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여왕의 궁전(1)
한편 왼쪽 갈림길.
그곳에는 이제 막 안쪽으로 들어온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흐음…….”
왼쪽 역시 이클레아가 있는 오른쪽과 마찬가지였다.
앞은 깜깜한 어둠이 전부.
허나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발걸음.
얼핏 보면 마치 산책을 나왔다고 착각할만한 모양새였다.
물론 그가 갈림길로 들어가기 전.
이클레아가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있을 현성이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그녀가 경고할 때부터, 그는 당장 움직일 생각으로 충만했다.
동시에 그가 앞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철퍽.
저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도플갱어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이클레아 때와 똑같은 상황.
“이제야 나왔네.”
그와 함께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도플갱어는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연신 철퍽거리던 소리가 사람의 발소리로 변하더니.
[끄르르륵…!!]
조잡하게 인간의 형상을 한 도플갱어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부우욱!
돌연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근원지는 당연히 현성.
그리고 그런 그의 손에는 스크롤이 들려있었다.
동시에 그곳에는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그렇다. 바로 마법이 인챈트 된 스크롤이었다.
그대로 현성의 앞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그 안에 인챈트 되어있던 마법이 발동되었다.
-파아앗!
그리고 밝은 빛 무리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투명한 막이었다.
마치 거울을 연상케 하는 투명한 막, 마법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러(Mirror).
하급 마법 중에서도 가장 기초에 속하는 마법으로.
그 효과는 말 그대로 거울과 같은 투명한 막을 펼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순간.
[……끄르륵?]
현성을 향해 달려들던 도플갱어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미러마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그 형태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됐다.”
도플갱어.
대상을 발견하면 즉시 그 모습을 베끼는 특징을 가지며, 그 모습뿐만 아니라 대상의 능력까지 완벽하게 카피하는 몬스터.
이런 특징덕분에 도플갱어는 <이스페리아>에서도 꽤나 공략난이도가 높은 몬스터에 속했다.
그도 그럴게 게임의 특성상, 플레이어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도플갱어는 그런 강해진 플레이어의 능력치를 그대로 카피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여왕의 궁전이 등장하는 시기를 생각하면 플레이어는 아무리 못해도 중반급 아이템과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이미 카피가 끝난 도플갱어를 상대하는 것 상당히 어려운 난관이었다.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플갱어도 강해진다.
이로 인해 과거 현성은 첫 번째 여왕의 궁전 트라이에서 쓴 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기껏 모든 스펙을 올려서 만반의 준비를 다했건만…….’
그 결과는 갈림길에서 참패.
현성을 포함한 모든 파티가 단 5분 만에 전멸했다.
패배도 그만큼 처절한 패배가 없었다.
그에 따라 현성은 다시 처음부터 공략을 짜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방법이 바로 미러마법이었다.
그리고 미러마법을 쓴 결과가 지금 보는 대로.
-꾸드득…철퍽!
도플갱어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말했듯이 도플갱어의 가장 특징은 눈앞의 대상을 카피한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 그러니까 같은 도플갱어라면?
이 경우. 도플갱어는 그 기믹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러니까 도플갱어가 도플갱어를 카피한다는 소리지.’
그리고 도플갱어의 원래 능력치는 공격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처참한 수준.
이에 현성이 주먹을 쥐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의 팔을 따라 피어오르는 붉은 불꽃.
-콰아앙!
그대로 현성이 주먹을 내지르자, 미러마법이 산산 조각나며 그 뒤에 있는 도플갱어의 머리통까지 꿰뚫었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끝을 따라 느껴지는 끈적한 감각.
마치 곤약 혹은 액체괴물을 움켜쥔 거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거칠게 머리통에 꽂혀있던 손을 뽑아냈다.
-주르륵.
그러자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며 도플갱어의 몸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게 바로 ‘도플갱어가 모습을 카피하기 전에 해치운다.’ 라는 기존의 공략을 완전히 무시한,
현성만의 기상천외한 공략법이었다.
실제로 과거 그는 이 공략법으로 갈림길을 돌파했으며.
당시 현성을 필두로 한 그의 파티의 클리어 타임은 고작 5분.
이는 <이스페리아> 전체를 통틀어 최단 시간 클리어를 자랑하는 기록이었다.
‘……내가 이 날을 위해 아카데미에 있는 미러 스크롤은 다 쓸어왔지.’
현성이 인벤토리 안 가득 담겨있는 스크롤 한 무더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스크롤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스크롤만 있다면 갈림길 돌파 역시 식은 죽 먹기.
“자, 그럼 계속해서 가볼까.”
그대로 현성이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 * * * *
이클레아가 갈림길로 들어간 지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다.
동시에 그녀의 뒤로는 수많은 도플갱어의 시체가 즐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숨통이 붙어있는 녀석들이 존재했다.
[우워어……]
이미 한번 던전을 클리어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그녀는 차근차근 도플갱어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역시 그 숫자였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그 몸, 내놔……!]
