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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18화 (118/240)

118화 엑스트라의 사정(8)

머리로는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현성을 끝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도.

여기서 단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계속해서 현성을 압박해나가며 전투를 풀어나갔다.

현성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다.

그러나 못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현성은 끊임없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공격을 피하는 것도 모자라, 얼음으로 발을 묶고 공격을 날리지 않나.

그 중에서도 특히 단검을 쳐내 다음 순간이동 위치를 강제한 부분은 그야말로 허를 찔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전투센스는 10년 전, 대변동 때에도 보기 드물었다.

그리고 지금 현성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 속도는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동시에 안타까웠다.

지금만 해도 이 정도인데 만약 가문이 뒷받침됐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인력이 있었더라면.

현성은, 도련님은 지금보다 더 높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게 그녀를 더 괴롭게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점은 다름 아닌 당장 눈앞의 도련님을 쓰러트려야한다는 점이었다.

도련님을 위해 도련님을 쓰러트려야한다니.

그야말로 모순이 따로 없었다.

그때부터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했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그가 아닌 자신이 먼저 무너질 거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진심을 다해 싸웠다.

감정을 죽이고, 말수를 줄이고, 공격은 날카롭게.

10년 전 전쟁터에서 배웠던 것처럼.

한때 본능과도 같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가르침을.

수연은 그때 그 감각을 되살리며 전투에 집중했다.

그 덕분일까.

조금씩 승기를 잡아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4번째 공격을 날렸을 때만 해도 그녀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성이 5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수연의 예상은 산산조각 났고, 더불어 그때의 감각도 흔들렸다.

이어서 찰나에 불과했던 그 짧은 사이에 날아오는 창을 바라보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승부를 결정할 마지막이구나.’

이에 마지막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현성과 눈이 마주친 순간, 도저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르륵.

결국 그대로 손아귀에 힘이 빠지고.

마지막 공격을 날려야함이 분명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녀는 단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승패가 결정 난 뒤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수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 모습에 수연은 화가 났다.

-꾸구국.

그녀가 화난 이유는 간단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의사의 표현도 아니었다.

이는 동시에 현성 그를 해치려는 자신을 가만히 두겠다는 의미였으며, 수연은 그게 가장 미웠다.

“왜…….”

차라리 시원하게 욕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그래서 수연은 일부러 차갑게 눈을 흘기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절 포박시켜서 정보를 캐낼 건가요?”

“…….”

“아예 저를 인질로 삼는 것도 괜찮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수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것도 아니면.”

수연이 보란 듯이 조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절 죽여 버리는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현성이 움직였다.

그대로 그가 들고 있던 창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수연이 눈을 감았다.

그래, 오히려 이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수연이 다가올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챙그랑.

허나 그 뒤에 느껴지는 건 고통이 아니었다.

현성 그가 들고 있던 창이 바닥에 떨어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을 타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에 수연이 눈을 떴을 때는.

-스르륵.

현성이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대로 수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귓가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현성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유지하던 차가운 눈빛도, 날이 선 말투도,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놔주세요.”

거짓말이었다.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계속 안아줬으면 좋겠다.

“놔주세요, 제발…….”

여기서 더 입을 열면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성은 여전히 수연을 꽉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이에 결국 수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왜…고작 메이드인…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그야 당연히.”

그런 수연의 물음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중하니까.”

그게 등장인물 유현성으로서 그녀에게 느껴야만 하는 감정인지.

설정 상 그럴 수밖에 없는 감정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현성은 지금 이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래야만 할 거 같았다.

그 말에 수연이 입을 꾹 닫았다.

동시에 푹 숙인 고개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번 흘러내린 눈물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우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소리 내서 우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10년 전 대변동에서 유 가문의 암살자로 자라오면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을 죽이는 것이었다.

암살자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며, 누구에게도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됐다.

물론 그 후로 현성을 돌보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여러 감정을 배웠지만, 소리 내서 우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런 소리도 없었기 때문에 감정이 더 진하게 전해졌다.

그대로 수연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줄곧 가려져있던 그녀의 손이 보였다.

손에 감은 붕대는 전투로 인해 반쯤 벗겨져 있었다.

