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블랙마켓(1)
여왕의 궁전을 무사히 클리어 한 이후.
아카데미에 돌아온 현성은 자신의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가만히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흐음……”
꽤나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책상에 앉아, 펜을 만지작거리며 노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노트에는 <이스페리아>의 스토리 전개와 더불어, 온갖 정보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노트는 현성이 게임 속에 빙의한 이후로 꾸준히 적어온 것으로.
일종의 <이스페리아> 공략집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블랙마켓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이제 다음 무대는 블랙마켓인가.’
블랙마켓.
주로 일반적인 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는 불법적인 물건을 암암리에 사고파는 곳으로, <이스페리아>에서는 인간은 물론 이종족까지 사고파는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다.
또한 스토리 상, 지금쯤 마족은 블랙마켓에서 파는 ‘물건’을 노리기 마련.
이에 따라 현성의 계획은 여왕의 궁전 때와 비슷했다.
마족보다 먼저 블랙마켓에 진입하여 마족이 노리는 물건을 빼돌린다.
‘만약 이 계획도 성공한다면 마족의 전력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럼 자연스레 스토리를 진행하는데 있어 난이도는 줄어들 것이며, 이는 곧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이 수월해짐을 의미했다.
그대로 현성이 다시 펜을 잡고, 이후의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펜을 쓰겠냐고 할 수 있지만, 현성은 항상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서는 유독 손으로 직접 정리하는 편을 고집하고는 했다.
개인적으로 그 편이 훨씬 더 기억에 잘 남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고요한 아카데미의 밤.
현성의 기숙사에는 한참동안 서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 *
그리고 찾아온 다음 날.
오후 6시 정도 되었을까.
학생들은 고된 수업을 끝내고, 저마다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택한 학생도 있었으며.
기숙사에 돌아가 휴식을 청하는 학생도 있었다.
아마 평소라면 현성 역시도 기숙사로 돌아가거나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을 터.
그러나 오늘만큼은 남달랐다.
현성은 줄곧 한 학생을 주시하며 그 뒤를 밟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지훈.
현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3학년생으로.
그의 집안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꿀리지 않는 재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흔히 말하는 재벌.
그리고 현성이 지훈의 뒤를 밟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의 가문이 블랙마켓 깊은 곳에 관여하고 있으며, 그중 지훈은 블랙마켓의 vvip급 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우선 블랙마켓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필요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인적이 드문 복도를 걸어가던 지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지훈이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그 메시지는 다름 아닌 이번 년에 열리는 블랙마켓의 장소가 적힌 초대장이었다.
“하여간 번거롭게스리…….”
지훈이 메시지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블랙마켓은 불법적으로 열리는 거래장소인 만큼, 항상 그 장소가 바뀌곤 하였다.
그 덕분에 블랙마켓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때마다 새로운 초대장을 확인해야만 했다.
“까짓 거 그냥 고정해둘 것이지. 뭐가 그리 쫄린다고 이러는지. 쯧.”
이에 지훈이 혀를 차며 불평불만을 읊조렸다.
하지면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초대장에 고정되어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블랙마켓은 꼭 참가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번 블랙마켓에서는 특별경매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특별경매.
값을 매기기 힘든 최상급의 상품이 들어올 경우에만 열리는 흔치 않은 경매로, 그동안 특별경매에 올라온 상품만 해도 전부 보통물건들이 아니었다.
‘……제일 최근에 열렸던 게 무려 2년 전.’
그리고 2년 전에 올라온 상품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았다.
살면서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은랑족의 노예, 깊은 바다에 서식하며 사람들을 홀린다는 세이렌, 골드드래곤의 눈동자.
전부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값이 될 정도로 희귀한 상품들이었다.
헌데 2년 만에 특별경매가 열린다니.
그야말로 블랙마켓을 이용하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군침이 돌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듣자하니 이번 특별경매는 2년 전보다 훨씬 귀한 상품이 올라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은랑족, 세이렌, 골드드래곤의 눈동자보다 귀한 상품이라.
무슨 살아있는 드래곤이라도 잡아온 걸까.
-꿀꺽.
지훈이 침을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경매에 참가하고픈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경매에서 하나라도 낙찰된다면?
“흐흐……”
상상만 해도 끝내주었다.
그렇게 지훈이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며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돌연 그의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누, 누구?!”
-뻐억!
복도를 타고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지훈의 머리통.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끄어어억……”
-털썩.
그대로 지훈은 처연한 신음소리를 남기고 쓰러졌다.
이 모든 게 불과 5초가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솜씨였다.
-처억.
그리고 쓰러진 그의 앞에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곧바로 현성이 자신의 스태프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 확실하구만.”
그와 함께 들려오는 경쾌한 알림음.
-띠링!
[업적달성 : 요단강 익스프레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상을 기절시킬 경우.
획득할 수 있는 업적이었다.
이어서 현성이 태연하게 지훈의 품을 뒤적거리고는 그의 스마트폰을 챙겼다.
이걸로 블랙마켓에 들어가기 위한 초대장은 준비되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vvip 초대장만 가지고 들어가면 의심받을 게 분명했다.
여기서 필요한 건 김지훈 그 자체.
-펄럭.
이에 현성이 인벤토리에서 망토하나를 꺼냈다.
바로 얼마 전 여왕의 궁전을 클리어하고 획득한 도플갱어 퀸의 망토였다.
