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블랙마켓(2)
물론 <이스페리아> 설정 상.
레이첼이 블랙마켓에 있는 것을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뱀파이어.
그렇기 때문에 레이첼은 정기적으로 블랙마켓에 들려 평소에는 구하기 힘든 생물체들의 피를 구매하고는 했다.
허나 여기서 그녀를 만나리라고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레이첼은 당장에라도 매드독과 맞붙을 위기.
아니 이미 맞붙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뭐가 되었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더 골치 아파질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매드독은 블랙마켓 전반을 휘어잡고 있는 조직.
자칫 잘못 엮었다가는 레이첼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어라? 이년 봐라? 이거 지금 보니 꽤 이쁘장하게 생겼는데?”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곧바로 그가 혀를 낼름거리고는 레이첼의 얼굴을 향해 검을 쿡쿡 찌르는 모양새를 취했다.
“어떠냐. 그냥 나랑 한 번 놀고 조용히 넘어갈래?”
그 말에 뒤에 있던 매드독 녀석들이 킥킥 거리기 시작했다.
아예 대놓고 레이첼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결국 현성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의 행동은 벌써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증명하듯 현성은 어느새 매드독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처억.
“……거기까지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매드독은 물론이며, 레이첼의 시선이 일제히 현성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둘 다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저리 꺼져.”
“얼씨구, 넌 뭐야? 저리 안 꺼져?”
알다시피 그는 현재 유현성이 아닌 김지훈으로 블랙마켓에 와있는 입장.
그만큼 레이첼은 차갑기 그지없는 반응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 말에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드독이야 그렇다고 해도, 레이첼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역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차피 지금 지훈의 모습으로 온 이상.
당장 레이첼에게 정체를 밝히기 보다는 우선은 지훈처럼 행동하여 이 소란을 잠재우는 게 나았다.
-스윽.
무엇보다 흉내를 낼 거면 역시 제대로 하는 게 좋았다.
그대로 현성이 매드독의 수하가 내민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혀를 찼다.
“……쯧. 요즘 말단새끼들은 vvip도 못 알아보나?”
마치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말투.
거기다 벌레새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은 덤이었다.
“……뭐?”
그런 현성의 말에 검을 들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매드독인걸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경우는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 뭣도 모르고 블랙마켓에서 나대는 멍청이.
그리고 두 번째는 매드독도 대놓고 건드리지는 못하는 귀빈.
이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녀석이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현성의 손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도, 죽을 정도로 강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
허나 현성, 아니 지훈은 그런 그가 상황을 파악하도록 기다려줄 만큼 관용이 넘쳐나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가차 없이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어디서.”
-철썩!
그리고 현성이 쉬지 않고 또 한 번 팔을 휘둘렀다.
“주제도 모르는 말단새끼가.”
“자, 잠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대로 계속해서 뺨을 후려갈기던 현성이 그의 정강이를 강하게 가격했다.
-뻐억!
“날 쳐다봐?”
그와 함께 녀석이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이에 현성이 발끝으로 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안 일어서?”
그런 현성의 말에 녀석이 움찔거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
곧 그가 힐끗 현성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근데 누…누구신데……”
“…나?”
그러자 현성이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덥썩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품속에서 스마트폰 하나를 꺼냈다.
그대로 현성이 vvip 초대장이 띄워져있는 화면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니들 돈 대주는 사람.”
김지훈.
그는 흔히 말하는 재벌이자, 이성준에 버금가는 쓰레기 같은 인성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현성이 팔을 들어 있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크허억!”
그 충격에 그의 고개가 꺾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타고 입이 터진 듯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현성은 그의 비명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손에 뭍은 피를 털어냈다.
“쯧. 더럽게 스리……”
그러면서 현성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에 있던 매드독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면서 현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왜? 니들도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런 현성의 말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매드독들이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vvip급 고객. 주로 블랙마켓의 단골이자 불법적인 거래를 할 수 있게 자금을 지원해주고 뒤를 봐주는 큰 손들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여간 존나 빠져가지고.”
현성이 그들을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이제 꺼져봐.”
“그, 그럼 저 녀석은……”
매드독들이 현성의 뒤에 있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잡으러 온 것.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게 매드독이 블랙마켓에서 이렇게 날뛸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이곳이 그들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블랙마켓의 상인들에게 일정 수수료를 받는 것을 대가로 충돌을 막아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그냥 돌아가게 되면 행패를 부린 손님을 저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개쪽만 당하고 물러나는 꼴 아닌가.
한마디로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쯧.”
이에 현성이 혀를 차며 저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상인을 불렀다.
“어이.”
그러자 상인이 화들짝 놀라 호다닥 현성에게 다가왔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이 들고 있는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얼마야.”
현성의 물음에 상인이 레이첼이 들고 있는 병.
