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20화 (120/240)

120화 교수님의 은밀한 비밀(1)

예전에도 누누이 말했듯이 <이스페리아>의 주요 스토리는 인간과 마족의 대립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 중 유진 역시 스토리를 진행함에 따라, 마족과 마찰을 빚기 마련이고, 그 중에는 편지에서 언급된 이키펠이라는 마족도 있었다.

‘……그리고 걔도 뒤에 열쇠를 숨겨두더라고.’

무엇보다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주인공이 이 사실을 이용해 열쇠를 빼앗는 에피소드가 짧게 언급된다.

그래서 현성 역시 처음 하선이 자신을 보자마자 안겼을 당시.

이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혹시 몰라 그녀의 뒤에 잠깐 손을 대보았으며.

그 결과, 하선의 등 뒤에 있던 열쇠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지막으로 하선이 그를 껴안았을 때.

현성은 자연스럽게 등 뒤에 있는 열쇠를 가로챘다.

등장인물 유현성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스페리아>의 고인물 이진성이라면 가능한 일.

괜히 그가 <이스페리아>에 미친놈으로 불렸던 게 아니었다.

게임 내 존재하는 온갖 엔딩부터 히든 퀘스트 공략까지.

그걸 전부 찾아내기 위해서는 항상, 언제나, 만약에 만약을 대비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했다.

이번에 열쇠를 획득한 결과 역시도 이런 그의 버릇에서 기인한 것.

‘이래서 뭐든지 한 번 쯤은 꼭 확인해봐야 된단 말이야.’

현성이 누나에게서 빌린(?) 검은 열쇠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수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이걸로 아가씨께서 노릴 던전을 특정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혹시 도련님께서는 아까씨보다 한 발 먼저 던전을 선점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수연의 물음에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방법이 제일 낫지.”

이에 수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성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럼 던전은 무조건 저와 같이 가는 걸로 해요.”

“……뭐?”

“그야 도련님 혼자 어떻게 던전에 보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랑 같이 가는 쪽이 훨씬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수연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말투에서는 현성을 향한 걱정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

“좋습니다. 그럼 던전은 저랑 도련님이랑 같이 가는 걸로…….”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수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근데 그건 괜찮을 거 같아.”

“……네?”

그런 현성의 말에 수연이 휙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대로 누가 말리기도 전에 다급하게 현성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왜요? 아니 설마 혼자 갈 생각이신건가요? 미리 말하지만 그건 절대 안돼요. 만약 그럴 생각이시라면 다시 저를 상대로 이기고 가세요! 안 돼! 절대 안 돼!”

수연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격렬하게 그를 저지했다.

이에 현성이 난처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다른 걸 몰라도 수연을 상대로 다시 이기라니.

그건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스터 암살자다.

그런 살벌한 경험은 이번 한 번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서 현성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갱신된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라있었다.

[이름 : 이수연]

성별 : 여성

나이 : 29

종족 : 인간

클래스 : 어쌔신위자드

업적 : [마스터 메이드], [중급 마법사], [메이드의 품격], [유 가문의 메이드 장], [마법사의 수장을 죽인 자], [마법사 암살자]. [수라의 길을 걸어온], [마스터 암살자]

곧 수연의 상태창을 보고 현성이 혀를 내둘렀다.

저 업적들을 보라.

정말이지 수연이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만약에 수연이 끝까지 마족 편에 붙었으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튼 그 역시도 수연과 다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연. 일단 진정하고 끝까지 들어봐. 무턱대고 나 혼자 간다는 말이 아니야.”

이에 우선 현성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수연은 아직 믿음이 가지 않는 듯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

진정하라는 현성의 말에 수연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여전히 현성의 손을 움켜잡은 채, 웅얼거리는 수연.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던전에 같이 갈 파티로는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

“……그래봤자 저보다 약할 거 아니에요.”

수연이 자신의 볼을 부풀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더욱 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현성을 끌어당겼다.

“도련님은 제가 지킬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수연에 현성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예전보다 알게 모르게 과보호받는 느낌이었다.

그에 따라 표현 방식 역시 좀 더 직관적으로 변한 것은 덤.

하여간 확실히 마스터 암살자 급이면 어디 가서 꿀릴 스펙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한 전력 중 하나.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이 던전 공략에 있어서는 이 사람보다 제격인 사람은 없을 걸?”

곧바로 현성이 검은 열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게 이 사람은 과거에 이미 던전을 공략한 적 있거든.”

그 말에 수연이 작게 움찔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던전을 공략한 적 있다니.

알다시피 던전 공략 경험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내가 말했잖아. 이 사람보다 제격인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수연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쉽사리 현성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이에 결국 수연이 한 수 접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그 말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이 자와 접촉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니까.’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수업이 한창인 아카데미의 강의실.

