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엑스트라의 사정(4)
현성의 방안.
그가 화연과의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현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화연이 전해준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의 과거.
그녀는 과연 이걸 말해주는 게 맞는지 아닌지 고민한 모양이었지만, 결국은 현성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정보는 지금 같은 상황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10년 전 대변동. 수연이 그때 활동했었다니…….’
거기다 그녀의 이명. ‘마법사 사냥꾼’.
과거 레이첼 납치사건에서 수연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납득 가는 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그녀가 마족과 연관되어 있다니.
“……언제부터 누나와 연락해왔던 걸까.”
정령왕의 술잔은 비단 뱀파이어들뿐만이 아닌 여러 종족이 노렸던 물건.
무엇보다 그 중에서는 마족도 있었다.
그리고 마족이 정령왕의 술잔을 노린 데에는 저주를 풀기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정령왕의 술잔을 이용해 다른 종족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기서 수연 역시 정령왕의 술잔을 노리고 레이첼을 습격했다면 이는 곧 그녀가 그 전부터 누나와 연락해왔다는 뜻과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수연 그녀가 독단으로 움직였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그야 수연에게는 애초에 정령왕의 술잔을 노릴 이유가 없잖아.’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독단으로 움직였다기보다는 차라리 마족 편에 붙은 누나의 요청으로 인해 정령왕의 술잔을 노렸다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수연과 누나가 연락을 한 것은 적어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에 따라 수연 역시 어느 정도는 누나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현성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터.
그러나 아직까지도 편지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젠장, 머리 아프네…….”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제 한숨 좀 돌리고 쉬나 싶었건만, 이런 거대한 빅엿 이벤트가 기다릴 줄이야.
물론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도 마족 편에 붙는 가문이 종종 있었다.
‘……근데 그게 내 가문일 줄은 몰랐지.’
집이 무너졌다고 해서 구경을 갔더니 글쎄 그게 우리 집일 줄이야.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마족 편에 붙는 가문들이 이해안가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10년 전 대변동에서 보여준 마족의 위엄은 대단했으니까.
결국은 인생은 줄타기의 연속이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마족 편에 붙는 것 역시 어쩌면 성공의 길이 될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미래를 모른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
그러나 현성 그는 <이스페리아>의 모든 엔딩과 미래를 알고 있었다.
동시에 마족에게 붙은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스페리아>에서 마족은 흔히 말하는 망한 코인이었다.
‘마족코인 탔다가는 화성은 개뿔, 나락으로 가는 직행선.’
그런데 무려 그의 누나가 마족코인에 올인을 때려버린 상황.
이에 현성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 화상아…….”
물론 이름밖에 모르고 생전 한 번도 본적 없는 누나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누나가 미웠다.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올인을 하면 안 된다는 거다.
기억하자, 코인은 분산투자를 해야 한다.
“……젠장.”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턱을 매만지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두면 꼼짝없이 마족코인을 탄 그의 가문은 나락으로 처박히고, 그 중에서는 현성 그는 마족에게 몸을 빼앗길 운명.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막느냐가 문제인데.”
지금 당장 수연에게 이 사실을 밝히고 하지 말라고 말린다 한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순순히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하고 그만둘 리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진즉에 누나와 편지의 존재를 알렸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 뿐.’
줄곧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현성이 한숨을 내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수연의 방에서 발견한 편지에 적혀있던 날짜는 다름 아닌 오늘 밤.
그리고 장소는 ‘우리가 기억하던 곳’이라고만 적혀있어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현성이 내릴 선택은 간단했다.
‘……오늘 밤, 수연의 뒤를 쫒는다.’
그대로 현성이 주먹을 꾹 쥐었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늦은 밤이 되고, 주변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현성의 집 역시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불이 꺼진 현성의 방을 타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수연.
-끼익.
평소의 수연이라면 지금쯤 자고 있어야함이 분명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언제나 입고 있던 메이드복 대신 암살자 특유의 검은 복장.
그런 그녀의 허벅지에는 2개의 단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윽.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수연이 천천히 현성을 향해 걸어갔다.
불이 꺼진 방, 그리고 곤히 잠든 현성.
그대로 수연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고는 작게 웃었다.
“…….”
이를 마지막으로 수연은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곧이어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끝으로.
수연은 단숨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그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그가 창밖을 흘깃 바라보고는 몸을 풀었다.
