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엑스트라의 사정(9)
동시에 뒤에서 그런 하선을 지켜보던 로브들이 움찔거렸다.
평소에는 차갑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동생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이지 놀랄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성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보자마자 이렇게 반겨줄 줄은 몰랐다.
보통 친누나라면 못 죽여 안달일 줄 알았건만 완전히 그 반대였다.
그래도 현성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그나저나 신기한 느낌이군.’
현성이 하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낯설지 않았고.
처음 말을 섞어 보지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을 반기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어서 하선이 수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너만 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하선의 말에 수연이 작게 움찔거렸다.
오늘은 분명 그녀와 둘이 만날 예정.
그 계획에는 현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이에 수연이 말끝을 흐렸다.
현성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마족과 손을 잡은 그녀를 막기 위해.
그리고 이는 곧 하 가문의 아가씨, 하선과 다른 노선을 가겠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즉 눈앞에서 그 사실을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채 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선이 먼저 말을 꺼냈다.
“뭐 상관없어.”
하선이 별 거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은 간만에 동생을 본 것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거든.”
그대로 하선이 현성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동시에 그녀가 천천히 발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 가문의 문양만이 남아있는 폐허.
“……기억나니?”
그곳을 바라보며 하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옛날에 여기서 너랑 나랑 숨바꼭질하고 놀았었잖아.”
그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드디어 올 게 왔다.
현재 현성에게는 숨바꼭질에 관한 건커녕, 그녀에 관한 기억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상태.
“…….”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넘겨야했다.
이에 현성이 그녀를 따라 폐허로 시선을 돌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때 누나 찾느라 애 좀 먹었었지.”
“맞아. 기억하는구나?”
그런 그의 대답에 하선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현성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그 나이 대에 숨바꼭질이면 대충 거기서 거기겠지 라는 예상이 들어맞았다.
‘……다행히 이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아무튼 이걸로 분위기가 깨지는 일은 없었다.
과거를 회상하듯 한참동안 폐허를 바라보는 하선이 그 증거.
그대로 하선이 기둥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한편으로는 아쉽네.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는 게 말이야.”
그러나 그도 잠시.
하선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제 곧 원래대로 되돌아 올 거야.”
“원래대로?”
“그래, 폐허가 된 이 건물도, 가문도, 전부……”
폐허가 된 건물을 재건하는 것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도.
마족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선은 믿고 있었다.
동시에 수연이 오늘 이 자리에 현성을 데려온 것 역시, 혹시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 같이 갈까?”
아스라한 달빛 아래.
하선이 현성을 향해 하얀 손을 뻗었다.
이제 남은 건 동생을 데리고 ‘그 분’을 뵈러 가는 일 뿐.
허나 그때였다.
-처억.
돌연 수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 전은 타이밍을 놓쳤지만, 지금만큼은 확실히 말해야했다.
그대로 그녀가 하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오늘은 다른 말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다른 말?”
그런 수연의 행동에 하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을 전할게 있었던가.
그리고 수연의 입에 나온 말은 다름 아닌.
“저와 도련님은 마족과 손을 잡지 않겠습니다.”
하선 그녀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었다.
이에 하선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뭐라고…….”
하선의 뒤에 있던 로브들이 앞으로 나섰다.
아니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허나 하선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잠깐. 멈춰.”
“네? 하지만 지금…….”
“멈추라고 했잖아.”
단호한 하선의 대답.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 현성을 대할 때와는 달리 차갑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경고가 담겨있는 목소리.
이에 그들이 주춤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뒤.
하선이 아무 말 없이 수연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
마족과 손을 잡지 않겠다라.
오늘 수연이 이 자리에 현성을 데려온 것은 그녀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충분히 예상하던 일이니까.’
이미 제안을 거부하는 경우도 상정해두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동생 현성이라면 그럴 거 같았다.
처음 그녀도 그랬으니까.
동시에 지금은 그저 어디까지나 말 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니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수연에게 먼저 편지를 보냈건만, 아무래도 그녀는 현성을 따라 반대편에 선 모양이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
하선이 아무 말 없이 수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대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해해. 아직은 아무런 성과도 없으니까. 지금은 폐허가 된 이곳을 재건할 힘도, 가문을 다시 일으킬 능력도 없어. 그래도 한 번만 믿어주지 않겠어?”
조금 전 현성이 했던 말과 같은 말.
그러나 그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이에 수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
또 한 번의 거절.
그러자 결국 하선의 뒤에 있던 로브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럼 역시 둘 다 죽여 버리는 게……!”
