신을 구해줬던 티리카의 손길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동안의 과거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걸까.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알레시아가 천천히 두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헌리스 녀석도 만났다고 했었지?]

얼음의 기사 헌리스.

항상 티리카의 옆에서 푸른 창을 들고 있던 젊은 기사로.

알레시아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그 장소가……]

“얼음무덤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대로 알레시아가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미련하리만큼 올곧은 녀석이었지. 마지막까지 마족과 싸우다 눈을 감았다 했느냐. 정말이지 그 녀석 다운 최후로구나.]

그렇게 말하는 알레시아의 목소리에서 작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자가 없음에 대한 그리움.

허나 헌리스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면 그건 기사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티리카가 꽤 그 녀석을 아꼈었지.]

그러면서 알레시아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이 자리에 티리카가 있었으면 그의 최후를 지켜준 자네에게 감사를 표했을 게야.]

알레시아가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티리카는 이미 죽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알레시아, 그녀는 직접 두 눈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지 않는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을 지켜봤지만, 티리카의 죽음만큼은 쉽사리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다 늙어 죽어가는 주제에 뭐가 그리 미안하다고 하던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과는 달리 원망이 조금 섞여있었다.

그대로 원망 섞인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고는, 머지않아 흩어져 사라갔다.

그리고 이도 잠시.

알레시아가 현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튼 내 이렇게 티리카를 대신해 감사를 표하는 바일세. 겸사겸사 날 구해준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무리 현성이 그녀를 구해줬다고 한들, 드래곤이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현성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알레시아에게 있어 그만큼 티리카가 가지는 의미가 컸기 때문일 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에 알레시아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티리카의 후계는 겸손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이제 가볼 생각인가.]

“예. 그래야죠.”

알레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출한다는 본래 목적은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블랙마켓을 벗어나는 일 뿐이었다.

더 이상 딱히 얻을 것도 없는 마당에 오래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괜히 칼스에게 걸렸다가는 더 귀찮아지겠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알레시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때였다.

[그럼 혹 내 그대와 함께해도 되겠는가?]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의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앞서 말했듯이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알레시아는 여기서 짧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지금 알레시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물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뻔했다.

원인은 현성이 차고 있는 기사왕 티리카의 건틀렛.

‘이걸로 특수이벤트 상황이 발생한 거 까지는 알았는데 설마 전개가 이렇게 바뀔 줄이야.’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펼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알레시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대로 생을 포기했을 터였네. 그런데 역시 미래는 모르는 일이라고 이렇게 티리카의 후계자를 만나다니…참으로 운명이란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대로 알레시아가 현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차피 그대가 다시 선물해준 삶, 기왕이면 그대에게 다시 갚아주는 게 낫지 않겠나? 무엇보다……‘그때처럼’ 그대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알레시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현성의 건틀렛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동시에 과거, 티리카와 함께하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티리카의 의지가 눈앞의 소년에게 이어진 것처럼, 왠지 그와 함께라면 그때의 추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런 알레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성의 눈앞으로 메시지창이 하나 떠올랐다.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계약하시겠습니까?]

[Y/N]

그건 다름 아닌 계약창.

주로 소환수와 계약을 맺을 때 등장하는 창이었다.

“……”

이에 현성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맞닿은 순간이었다.

-파아앗!

사방으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눈을 가렸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빛이 사그라졌을 때, 그의 눈앞에는 계약의 성공을 알리는 창이 떠있었다.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소환수 :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

그와 함께 손등을 타고 작은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그 감각에 현성이 건틀렛을 벗자, 그의 손등에는 금빛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계약을 맺었음을 뜻하는 표시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계약자여.]

금빛의 드래곤과 그 앞에 서있는 젊은 기사.

무엇보다 기사의 손에 있는 은빛의 건틀렛.

그 모습은 알레시아가 처음 티리카와 계약을 맺던 그때와 똑같았다.

* * * * *

그렇게 현성이 알레시아와 계약을 맺은 직후.

그가 눈앞을 바라보았다.

[히든 퀘스트 : 기사왕의 길을 걷는 자]

<기사왕 티리카의 전설을 마주한 자여, 그대는 티리카의 의지를 이을 자격을 충족하였다.>

퀘스트 내용

-스킬 : 투신의 길 사용하기. (완료)

-티리카의 업적을 따라 그의 흔적을 찾으시오.(진행 중)

-첫 번째 업적 : 폭주한 불의 악마 크루페돈을 격퇴하시오.(완료)

-두 번째 업적 :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조우하기.(완료)

보상 : 티리카의 비전스킬.

