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블랙마켓(5)
그러나 정적도 잠시.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제1홀은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 제멋대로 외쳐대는 탓에 소리가 겹쳐 그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내용은 비슷비슷했다.
경비를 불러 고객들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대로 깽판을 치는데 가만히 있을 거냐 혹은 당장 저놈을 잡아 퇴출시켜라.
그러나 방금 전 당한 리처드 박 때문일까.
현성의 앞으로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전부 슬금슬금 물러나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왁왁 짖어댈 뿐.
현성이 그 꼴이 여간 재미있는 모양인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걸로 드래곤을 낙찰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노린 것은 어디까지나 시선집중.
그대로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 이거 실례했군. 입찰가 오르는 꼴을 보자니 이거 워낙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있어야지.”
“……뭐?”
“그야 그렇잖아. 기왕 좋은 물건이 나왔는데, 이런 떨거지들을 앉혀놓다니.”
그러면서 현성이 소리를 질러내는 녀석들을 쓰윽 내려다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수준 떨어지잖아.”
그런 현성의 말과 동시에 주변의 관중들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 골드등급 이상만 되도 어디 가서 무시당할 자리는 아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중 가면을 쓰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입가에는 현성과 같은 작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현성과 같은 vvip등급의 고객들.
여기서 vvip등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현성이 그런 vvip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이에 vvip들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거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마침 루즈했던 찰나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성은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셈이었다.
리처드박? 해봤자 위세만 높을 뿐, 겨우 플래티넘 등급 주제에 먼저 vvip한테 덤빈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냥……”
현성이 무대 위 서있는 사회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초대장을 흔들거렸다.
“저런 잔챙이들은 빼고 가자는 거지.”
그 말에 사회자가 재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즉, 현성의 말은 vvip들로만 경매를 진행하자는 뜻.
확실히 블랙마켓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도 그럴게 누가 되었든 물건은 가장 높은 값을 부른 고객한테 가게 돼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차피 어중이떠중이들은 떨어져나가기 마련.
사회자는 수십 년간 경매를 운영해온 만큼,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자본의 경쟁에 있어, 물건을 가져가는 쪽은 명실상부 vvip.
물론 현성의 말대로 했다가는 vvip보다 아래쪽에 있는 등급에서 불만이 나올 수도 있었으나, 사실 큰 상관은 없었다.
vvip고객들만 잡는다면 그런 불만쯤은 묻어버리고도 남았다.
이에 사회자가 턱을 매만지며 슬쩍 위쪽에 설치된 씨씨티비를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매드독의 수장, 칼스 역시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터.
그때였다.
“칼스. 보고 있지?”
현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대로 그가 씨씨티비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기껏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들은 더 기다리게 할 생각이야?”
그리고 잠시 뒤.
사회자가 자신이 인이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칼스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vvip 여러분?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위쪽으로 따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가면을 쓰고 앉아있던 vvip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주변 곳곳에서 다른 고객들이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사회자의 단 한마디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다른 손님들에게는 유감이지만 칼스님이 직접 봤으면 좋겠다고 하셔셔 말입니다.”
-움찔.
칼스. 매드독의 수장이자, 블랙마켓에 군림하는 왕의 이름.
그 이름에 다른 등급의 손님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만남은 오직 vvip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었다.
“제길……”
그와 함께 vvip들의 옆으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자들이 다가왔다.
그런 그들의 가슴팍에는 매드독임을 증명하는 뱃지가 달려있었다.
동시에 그들이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건 현성의 앞에 있는 남성 역시도 마찬가지.
그대로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특별경매가 이루어졌던 제 1홀.
현성을 포함한 vvip들은 분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른 녀석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제 1홀을 벗어났다.
* * * * *
커다란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케 하는 고급스러운 건물.
일명 블랙 홀로 불리는 건물의 최상층.
그곳에는 칼스의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끼익.
곧 수행원으로 추정되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과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
곳곳에는 화려한 장신구와 조각상이 줄지어 서있었다.
무엇보다 그 중앙.
고급스러운 원목테이블을 앞에 두고 빨간 소파에 앉아있는 사내.
“……꽤나 화려하게 저질렀군요.”
그가 바로 매드독의 수장 칼스였다.
그런 그는 얼핏 봐도 장대한 기골에 심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얼굴에 있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가 현성을 바라보며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우선 앉아서 이야기 하실……”
“아아. 고맙군.”
그대로 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 아니 현성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어서 그가 다리를 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실 건 없나?”
“……”
뻔뻔한 현성의 태도에 칼스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옆에 수행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뭐하나. vvip께서 말하지 않나.”
“아.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이에 수행원이 재빨리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무실에는 커피머신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칼스가 입을 열었다.
“……제 1홀에서의 활약은 잘 봤습니다.”
