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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11화 (111/240)

111화 엑스트라의 사정(1)

그대로 현성이 연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그의 손길에 연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서는 아직도 지금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

곧 연서가 현성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화이트레이를 바라보았다.

불타는 눈동자도, 차가운 숨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로지 고요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이트레이를 쓰러트린 현성의 일격.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섬광과 푸른 불꽃.

그리고 첫 발자국 밖에 없었다.

‘마치 순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던 그 느낌…….’

현성이 첫 발자국을 내딛었을 때.

그에게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동시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그동안 현성이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그때만큼은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연서 그녀가 느낀 기백은 거짓이 아니었다.

방금 전 현성은 투신의 길의 효과로 인해, 잠시나마 티리카가 깃들었던 상태나 마찬가지.

무려 과거 기사왕이라고 불리던 자였다.

그만큼 그 순간.

현성의 첫 걸음은 지금껏 그녀가 봐왔던 누구보다도 완벽했다.

그녀 본인은 물론이며, 연서가 속한 길드 엘더란의 베테랑의 헌터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

‘……아니 심지어는 하 가문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가능할까.’

하지만 그도 잠시.

-흠칫.

연서가 황급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가문의 장로들과 그를 비교하다니.

연서는 방금 전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었어.’

무려 단신으로 화이트레이를 쓰러트렸다.

다른 걸 몰라도 이것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대로 연서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이렇게……될 수 있을까.”

그 말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난 마법산데. 넌 검사고. 궤가 좀 다르지 않을까.”

그러자 연서가 움찔거리며 휙 고개를 들었다.

“드, 들었어?!”

이에 현성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야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데 그걸 못 듣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윽…….”

현성의 대답에 연서가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다한들, 귀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이미 그녀의 귀는 부끄러움에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연서가 웅얼거렸다.

“모, 못들은 척 해.”

“뭐?”

“못 들은 척 하라고!”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예.”

“너. 어디 가서 말하면…….”

“말하면?”

그러자 연서가 눈매를 팍 좁히며 진지하게 입을 떼었다.

“하 가문으로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

동시에 현성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모 애니메이션의 명대사를 연상케 하는 대사.

현성이 그녀의 옷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일러복에 달만 떠있으면 완벽했는데…….”

“……뭐?”

“있어. 그런 게.”

현성이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나처럼 될 수 있을까.’라니.

그녀답지 않으면서도, 어찌 보면 참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이에 현성이 연서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전에 말했잖아. 시연이나 너나 똑같다고.”

그 말에 연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고는 되물었다.

“……내가?”

“그래. 그러니까 다른 건 몰라도…뭐 하시연처럼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대로 현성이 그녀의 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같은 하 가문의 검사잖아.”

“…….”

그런 현성의 말에 연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동안 들어왔던 말이라고는 항상 그녀의 언니 시연과 비교했던 말뿐.

같은 하 가문이면서 왜 이리 다른지.

같은 하 가문인데도 왜 언니처럼 못하는지.

언제나 연서 그녀의 뒤에는 하 가문과 시연의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그 덕분에 한때 조명을 받았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남은 것은 언니에 대한 열등감과 하 가문이라는 이름에 달린 무게가 전부였다.

그런데 현성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같은 하 가문의 검사…….”

연서가 방금 현성이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 거 아닌 말일 수 있었다.

허니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그동안은 하 가문이라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어,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시연이 그러하듯이, 자신 역시 하 가문의 검사였다.

그리고 현성의 말대로라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렇게 한참동안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연서가 피식 웃었다.

그와 함께 연서가 고개를 들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런 연서의 말투에는 평소의 그녀 같은 당당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 본인에 대한 자신감.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기 좋네.”

평소라면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대로 현성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동시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

“현성!”

다름 아닌 화연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는 각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막힌 길을 돌아 도착한 모양이었다.

“……거 참 빨리도 오네.”

그 모습에 연서가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잠시 뒤.

화연이 현성의 몸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은 거 맞지?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아까도 말했잖아요. 괜찮다고.”

“……정말이지?”

“글쎄 그렇다니까요.”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써 이게 몇 번째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당히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누구누구가 생각나는군…….’

만약 이 자리에 수연이 있었다면 그녀 역시 그랬을 터.

아니 이것보다 더 심하게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후로 3번이나 괜찮다고 대답하고 나서야 화연이 한 발 물러섰다.

“괜찮다니 그럼 다행이네.”

그대로 화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베테랑 헌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현성을 향해 물었다.

“……그럼 혹시 저기 있는 화이트레이는 자네 혼자 잡은 건가?”

“그게 아니면…….”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바로 연서가 서있는 방향.

그 중에서도 유독 엘더란의 한성이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연서를 바라보았다.

‘연서라면 혹시…….’

그녀가 같이 화이트레이를 잡아냈다면 그에 따라 엘더란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건 당연지사.

여기서 한성 그가 알고 있는 연서라면 당연히 같이 잡았다고 말할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를 부인하면, 그건 자신이 밀렸음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연서가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할리는 없었다.

