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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08화 (108/240)

108화 화이트레이 토벌전(3)

한편 빙산의 건너편.

그곳은 아비규환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이트레이의 궁극기로 인해 2개로 나뉘어버린 세력.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은 전부 반대편으로 몰렸다.

덕분에 이곳에 남은 것은 일반 길드원 뿐.

그리고 사령탑을 잃은 병력은 빠르게 붕괴되고 있었다.

“시, 싫어! 이럴 줄 알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주변에서는 겁에 질린 길드원들의 중얼거림이 쉴 새 없이 삐져나왔다.

당장 화이트 스콜피온이 나왔을 때도 그랬는데, 화이트레이라면 얼마나 심할까.

그대로 심지에 불이 붙은 공포심은 여태껏 본적 없는 빠른 속도로 주변을 침식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다들 멍청하게 뭐하는 거야!!”

공포심에 물든 주변.

한 소녀의 외침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일제히 그녀를 향해 시선이 쏠렸다.

“이러고도 니들이 네임드 길드의 일원이야?”

그녀의 이름은 바로 하연서.

검술명가 하 가문의 자식이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것은 물론, 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지금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중 유일하게 공포심에 전염되지 않은 게 바로 그 증거.

곧바로 연서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들었다.

-채앵!

그대로 연서가 다른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뭐해! 당장 무기 꺼내지 못해?”

그 말에 다른 길드원들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그래봤자 어차피….”

다른 베테랑 헌터들이 없는 이상.

이 인원으로는 절대 화이트레이를 상대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쯧.”

그와 동시에 연서가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다 죽자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일반 길드원만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건 연서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당장 모두가 달려들어서 잡았던 화이트레이다.

그 마저도 중간 중간 베테랑 헌터들은 물론, 현성의 오더가 없었으면 힘들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손 놓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하 가문으로서의 자부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하 가문이라면 다른 자들보다 무조건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했다.

설령 그게 당장 죽음을 앞둔 상황일지라도.

‘…언니가 그랬으니까.’

그녀의 언니, 하시연이 그랬다.

선천강에 데일런트가 등장했을 때도.

아카데미에서 불의 악마 크루페돈이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하시연은 조명 받았으며, 하 가문 역시 그 위세에 올라타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그리고 하시연이 그랬다면 연서 그녀도 그래야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꾸구국.

연서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길드원들이 말했다.

“너, 넌…무섭지도 않아?”

그 말에 연서가 아무런 대답 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 끝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섭다.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화이트 스콜피온 같이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무려 보스몬스터였다.

그것도 레이드를 진행해야 할 만큼의 몬스터.

아무리 산란기로 인해 약해졌다고 해도 보스몬스터는 보스몬스터였다.

지금 화이트레이가 뿜어내는 기백이 그 증거.

그러나 연서는 코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무섭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화이트레이를 노려봤다.

마치 커다란 장작불이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눈동자.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허나 연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이 하 가문의 이름에 걸린 무게니까.

그것이 하 가문의 이름을 단 자라면 응당 버텨야만 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압박.

하 가문에서 계속 주입시켜왔던 압박이었다.

“후우….”

그리고 그 압박은 적어도 지금만은 도움이 되었다.

연서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대로 그녀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어차피 화이트레이 토벌은 현실적으로 무리.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서가 화이트레이를 향해 한 발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베테랑 헌터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토벌이 아닌 대치.

이게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베테랑 헌터들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연서가 옆에 솟아있는 커다란 빙산과 화이트레이를 번갈아보았다.

‘화이트레이가 궁극기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화이트레이는 궁극기를 쓴 직후.

곧바로 궁극기를 연사하는 것은 물론 큰 공격을 쓰지 못한다.

저만한 위력의 기술을 썼다면 이는 화이트레이 본인에게도 꽤나 부담이 간다는 소리였다.

‘그런 만큼 앞으로 큰 공격은 날아오지 않을 거야.’

이는 현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연서 그녀가 기본적인 화이트레이의 특징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판단은 맞았다.

당분간 화이트레이는 궁극기를 포함한 큰 기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처억.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다른 길드원들도 하나 둘씩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에는 채 걷어내지 못한 공포심이 남아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다른 모습.

이에 연서가 작게 웃으며 화이트레이를 주시했다.