그대로 현성이 망토를 두르자, 그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플갱어 퀸의 망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등록된 대상 : 김지훈]
[Y/N]
그리고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Y를 누른 때였다.
마치 망토가 그의 몸에 스며들 듯, 온몸을 감싸더니.
현성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잠시 뒤.
아무도 없는 복도 끝.
그곳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지훈과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김지훈이 서있었다.
-질질.
곧 지훈이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는, 아무도 쓰지 않는 창고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 * * * *
이번에 열린 블랙마켓의 입구는 폐쇄된 지하철.
평소라면 그 어떤 왕래도 없을 게 분명한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지하철 선로 안, 그곳에 2개의 그림자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매번 왜 이렇게 귀찮은 거야. 그냥 보내주면 안 돼?”
지훈,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지훈의 모습을 한 현성이 스마트폰을 내밀며 미간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절차란 게 있기 마련이라……양해 부탁드립니다. 지훈님.”
그의 앞에 서있던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한 눈에 봐도 2M에 다다르는 거구의 남성이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어서 짧은 말과 함께 그가 스마트폰에 찍힌 초대장과 현성의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푸른색으로 물드는 눈동자.
단순히 육안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마법적인 방법을 이용하는 게 분명했다.
허나 도플갱어 퀸의 망토는 단순히 대상의 모습과 비슷하게 변장하는 수준을 넘어서, 대상으로 변할 수 있는 아이템.
그에 따라 완벽하게 지훈으로 변한 현성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은 본인이 직접 등판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확인되셨습니다. 그럼 안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쯧.”
이에 현성이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작게 혀를 차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그의 앞에 보인 것은 하나의 포탈.
그대로 현성이 포탈 위에 올라서고, 밝은 빛이 그를 집어 삼키기 직전.
그가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지훈님.”
-스팟.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현성의 눈앞에 자리한 풍경은 폐쇄된 지하철이 아닌, 거대한 상점가였다.
이곳이 바로 블랙마켓. 동시에 블랙마켓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찾아간다한들.
그곳은 어디까지나 블랙마켓을 가기 위해 거쳐 가는 중간지점일 뿐.
진짜 블랙마켓은 확인을 거쳐 포탈을 사용해야한다.
아무튼 이렇게 블랙마켓에 도착했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목표를 찾아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수경매가 열리는 건물로 들어가는 게 우선.
‘……아마 중앙 쪽에 위치했었지?’
현성이 <이스페리아>를 플레이 할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찾아갔다.
그렇게 그가 점점 블랙마켓 중앙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상점가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그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솟아오르며, 진열되어있던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지금 이딴 걸 상급품이라고 내온거야?”
그 소리에 주변에 있던 상인들은 물론이며, 사람들이 시선이 전부 그쪽에 쏠렸다.
대화내용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거래품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블랙마켓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된 물품을 거래하다보니,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 아닙니다. 이건 분명 상급품……”
상인이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상대는 단호했다.
양산을 쓰고 있던 그녀는 병에 담겨있던 붉은 액체를 주르륵 바닥에 버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 액체는 다름 아닌 피였다.
“헛소리 하지 말고 말로 할 때 제대로 된 물건을 가져오는 게 좋을 거야.”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양산을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미루어 보았을 때.
꽤나 젊은 여성 같았다. 아니 말하자면 현성과 비슷한 또래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내 물건이……”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깨진 물건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그 이유에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 때문일 터.
“마음 같아서는 다 박살내버리고 싶지만…….”
그녀가 진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병 하나를 집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붉은색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오늘은 특별히 이 정도로 참도록 하지.”
그녀의 말에 상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저 물건으로 말하자면, 이번에 파는 물건 중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유니콘의 피.
이에 상인이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것만은 안 된다!”
방금 전에 기세에 눌려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래보여도 그 역시 블랙마켓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
게다가 직접적인 수완이 걸려있다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현성이 재미있다는 듯.
그 둘을 바라보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구경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의 일.
이보다 좋은 구경거리가 없었다.
“……호오?”
이에 양산 아래로 그녀의 입가가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대로 그녀가 상인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군중 사이에서 완장을 찬 무리들이 튀어나와 냅다 그녀를 포위했다.
-처억.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곧바로 허리춤에서 검을 빼든 채.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거기까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려?”
붉은 바탕에 그려진 개 문양.
블랙마켓을 관리하는 조직, 매드독의 문양이었다.
아무래도 신고를 받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쯧.”
이에 그녀가 작게 혀를 차며,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 당장 치워.”
“……이거 말하는 말뽄새 좀 봐라?”
매드독은 결국은 블랙마켓을 관리하는 조직인 만큼 마피아 혹은 갱단에 가까운 녀석들이었다.
애초에 이름부터가 미친 개기도 하고, 검을 꺼냈다는 뜻은 순순히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무력을 써서라도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 말에 그녀가 심기가 불편한 듯 살짝 미간을 구겼다.
“난 분명 치우라고 했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어째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그녀가 경고를 무시하고 손가락을 까닥이기 무섭게, 매드독의 수하가 검을 올려 베었다.
-피잇!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고개를 뒤로 넘기며, 검격을 피해냈다.
베인 것은 쓰고 있던 양산 뿐.
동시에 들고 있던 양산이 잘리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라락.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
그리고 루비와 같이 진한 붉은 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 얼굴은 현성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레이첼?”
그대로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