두 번이나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아예 그냥 둘 다 죽여 버리는 편이 제일 깔끔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터업!
돌연 하선이 손을 뻗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선 로브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에는 검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하선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주위로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진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현성을 보자마자 미소를 짓던 하선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
-꾸드득!
그녀에게서는 오직 진득한 살기만이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그대로 하선이 손아귀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이에 목을 붙잡힌 로브의 입을 따라 작은 비명소리가 삐져나왔다.
“끄르륵….커헉…!”
그러나 하선은 오히려 더욱 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표정을 구겼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동생을 죽이겠다는 말을 꺼내다니.
덕분에 간만에 현성을 보고 좋아졌던 기분이 단숨에 더러워졌다.
유하선.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평소에 차갑고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지만.
동생에 관한 이야기라면 유독 격하게 반응하고는 했다.
특히 동생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녀는 어김없이 지금처럼 강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심지어는 그게 자신의 부하라도 예외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지껄여봐. 누가 누굴 죽인다고?”
그녀가 부하의 모가지를 부여잡은 채 으르렁거렸다.
이에 그가 급하게 사과했다.
“죄, 죄송……”
“한 번만 더 그러면 그때는 목을 꺾어버리겠어.”
그대로 하선이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와 함께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숨을 고르는 로브.
그리고 줄곧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어…….”
방금 전 보여준 모습으로 그의 누나 유하선이 어떤 유형인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하선은 다시 작은 미소를 띠며 현성에게 말했다.
“미안. 무서웠지?”
그 말에 현성이 바닥에 널브러진 로브를 흘깃 바라보았다.
무서운 걸로 치면 솔직히 그보다는 하선이 더 무서웠다.
곧바로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 믿어달라는 뜻은 아니야. 천천히…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그러면서 하선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는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까.”
동시에 현성의 등을 타고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하선은 오히려 그런 현성이 귀여운지 싱긋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못 믿을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에겐 새로운 ‘그 분’이 있으니까 가능해.”
“……그 분?”
그런 하선의 말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 분이라면 혹시 편지에 적혀있던 이키펠을 말하는 건가.
이키펠, 마족을 이끄는 자의 이름으로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 마족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이에 옆에 있던 수연이 말했다.
“그 분이라면 혹시 이키펠이라는 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 예상과는 달랐다.
“물론 그 자도 있지만……아니야.”
“그럼 도대체…….”
“여기서 더 말해줄 수는 없어.”
하선이 수연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거 같네.”
현성과 수연이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밝힌 지금.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가까운 미래에 결과가 모두 증명해줄 것이다.
자신의 뜻이 옳았음을.
마족과 함께 하는 게 부흥의 길임을.
그녀의 동생, 현성은 지금은 그저 약간 혼란스러워 할 뿐이었다.
그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다.
그대로 하선이 처음 현성을 만났을 때처럼, 그를 꼬옥 껴안았다.
“내 동생. 사랑스러운 내 동생.”
“…….”
“지금은 다시 헤어지지만 걱정하지 마.”
하선이 현성을 껴안은 채,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우린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와 함께 하선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발밑을 타고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아지랑이가 점점 그녀와 로브들을 집어삼키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하선이 현성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현성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선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함만이 맴도는 폐허, 수연이 입을 떼었다.
“……어떻게든 마무리 됐네요.”
“그러게.”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가 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아가씨께서는 원체 도련님을 아끼시기는 했지만……못 본 사이 그 성향이 더 강해진 거 같군요.”
“…….”
이에 현성이 아무 말 없이 하선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우선 수연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녀까지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거 같았다.
그 모습에 수연이 말했다.
“그래서 도련님.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가요?”
하선은 계속해서 마족과 손을 잡고 움직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성이라면 이를 막으려 할 터.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앞으로 하선이 어떻게 나올지도, 어디를 향할지도 몰랐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했지만 그 정보가 너무나도 모자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하선이 어떤 던전을 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 뿐.
“하다못해 그 열쇠만 가지고 있었다면…….”
동시에 현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열쇠?”
“네, 아가씨가 가지고 있는 열쇠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마 그 열쇠를 사용하는 던전이 아가씨의 다음 행선지…….”
그때였다.
현성이 손을 펼치며 말했다.
“이거 말이야?”
그런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검은색의 열쇠.
바로 수연이 말하는 그 열쇠임과 동시에, 방금 전만 해도 하선이 가지고 있던 열쇠였다.
이에 수연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그, 그걸 어떻게…….”
하지만 그도 잠시.
수연이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현성과 포옹한 것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열쇠를 흔들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할지 지금부터 생각해보자고.”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