아니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뇨. 전 아무것도 못했어요.”

연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현성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화이트레이를 잡은 건 어디까지나 저 녀석입니다.”

그런 그녀의 대답에 한성이 미간을 좁혔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곧바로 그가 현성과 연서를 번갈아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럴 리가……아니 못해도 같이 싸운 건 분명…….”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 녀석이 아니었으면……전 꼼짝없이 당했겠죠.”

그대로 연서가 현성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내 말이 맞지? 현성.”

그렇게 말하는 연서는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마치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열등감도,

잘해내야만 한다는 가문의 중압감도 사라진 느낌.

‘의외구만.’

이에 현성 역시 예상 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당연히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같이 싸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오다니.

‘……조금은 달라졌다 이건가.’

현성이 옅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화이트레이 토벌전은 그녀에게 있어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나쁠 건 없겠지.’

그렇게 하얀 설원 위.

내리는 눈과 쓰러진 화이트레이를 마지막으로.

화이트레이 토벌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드가 마무리되고 돌아가는 차안.

화연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레이드……미안했어.”

화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레이드 마지막에 화이트레이를 혼자 그에게 맡긴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원래대로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며, 그렇게 혼자 둬서도 안 될 일이었다.

물론 생태조사를 담당하기로 한 길드는 청화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연은 그게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만약 자칫 잘못하면 현성을 포함한 일반 길드원들은 전부 전멸이었다.

그러나 현성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대로 현성이 화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좋은 무기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할 다름입니다.”

“무기라면…….”

“네, 스태프 말입니다.”

현성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현성 그는 이번 레이드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뭐 중간에 변수가 하나 있었지만, 결과에 비하면 그 정도는 넘어갈 만 했다.

‘……데일런트를 상대하거나, 크루페돈의 봉인이 풀렸거나, 골렘의 핵이 80%확률로 다른데 있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선녀지.’

그동안 그가 굴러온 일들에 의하면 수컷 화이트레의 등장은 애교였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면 감사할 다름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레이드로 인해 얻은 무기.

‘이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해.’

무려 청화길드의 마이스터 화연이 직접 만들어준 무기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어떠한가.

그동안 맨손으로는 할 수 없던 전투방식은 물론, 마법의 위력까지 상승시킬 수 있었다.

“아무튼 전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마세요.”

“그건 고맙지만…….”

화연이 말끝을 흐렸다.

고작 이정도 말로 넘어가기에는 미안함은 여전했다.

“흠…….”

이에 그녀를 바라보던 현성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럼 정 미안하다면 이렇게 해줘요.”

곧바로 현성이 화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기 무상 수리와 레이드 이용권.”

그 말에 화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기 무상 수리는 알겠는데 레이드 이용권은 뭐야?”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간단해요. 청화길드에서 좋은 레이드가 잡히거나, 제가 요청할 때 레이드 인력을 구성해 같이 가주는 거죠. 물론 제가 요청할 경우에 발생하는 부산물은 공정하게 나눌 겁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계약용병관계죠.”

<이스페리아>에서 레이드는 화이트레이 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당연히 화이트레이보다 더 잡기 어려운 몬스터도 존재하기 마련.

그런 입장에서 청화길드와 같은 인력이 있다면, 이건 현성에게 있어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무기제작처럼 필요한 재료가 있을 경우 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었으며, 주로 레이드 몬스터의 부산물은 다방면으로 쓰이니 획득할 수 있으면 획득해두는 편이 좋았다.

거기다 어디 가서 청화길드 같은 고효율 인력을 구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기왕 레이드를 갈 거면 역시 좋은 길드 인력을 쓰는 게 훨씬 편하지.’

무엇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약이라는 것.

즉 현성은 청화길드에 들어가지 않고도, 레이드 시 청화길드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추가적으로 무기 무상 수리는 딱히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현성의 스태프와 같이 특수 제작 무기는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수리비도 비싸게 먹히는 편.

그런데 무기의 제작자인 화연이 직접 공짜로 수리를 해준다?

‘그야말로 개이득이지.’

그대로 현성이 화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때요?”

그런 현성의 대답에 화연이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가능할 거 같네. 앞서 말했듯 데려가는 입장에서 제대로 관리 못해준 것도 미안하고 말이야.”

안 그래도 현성 그와는 오래 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제안은 나쁠 게 없었다.

물론 정식영입이 아닌 게 아쉬웠고, 무엇보다 무기 무상 수리는 김 비서가 듣는다면 뭐라 할 게 분명했지만 화연은 우선 그의 제안을 승낙하기로 했다.

‘미안해. 김 비서!’

훗날 화연은 이 선택으로 인해 김 비서에게 잔소리폭탄을 듣게 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그와 함께 화연이 현성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그리고 그 와중.

어느새 차는 현성의 집 근처에 다다랐다.

이에 현성이 창밖을 흘깃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러자 화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게 편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현성이 뒤에 있는 백화점을 가리키며 작게 웃었다.

“잠시 들릴 데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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