*본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입니다.

그새 히든 퀘스트의 두 번째 업적란은 완료표시가 되어있다.

그 증거로 현성의 손바닥 위에 보이는 반짝이는 금색의 조각.

티리카의 영혼 조각이었다.

-띠링!

그와 함께 알림음이 들려오며 새로운 창이 펼쳐졌다.

[조건을 충족함에 따라 특수 스킬 : 투신의 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투신의 눈.

그 이름으로 보아 투신의 길과 같은 티리카의 비전스킬 중 하나로 추정되었다.

물론 그 효과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투신의 길의 효과를 생각해봤을 때 꽤나 기대되는 스킬이었다.

‘……아무튼 골드 드래곤 알레시아와 티리카의 비전스킬까지.’

현성이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좋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줄곧 기절해있던 엘프, 아니 해주용 포션이 눈을 떴다.

“으으윽, 왜 빈혈 기운이…….”

그녀가 비틀비틀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피를 뽑은 기억은 없는 모양이었다.

허나 기절하기 직전의 일이 생각난 건지.

그녀가 재빨리 현성을 경계했다.

“……핫!”

아니 경계하려 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눈앞의 드래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드래곤?!”

그대로 그녀가 멍하니 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드래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위대한 몸을 뵙습니다. 저는 세계수를 지키는 자 실비아라고 합니다.”

[아, 세계수의 아이로구나.]

본인을 실비아라고 소개한 엘프의 말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드래곤은 중간계의 패왕. 그런 그녀에게 엘프가 인사를 올리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헌데 위대한 몸께서 어째서 이런 곳에……설마 이 녀석이 또?!”

그러면서 실비아가 현성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자마자 또 이러네.

“글쎄 나 아니라니까…….”

“흥,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이에 알레시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비아라고 했느냐. 내 계약자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그야 저 인간이 제 몸을 노리고 희롱을 일삼으며……아니 잠깐, 계, 계약자요?”

그 말에 실비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알레시아와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계약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실비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과…….”

지금껏 용과 맹약을 나눈 인간은 전설 속.

기사왕이라고 불리는 자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손등을 보여줬다.

“……무슨 불만이라도?”

현성의 손등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계약의 문양.

이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실비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계약자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런 실비아의 말에 현성이 작게 혀를 찼다.

무례한 건 알고 있나보군.

하여간 그동안은 그렇게 말을 안 들어먹더니만.

“허면 계약자께서는 설마 동반자를 구출해내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현성이 구태여 부정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그와 함께 실비아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감히 드래곤의 계약자를 노예상 취급하다니.

긍지 높은 엘프에게 있어서는 꽤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실비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이 무례를 어떻게 만회해야할지…….”

“……만회?”

그러자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열쇠꾸러미를 휙 던졌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받아.”

“예? 이건…….”

그건 다름 아닌 고위간부가 가지고 있던 감옥의 열쇠.

그대로 현성이 위를 가리켰다.

“니가 찾는 놈들은 다 위에 있어.”

“그 말은……”

“다 엎어버려.”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실비아가 감옥의 모든 노예들과 몬스터들을 해방시키고.

블랙마켓을 전부 엎어버리면서 깽판을 친다.

‘그럼 난 그 틈에 유유히 여길 빠져나가면 그만.’

안 그래도 어떻게 나갈까 고민하던 찰나에 잘된 일이었다.

곧 현성의 뜻을 알아차린 실비아가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물었다.

“혹시 가기 전에 은인의 존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현성에 대한 호칭이 네놈! 인간! 에서 은인으로 바뀌었다.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현성. 유현성이다.”

“유현성…….”

그 말에 실비아가 몇 번 그의 이름을 되새기며.

자신의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며 고개를 숙였다.

엘프족 특유의 인사였다.

“세계수를 지키는 자 실비아,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봐.”

현성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실비아는 다른 노예들이 갇혀있는 감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어두운 감옥.

그곳에는 현성과 알레시아 단 둘만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알레시아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알레시아님. 가실까요?”

그러자 알레시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대가 원한다면 어디든.]

그런 알레시아의 대사는 아스라한 달빛이 비추고, 별과 은하수가 내리던 날.

티리카와 황혼의 바다를 유영하던 그 날과 변함없는 대답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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