[크르르….]

동시에 화이트레이의 입을 타고 낮은 울음소리가 삐져나왔다.

그와 함께 화이트레이의 팔이 움찔거린 순간.

연서가 검을 다잡고 외쳤다.

“…온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저 주변의 핏자국과 흐려지는 시야로 꽤나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할 뿐.

아니 솔직히 그만큼 오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가지.

이제 슬슬 한계라는 것 뿐.

연서가 비틀거리며 검을 들었다.

-파르르.

허나 이미 무리라는 걸 보여주듯 그녀의 검 끝이 흔들렸다.

동시에 그 앞에는 여전히 화이트레이가 굳건히 서있었다.

그런 화이트레이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보였다.

무지(無知)가 불러온 결과였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화이트레이를 상대해 본 게 이번이 처음.

그만큼 방어도, 공격도 모든 게 전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망할….”

연서가 입술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토벌까지는 무리더라도 대치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예상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화이트레이가 발을 찍어만 내려도 다른 길드원들은 무기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팔을 휘두르면 날카로운 바람이 검기처럼 쏘아졌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검기를 칼로 막아내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공포심이고 자시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기본적인 전력차이가 너무 심했다.

“하아…하아….”

연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자꾸 피가 흘러내려 한쪽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시야 너머 보이는 것은 오직 쓰러진 길드원들 뿐이었다.

설원 위에 서있는 것은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진즉에 쓰러진지 오래.

그 모습에 연서가 낭패라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서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다를 게 없었다.

‘쓸모없어….’

버티기는 무슨.

제대로 된 유효타 하나도 먹이지 못했다.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지만 더 이상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설원이라는 지형 때문이었다.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데서 오는 체력소모가 상당히 심했다.

거기다 기존에 쓰던 그녀의 검술까지.

‘젠장, 하필 이럴 때 왜 그 자식이 했던 말이….’

검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간다.

오늘 현성이 했던 지적이자, 그녀의 언니 시연이 항상 지적하는 부분이었다.

이에 연서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까드득.

허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자신이 아니라 하시연이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처럼 한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짜증나.”

그리고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못 견딜 거 같았다.

그런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스페리아>의 등장인물, 하연서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

그것은 바로 특유의 자존감과 언니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니를 향한 동경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언니 시연을 동경했다.

시연의 태도를.

시연의 강함을.

시연의 검을 동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그곳에 다다를 수 없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서 가문의 요람에서 벗어나, 길드로 향했다.

이 방법이라면 시연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선천강에서 그녀가 활약했던 것처럼.

아카데미에서 그녀가 활약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화이트레이에게 이렇다 할 유효타 하나 먹이지 못하고 서있는 게 전부.

원망스러웠다. 그 누구도 아닌, 약해빠진 그녀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제기랄.”

연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화이트레이가 움직였다.

그런 그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스으으.

그와 함께 차가운 눈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에 연서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 하나 까딱거릴 수도 없이 힘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이에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이 툭 끊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서가 이를 악문 채, 화이트레이를 바라보았다.

“….”

오히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녀가 끊어져 내린 검을 다시 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연서가 검을 치켜들었다.

-덜덜덜.

자세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검 끝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눈은 흘러내린 피 덕분에 초점이 맞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차라리 마지막이라면 피하지 않고 맞서리.

이게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녀의 모습은 과거 시연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렇게 화이트레이가 팔을 휘두르기 직전.

“…끝이군.”

연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화이트레이가 팔을 휘두르며 날카로운 검기가 그녀를 향한 순간이었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그와 함께 작렬하는 커다란 폭발음.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연서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등을 타고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잘 버텼어.”

그 목소리에 연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유…현성?”

현성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연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언니나 동생이나 똑같다니까.”

“……?”

“크루페돈 때도 시연이 그랬거든.”

불의 악마 크루페돈을 상대할 당시.

하시연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현성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것처럼.

화이트레이를 앞두고 검을 든 연서의 모습은 하시연과 판박이었다.

“….”

그와 함께 불현 듯 연서의 머릿속을 타고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불의 둥지에서 그녀의 언니 시연과 함께 싸웠던 아카데미생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이름이 분명.

유현성.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흑발의 소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연서가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니가 그 유현성이야?”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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