“그럼 이제 나도…….”
이어서 현성 역시 나설 채비를 하며 중얼거렸다.
“누나 얼굴 좀 보러 가볼까.”
그와 함께 현성이 사라진 수연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수연에게 들키지 않게끔 그녀의 뒤를 밟았다.
‘……덕분에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은 모양이군.’
현성이 저 앞에 있는 수연을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그가 들키지 않는 이유에는 물론 그만큼 현성이 조심히 미행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성이 뒤를 밟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대로 점점 집과 멀어지고, 마침내 도심을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돌연 수연이 뒤를 돌아봤다.
이에 현성이 재빨리 몸을 숨겼다.
“…….”
그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현성의 집.
다행히 그의 미행을 눈치 챈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수연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그녀가 방금 전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 수연.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지지 않고 그녀를 쫒았다.
물론 ‘휴먼 라이트닝’을 사용하면 따라잡는 건 문제도 아니었지만, 여기서 대놓고 그 기술을 썼다가는 ‘나 여기 있소.’ 홍보하는 꼴.
“후우…….”
결국 현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올렸다.
그대로 대략 20분 정도 지났을까.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깊은 숲 속.
-처억.
마침내 수연이 멈춰 섰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추적하던 현성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숨을 돌렸다.
그러면서 현성이 저 멀리 나무사이에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산길에서 속도가…….’
아무리 기초 스텟 차이가 나고, 휴먼 라이트닝을 안 썼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 빨랐다.
게다가 그러고도 숨이 차기는커녕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면 <이스페리아>의 암살자클래스 중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일거 같은데.’
아무래도 10년 전 대변동 때부터 이름을 날린 게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대로 잠시 뒤.
수연이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쉽사리 주변을 분간할 수도 없는 어두운 숲 속임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수백 번이나 와본 것처럼 너무나도 익숙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현성은 수연을 따라 계속해서 움직인 결과. 어느 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파른 산길과는 다르게 나무 사이 숨겨진 평지.
무엇보다 그런 평지 위에는 다 쓰러져가는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구조물은 워낙 오래 방치된 모양인지 거의 골격만 남긴 채, 온갖 덩굴과 나무에 뒤얽혀있었다.
‘……폐허?’
마치 버려진 폐허 혹은 폐공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수연은 그 앞에 우뚝 선 채, 기둥 한 구석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졌다.
-스윽.
그 후 머지않아 현성은 그 기둥에 새겨진 익숙한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엠블럼에 호루스의 눈을 연상케 하는 그림.
유 가문의 문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가…….’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편지에서 말한 그 장소.’
그리고 이곳이 만약 편지에 적힌 장소가 맞다면 이제 현성 그가 할 행동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나무 뒤에 숨어있던 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와 동시에 낯선 기척을 알아차린 수연이 재빨리 허벅지에 단검을 뽑아들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방금 전의 그리움은커녕, 차갑게 가라앉은 경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넌 누구…….”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의 얼굴을 발견한 수연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대로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단검을 꾸욱 쥐었다.
‘도련님이 왜 여기에……?!’
정령왕의 술잔을 탈취하기 위해 뱀파이어의 공주를 습격할 때 이후로 두 번째로 보는 도련님이었다.
그때도 분명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편지는 분명 제대로 숨겼을 터.
아무리 생각해도 현성, 그러니까 그녀의 도련님이 여기서 나올 이유가 없었다.
이어서 현성이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구면이지?”
그 말에 수연은 자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상.
현성이 왜 여기서 등장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다행이야.’
정확히 무엇이 다행인지는 몰랐지만, 도련님의 눈에 비친 자신이 메이드 수연이 아닌 정체불명의 암살자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습격한 암살자가 자신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수연이 주변을 흘깃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눈앞의 현성을 따돌리기만 한다면 이번에도 정체가 들킬 일은 없다.
물론 그전에 도련님이 왜,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그 사실보다는 지금 당장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래도 아가씨와 만나는 건 잠깐 미뤄야겠어.’
아가씨 역시 아끼는 동생이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건 싫어할 게 분명했다.
손을 더럽히는 건 자신 하나면 충분했다.
이에 수연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스윽.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은 이어진 현성의 말에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단 둘이네.”
그대로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수연?”
달빛이 내리는 깊은 숲속.
고요한 폐허 아래.
현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