그러니까 유니콘의 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정도 양이면 대략 700에서 900선에서……”
꼭 블랙마켓의 상인놈들은 한 번에 제대로 된 가격을 말하지 않았다.
현성이 작게 신경질을 내며 되물었다.
“아. 그러니까 정확히 얼마냐고.”
그런 현성의 신경질에 상인이 흠칫거리며 재빠르게 말했다.
“7, 730입니다!”
그러자 현성이 매드독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야. 저거 내 앞으로 달아놔.”
“……예?”
“내가 산다고.”
그 말에 매드독 중 하나가 상인과 레이첼을 번갈아보았다.
확실히 가격분쟁이 나서 이렇게 됐으니, 제 값을 주고 물건을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굳이 지훈이 나서서 이럴 이유가 없었다.
“자, 지훈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저 년은 저희 매드독이……”
녀석이 현성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괜히 입을 열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그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예! 알겠습니다.”
현성은 그런 녀석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등을 돌린 뒤.
레이첼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오히려 주변을 타고 무뚝뚝하다 못해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곧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설마 감사를 바라는 건 아닐 테고. 볼일 끝났으면 그냥 꺼지지 그래?”
레이첼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매드독이 으르렁거렸다.
“저게 끝까지 주제를 모르고……!”
하지만 현성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처억.
“됐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러면서 현성이 레이첼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속삭였다.
“적당히 하고 일단 따라와. 레이첼.”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지금껏 여기서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곧바로 뭐라 따지려 했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를 따라갔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를 따라 들어온 곳은 다름 아닌 인적이 드문 블랙마켓의 뒷골목.
그리고 순순히 따라오던 레이첼이 돌연 발을 멈추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잖아.”
그 말에 앞서가던 그가 멈춰 섰다.
그러자 그를 향해 레이첼이 물었다.
“그래서. 너 정체가 뭐야.”
이름이 지훈이라고 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헌데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레이첼이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만약 똑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레이첼이 그의 턱 바로 밑에 손을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의 손끝에는 날카로운 예기를 지닌 손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레이첼이 손톱으로 그의 살결을 쿡 찌르며 말했다.
“여기서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레이첼의 몸을 타고 느껴지는 살의가 그 증거.
이에 그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만이네.”
“허튼 수작부리지마.”
허나 그는 레이첼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짠데.”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 표면이 일렁거렸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꿈틀거리는 얼굴.
아니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을 시작으로 목을 타고 내려와, 손, 몸통, 다리까지.
그의 온몸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그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이첼의 앞에는 지훈이라고 불린 사내가 아닌.
“안녕, 레이첼.”
현성이 서있었다.
이에 레이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과 차분하게 내려앉은 눈동자.
무엇보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
그는 분명 현성이었다.
“……으에?”
방금 전까지 뿜어대던 살의는 물론이며, 차갑게 날이 선 말투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대로 레이첼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어서 그녀가 현성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외쳤다.
“니, 니가 왜 여기서 나와!”
게다가 방금 전 모습은 무엇인가.
갑자기 얼굴이 변하지 않나.
아니 잠깐. 그전에는 뭐? 지훈?
“너 뭔데! 막 방금 뭔가 스르륵하니까 변하면서…!”
레이첼이 방금 전 변한 현성의 모습을 열심히 묘사하면서 쫑알거렸다.
이에 현성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정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튼 짓하면 죽여 버리겠다던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아.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인가.
아무튼 현성이 잔뜩 당황한 채 중얼거리는 레이첼을 뒤로 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
“……무, 무슨?!”
그런 현성의 행동에 쉴 새 없이 쫑알거리던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그리고 급속도로 빨개지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
그대로 레이첼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난 그냥 갑자기 블랙마켓에서 니가 나오니까, 아니 모습이 막 변하기도 했으니 그냥 그게 신기해서 물어본 건데? 보, 보, 보…보고 싶다니 나는 도저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걸? 하하하!”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지만, 이미 붉게 물든 뺨은 물론이며 횡설수설거리기까지.
이미 레이첼은 온 몸으로 당황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응?”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크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알고 있어. 음음, 나도 당연히 농담이었지. 설마 그게 농담인 걸 몰랐을까.”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걸로 상황도 모면했겠다.
현성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선 이렇게 된 거 같이 다닐래? 자세한건 가면서 설명해줄게.”
그 말에 레이첼이 빤히 현성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그러지. 뭐.”
그렇게 레이첼이 현성을 손을 잡은 채.
블랙마켓의 뒷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레이첼의 입을 타고 작은 중얼거림이 삐져나왔다.
“손…따뜻하네…”
자연스럽게 현성의 손을 잡게 되었다.
거기다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까지.
“……후훗.”
레이첼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에 앞서가던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어? 뭐라고 했어?”
그러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 아, 아니! 아무 말도 안했어!”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