그곳에는 여러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B용액보다는 A용액을 섞어……”

그리고 그 중에는 현성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업을 듣는 대신,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검은 열쇠라고 적힌 부분에 연신 동그라미를 그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검은 열쇠가 가리키는, 그러니까 누나가 노리는 던전은 바로 여왕의 궁전.’

여왕의 궁전.

<이스페리아>의 전개 상, 3막의 보스가 등장하는 던전이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여왕의 궁전은 본 시점보다 더 뒤에 등장할 던전이지만, 지금은 현성이 그의 누나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고 있는 상태.

그만큼 현성은 조금 이르게 여왕의 궁전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을 혼자 공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에 수연에게 말한 대로 다른 조력자와 만날 계획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연을 안심시키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지.’

글쎄 그 사람이면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수연은 연신 그를 걱정하더니, 심지어는 아예 도련님을 보내야한다면 차라리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고 까지 말했다.

덕분에 현성은 그런 수연을 만류하느라 꽤나 애를 썼다.

그리고 어찌저찌 그녀를 안심시킨 결과.

그는 무사히 아카데미에 도착해 그자와 접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자란 누구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잠시 <이스페리아>의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10년 전, 대변동.

그러니까 게이트에서 온갖 마족과 괴수들이 쏟아지던 혼란의 시기.

당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등등.

여러 가지 이유들로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야말로 끊이지 않는 전쟁터.

그러나 전쟁터와 같은 이 시기에도 영웅은 존재했다.

영웅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혼란을 바로잡고, 마족을 몰아내며 그들의 힘이 담긴 던전을 봉인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그때 봉인한 던전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여왕의 궁전’.

그에 따라 지금 목적이 여왕의 궁전이라면 그때 던전을 봉인했던 영웅을 찾아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영웅들 중 하나는 이 아카데미에 남아있다.’

그 영웅은 절망뿐인 전쟁터에서 유일한 빛이자, 안식처와도 같았다.

그녀는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희망을 뿌리고 다녔으며, 사람들은 그런 미소를 보고 그녀를 전장의 천사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그녀를 사모하는 팬덤까지 생겼을 정도.’

그만큼 당시 그녀의 활약과 영향력은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과거를 지닌 영웅이 아카데미에 있다니.’

그대로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유현성.”

한창 앞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붉은 머리의 교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교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클레아.

그러자 이름을 불린 현성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교수님.”

“…….”

이클레아가 보기에는 현성은 강의 내내 강의를 듣기는커녕, 줄곧 노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건 상관없었다.

학생이 딴 짓을 하든 뭘 하든 결국은 본인 인생이니, 교수인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녀가 알기로는 현성은 이번 시험에서 유일한 만점자.

게다가 시험은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를 제외하고 만점자는커녕, 문제의 반도 못 맞춘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그에 따라 이클레아는 수업이라고는 전혀 듣지 않는 현성이 어떻게 만점을 받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대로 이클레아가 칠판을 툭툭 가리키며 물었다.

“대기 중에 150의 마나포화도가 있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최소한의 마법구현에 필요한 마나퍼센트는?”

그녀의 돌발질문.

줄곧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학생 수준에서는 꽤나 풀기 힘든 고급응용문제였다.

하지만 현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14%에서 17%입니다.”

그런 현성의 대답에 이클레아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정답이었다.

그것도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정답.

“……그래. 이 경우에는 현성이 말한 대로 14%에서 17%의 마나가 필요하지.”

역시 만점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이클레아가 작게 혀를 차고는 자연스럽게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니까 이 해답을 구하는 공식은 이렇게 되는 거지.”

이클레아의 마지막 설명이 끝났다.

마침내 종료된 강의.

그와 동시에 이클레아가 책을 덮으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 궁금한 거 있나?”

그대로 이클레아가 강의실을 스윽 훑어보았다.

보통 여기서 질문하는 학생들은 드물었다.

역시 손을 든 학생은 없었다.

“아무도 없으면 오늘은 이만……”

이에 이클레아 역시 대충 강의를 끝내고 강의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스윽.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현성.

곧바로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

그런 현성의 말에 이클레아가 영 탐탁치 않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학생이라면 모를까.

저 녀석이 질문을 할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도 잠시.

그래도 손을 들었으니 이대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이클레아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뭔데.”

“연금술을 이용해 포션을 만들 경우, 통상적인 포션보다 높은 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얼마정도의 마나포화도가 뒤따라오는지, 다른 조건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이클레아가 턱을 매만졌다.

포션을 제조 시, 효과를 증진시키기 위한 마나포화도와 나머지 조건.

꽤나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흐음…….”

물론 답변해주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당장 강의가 끝낸 강의실에서 답변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았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이클레아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현성.”

“예.”

“……연구실로 따라오도록. 자세한 답변은 거기서 해주지.”

그런 이클레아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이제 10년 전, 대변동 당시.

전장의 천사이자, 전장의 ‘아이돌’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