그렇게 벗겨진 붕대사이로는 붉게 물든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동안 반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로 상처가 없는 게 이상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방금 전 전투로 상처가 터진 모양인지 그녀의 손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그 모습에 현성이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수연의 손을 꼭 쥐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장갑.

집에 오기 전.

그녀를 위해 샀던 검은 장갑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수연의 손에 장갑을 씌워주며 작게 웃었다.

“미안. 선물로 준비한 건데 너무 늦었네.”

그런 현성의 말에 수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선물이라니.

설마 다친 손 때문에 준비한 걸까.

“사실은 저녁식사 끝나고 바로 전해주고 싶었지만…….”

현성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

그 말에 수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전부 자신이 편지를 숨긴 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수연이 주먹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 때문에…….”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연이 미안할 일은 없었다.

그녀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아냐. 괜찮아.”

다만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이어서 현성이 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신 이번만 날 믿고 따라와 주면 안 될까?”

“…….”

그런 현성의 물음에 수연이 그와 저 멀리 서있는 기둥을 번갈아봤다.

기둥에는 여전히 유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문양을 바라보던 수연이 다시 고개를 돌려 현성을 바라보았다.

“치사하네요. 도련님.”

“……뭐?”

“이렇게까지 하면.”

그대로 수연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믿어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수연의 눈에는 웃고 있는 입가와는 다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음과 같은 웃음과, 처음과 같은 눈물.

그러나 그 안의 감정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역시 그녀는 현성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수연이 아주 작게.

바로 눈앞의 현성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도련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요.”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러자 수연이 활짝 웃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 말도 안했어요.”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달빛이 내리는 깊은 숲속.

고요한 폐허 아래.

“이제 슬슬 올 때가 됐군요.”

수연이 시간을 확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에 현성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침내 누나, 그러니까 유하선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유독 도련님을 좋아했으니까요. 예전에 기억나시죠? 그건 아마 지금도 같을 겁니다.”

“…….”

“그러니 섣불리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거예요.”

“하하…….”

그런 수연의 말에 현성이 난감한 듯 웃음을 지었다.

누나가 그를 좋아한다거나, 그를 아꼈다던가, 사이가 좋았다거나.

전부 다 좋았다.

‘……내가 그때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전에 말했듯이 현성은 그녀의 누나에 관한 것은커녕, 이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기억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애초에 지금의 현성은 등장인물 유현성과는 다른 존재.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러다 만약 누나와 조우했을 때, 그녀가 과거에 대해 언급이라도 한다면.

‘자칫하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다.’

물론 수연이 있는 만큼.

심하게 상황이 꼬이지는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과거 이야기가 나오면 최대한 자연스럽고,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게 나았다.

그리고 잠시 뒤.

줄곧 가만히 서있던 수연이 미간을 좁혔다.

곧이어 그녀가 저 멀리 캄캄한 나무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련님. 왔습니다.”

그런 수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무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비유라던가 그런 표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림자가 생명을 가진 듯, 부드럽게 앞으로 기어 나왔다.

-스르륵.

그대로 나무를 지나, 폐허까지 다다른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때였다.

그림자를 타고 대 여섯 명의 사람이 솟아올랐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

아마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이 그들의 리더로 추정되었다.

-처억.

그리고 걸어오던 리더가 수연의 옆에 서있는 현성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서 뒤에 있는 로브 사이에서 목소리 하나가 삐져나왔다.

“……옆은 누구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있었다.

그들은 현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죠. 이쪽은…….”

이에 수연이 현성을 지키려는 듯 손을 펼치며 입을 뗀 순간이었다.

검은 로브 중 가장 맨 앞에 있던, 그러니까 리더로 추정되던 자가 움찔거렸다.

동시에 그자가 돌연 현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현성!”

그대로 현성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껴안았다.

-와락!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현성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자신의 품에 안긴 로브를 바라보았다.

로브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 행동으로 보아 그자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나?”

그렇게 한참동안 현성을 껴안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현성아.”

로브를 벗고 모습을 드러낸 건 검은 단발머리의 여성이었다.

무엇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수연의 방에서 본 액자 속 소녀와 비슷한, 동시에 현성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금 전 짐작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그녀가 바로 유하선.

유 가문의 아가씨이자.

현성 그의 누나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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