칼스가 활약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 칼스의 말투는 점잖았지만 그 사이에는 묘한 견제가 섞여있었다.
그 말에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활약이랄 것까지야. 아무튼 그런 건 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어때?”
그 모습에 칼스가 아무 말 없이 현성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에 응하기는 했으나, 역시 vvip들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밖에 모르는 저 태도가 가장 문제였다.
‘물론 저놈의 성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실 지훈 저 녀석이 블랙마켓에서 행패를 부린 건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 전에도 그는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느니, 물건 파는 상인 주제에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기분 나쁘다느니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곤 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 전에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킨 편이었다.
‘근데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하단 말이지.’
이렇게 특별경매장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놓고 고객을 팬 것은 이번이 처음.
그 이유에는 눈앞의 지훈이 실은 현성이라는 진실이 숨겨져 있었지만, 이를 모르는 칼스는 그저 오늘따라 이 새끼가 왜 이럴까.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여간 애새끼 비위맞춰주는 게 제일 힘들다더만.’
솔직히 말하자면 거슬렸다.
그것도 굉장히.
만약 예전 성격 같았으면 저 자식은 이렇게 몸 성한 채로 자신을 독대할 수도 없었다.
-꾸구국.
탁상 아래 있는 칼스의 주먹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허나 그는 블랙마켓이 vvip들의 권력과 자본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지훈이 속한 PH그룹은 해마다 블랙마켓에 어마어마한 돈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래봤자 제 아비의 힘에 불과하지만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될 노릇이지.’
어디 블랙마켓이 하루 이틀하고 장사를 접을 상황인가.
그게 아니고서는 일단은 그 비위를 맞춰주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그룹의 차기 상속자로는 지훈 그가 가장 유력하지 않은가.
‘……저 새끼도 그걸 잘 아니까 이렇게 나대는 게지.’
영약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아무튼 이게 다 미래에 대한 투자다.
칼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드래곤을 구매하고 싶으신 거죠?”
“어.”
단호한 현성의 대답.
이에 칼스의 입 꼬리를 타고 작은 경련이 일었다.
참자, 참아. 이게 다 비스니스 아닌가.
“구태여 알고 있는 걸 왜 또 물어봐?”
“그…렇죠……”
칼스가 힘겹게 입을 떼며 대답했다.
밑바닥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만약 여기서 참지 못했다가는 다시 예전의 길거리 건달생활로 돌아간다.
‘절대 그럴 순 없지.’
칼스가 주먹을 쥐며 각오를 다졌다.
그대로 그가 다시 현성을 향해 말했다.
“……그럼 혹시 얼마까지 생각하고 계시나요?”
“글쎄. 딱히 생각해둔 건 없는데.”
현성이 귀를 후미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탁자 밑을 타고 우지직, 나무가 박살나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칼스의 손아귀.
-흠칫.
이에 커피를 내리고 있던 수행원이 움찔거렸다.
오늘따라 커피머신이 왜 이리 느린 것일까.
수행원이 애꿎은 커피머신을 원망했다.
동시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방금 그 소리?”
그러자 칼스가 손을 털어내며 허허 웃었다.
“아무래도 탁자가 낡아서 그런지 최근 이런 소리가 자주 나는군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래서 싸구려는 안 좋다니까.”
현성이 작게 혀를 차며 탁자를 발로 툭툭 찼다.
혹시나 말하지만 지금 그의 집무실에 있는 탁자만 해도 5000이 넘어간다.
절대 싸구려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돈 좀 쓰지 그랬어? 그깟 푼돈 아껴서 어따 쓰겠다고 말이야. 에잉. 쯧쯔.”
“…….”
칼스가 고개를 숙이며 다시 심호흡을 했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절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칼스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뭐야? 혹시 겨우 이런 거 가지고 화난 거 아니지?”
정말이지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
덕분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에 칼스가 그냥 다 집어치우고 한 대만 후려칠까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까짓 거 대충 모기가 붙었다고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커피가 완성되고, 수행원이 재빨리 탁자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커, 커피 나왔습니다!”
그 소리에 번뜩 칼스가 이성을 되찾았다.
동시에 현성이 커피를 받았다.
“아. 고맙군.”
이어서 그가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번 드래곤. 얼마까지 생각하고 있냐고 했지?”
그대로 현성이 싱긋 웃었다.
“그거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으니 그쪽이 원하는 대로 쳐주지.”
“……예?”
“이번 상품은 우리 아버지도 원하고 계셔서 말이야. 그냥 부르는 대로 달라고 하더라?”
그런 현성의 말에 칼스가 움찔거렸다.
세상에나.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곧바로 그의 입가를 타고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찐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칼스는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 전의 분노? 한 대만 후려쳐?
그런 생각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