거기다 도플갱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정교한 인간의 모습을 카피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지금은 어눌하지만, 말까지 구사하고 있었다.
“쯧.”
이에 이클레아가 발에 묻은 검은 액체를 털어내고는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이어서 손가락 끝을 타고 타오르는 불꽃.
그대로 그녀가 물고 있던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후우.”
곧 이클레아가 숨을 내뱉자, 빨간 입술을 타고 하얀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태우던 담배를 뒤로 휙 던졌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담배.
그러자 바닥에 흥건한 액체를 타고 불씨가 옮겨 붙더니, 단숨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 액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늪지 두꺼비의 진액.
많은 연금술 재료 중에서도 특히 인화성이 강한 물질이었다.
-화르륵!
그에 따라 눈 깜짝 할 사이.
도플갱어의 시체가 쌓여있는 곳까지 타오르는 불꽃.
드문드문 남아있던 도플갱어는 그 불꽃에 휩싸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허나 그것도 잠시.
하나 둘 씩 남아있던 도플갱어들이 쓰러지고.
그 끝에 남은 건 오직 한 줌의 검은 재뿐이었다.
“어딜 내 몸을 넘봐.”
그대로 이클레아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마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제 곧 갈림길의 막바지.
이제 남은 건 중간에 막힌 문을 열고 현성을 구할 일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했으니 지금까지는 안전할거야.’
이클레아가 뒤를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현성은 지금쯤 신나게 스크롤을 찢으며 파티를 벌이고 있었지만, 이클레아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잠시 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던 이클레아가 미간을 좁히며 걸음을 멈췄다.
이제 이 앞이 갈림길의 끝.
-처억.
그러나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가 있었다.
그 몬스터는 당연히 도플갱어.
하지만 눈앞의 도플갱어는 지금까지 봐왔던 녀석들과는 뭔가 달랐다.
줄곧 마주쳤던 검은 도플갱어와는 다르게 좀 더 밝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 그 크기 역시도 훨씬 커다랬다.
무엇보다 가장 다른 부분은.
[……인간?]
처음부터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의 도플갱어는 벌써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까지 마주친 도플갱어와는 다르게 보란 듯이 두 발로 걸어오는 녀석.
그대로 그는 빤히 이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
-움찔.
동시에 이클레아가 알 수 없는 소름을 느끼며 주춤거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마음 속 깊은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거 같은 눈빛.
과거 그때와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그 순간이었다.
줄곧 가만히 서있던 도플갱어가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입 부분이 기괴하게 찢어졌다.
-쩌억!
그와 함께 이클레아가 재빨리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으며 삼각 플라스크를 집어던졌다.
처음 도플갱어를 향해 날렸던 것과 같은 산성 플라스크였다.
이에 날아간 플라스크가 적중하며 사방으로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걸로는 역부족.’
그대로 이클레아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저 녀석의 정체는 엘리트 도플갱어.
도플갱어 중에서도 모든 능력치가 뛰어난 특수개체였다.
물론 도플갱어가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녀석은 말이 달랐다.
보통 도플갱어가 단순히 눈앞의 대상을 카피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엘리트 개체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카피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그러니까 대상의 기억을 읽어, 그 기억 속의 존재로 변한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스르륵!
이클레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누구로도 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기억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능력치를 100% 완벽하게 카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할만했다.
‘가령 과거의 동료들로 변한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까다롭다.’
이에 이클레아는 이번에도 선제공격을 날려 녀석이 변하기 전에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대로 그녀가 주먹이 내지른 그때였다.
염산 플라스크의 여파로 솟아오른 하얀 연기 사이.
-터업.
느닷없이 튀어나온 손이 이클레아의 주먹을 잡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
그러나 손끝에 느껴지는 악력만큼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꾸구국!
그 힘에 이클레아가 와락 미간을 좁혔다.
엘리트 도플갱어의 변신속도가 그녀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착각한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확실히 변신속도가 빨라졌어…!’
그에 따라 녀석은 이미 변신을 끝마친 상태.
그렇다면 도플갱어가 과연 그녀의 기억 속.
어떤 존재를 카피했는지 알아내야했다.
‘전사계열? 그게 아니면 무투?’
주먹을 잡을 정도면 그게 제일 유력했다.
동시에 그녀가 과거 전사, 무투 계열에 속한 동료들을 재빨리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대로 잠시 뒤.
-스으으.
하얀 안개가 걷히며 엘리트 도플갱어가 모습을 드러났다.
역시 녀석은 역시나 이미 변신을 끝낸 상태.
그리고 이클레아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다름 아닌.
[전장의 아이돌, 매지컬 레드 등장!]
마법소녀 매지컬 레드였다.
이에 순간 이클레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런 쒸..뻘……!”
곧바로 이클레아의 입을 타고 거친 욕설이 삐져나왔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인물 중.
가장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