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화이트레이 토벌전(1)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화이트레이의 둥지 가운데.
계속해서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 속.
-쿠웅!
그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이어 발을 디디고 있던 하얀 설원이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최전방에 서있던 1조의 리더, 엘다란의 이한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었다.
“그만! 전투종료.”
그의 말과 함께 마침내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눈보라가 잦아든 화이트레이의 둥지에는 그들만이 굳건히 두 다리를 내리고 있었다.
본래 둥지의 주인은 이마 한가운데에 대검이 꽂힌 채,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
이어서 청화의 화연이 쓰러진 화이트레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로봇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화연이 화이트 레이의 바이탈 사인을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목표대상 화이트레이의 생명정지를 확인.”
이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다른 모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드…성공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화연이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를 진행하면서 끝날 때까지 행동불능에 빠진 길드원은 단 한명도 없었다.
화이트레이 토벌은 그야말로 대성공!
모두 전략을 제대로 숙지했을 뿐만 아니라,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였다.
화연이 쓰러진 화이트레이와 기뻐하는 길드원들을 번갈아봤다.
‘…이 정도로 완벽한 레이드는 처음이었어.’
아마 앞으로도 이런 레이드는 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현성.
‘일단 길드원들은 모르겠지만….’
아마 화연 그녀를 포함한 베테랑 헌터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으레 레이드가 그렇듯, 다수가 움직이는 전투에서는 작은 꼬임이 큰 문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베테랑 헌터들은 공격에 집중하기보다는 길드원들을 통솔하는데 많은 신경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문제는 항상 발생한다.
이번 레이트 역시도 그랬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뻔 했다.
“만약 타이밍이 꼬일 때마다 현성이 바로잡지 않았으면 이번에도 그랬겠지….”
화연이 저 멀리 서있는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성은 레이드 내내 타이밍이 꼬일 때면 귀신같이 이를 바로잡았다.
덕분에 작은 꼬임이 큰 문제로 발생할 일은 없었으며, 이로 인해 베테랑 헌터들 역시 안정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거의 이 정도면 전략팀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
무예가 뛰어난 병사들이 있다고 언제나 전쟁을 이기는 게 아니듯, 개개인의 무력과 전장을 보는 시야는 별개였다.
괜히 책사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뛰어난 전략이 필요했다.
‘그리고 레이드 역시 마찬가지.’
뛰어난 헌터가 있다고 레이드를 성공하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흐름을 읽는 시야와 판단력.
여기서 놀랍게도 현성은 그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전선이 붕괴되기 직전에는 후퇴를, 반대로 공격에 들어갈 타이밍이면 과감하게 돌진.’
현성은 레이드 내내 이를 반복했다.
즉 세세한 오더는 각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이 했다고 한들, 큰 흐름은 전부 현성이 주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를 입증하듯 실제로 화이트레이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은 엘더란이었지만, 베테랑 헌터들은 전부 현성에게 몰려들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레이드를 쉽게 풀 수 있었어. 전장을 보는 시야가 제법이던걸? 이 정도면 우리 길드 전략팀에서도 혀를 내두르겠어.”
“아아, 맞아. 레이드 내내 꼬인 걸 다 풀어줘서 얼마나 편했던지.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아카데미? 아님 따로 배웠다던가?”
“자네, 듣자하니 아직 정식으로 청화에 입단한 게 아니라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 길드로 오는 건 어떤가?”
심지어는 즉석 길드입단제의까지.
그만큼 현성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그 장본인인 현성은 이런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듯 그저 멋쩍게 웃으며 질문을 흘려 넘기고 있었다.
“하하, 그건 아무래도 청화와 따로 이야기해보심이….”
이에 화연이 현성을 부르며 손짓했다.
“현성 군,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
곧 그런 화연의 말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다른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럼 잠시.”
그대로 현성이 무사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화연 옆에 도착한 현성이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빠져나왔네요.”
“에이, 고맙기는 뭘.”
화연이 씨익 웃으며 현성의 어깨를 툭 쳤다.
아무튼 그것도 잠시.
현성이 쓰러진 화이트레이를 쓰윽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꽤 크군요.”
당연하겠지만 현성 그가 실제로 화이트레이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그리고 그 느낌은 그야말로 <이스페리아>에서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에 화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확실히 이 정도크기면 평균치보다 좀 더 큰 거 같네.”
그러면서 화연이 화이트레이의 비늘을 매만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부산물도 꽤 나오겠는 걸?”
동시에 부산물이라는 말에 현성의 눈이 반짝였다.
현성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바로 무기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얻기 위해.
그리고 화이트레이 토벌을 성공한 지금. 재료는 이미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무기제작은 언제쯤….”
“급하기는.”
화연이 피식 웃으며 손을 퉁겼다.
-따악!
그러자 허공을 타고 정전기가 이는 것 같더니 곧 복잡한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포탈이 생성되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는 다름 아닌 화연 그녀만의 특수 스킬이자, 아공간인 ‘마이더스의 손’.
‘이걸 여기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굳이 말하자면 이는 현성의 인벤토리와도 비슷한 구조.
동시에 이게 바로 화연이 최고의 마이스터라고 인정받는 이유였다.
일명 걸어 다니는 공방.
‘괜히 업적란에 [황금의 거장 마이더스의 후예]가 있던 게 아니지,’
그녀는 특수스킬 ‘마이더스의 손’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공방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화연의 손을 따라 무언가 딸려 나왔다.
-스윽.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굵고, 길쭉한 형태의 봉.
마치 헬스장에서 보는 바벨바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현성은 한 눈에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이건….”
곧바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새 틀을 만들어두셨군요.”
바벨바처럼 생긴 그것은 바로 현성이 의뢰한 스태프.
그가 직접 설계도를 짠 만큼, 한 눈에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반짝이는 현성의 눈빛에 화연이 스태프를 내밀며 물었다.
“후후, 한 번 들어볼래?”
“물론이죠.”
곧 현성이 스태프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적당한 무게감과 손에 착 들어오는 그립감.
보통의 스태프치고는 너무 무거웠지만, 이는 오히려 현성이 딱 바라던 바였다.
‘이 무게와 그립감…역시 바벨바를 참고하길 잘 했어.’
당장에라도 근성장이 될 거 같은 이 느낌.
그대로 현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딱 좋네요. 그럼 완성까진 얼마나 걸리는 거죠?”
그 말에 화연이 화이트레이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뭐…재료는 다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도 가능하지.”
그러면서 그녀가 뒤에 펼쳐진 아공간을 가리켰다.
실제로 화연 그녀라면 무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게 분명했다.
거기다 설계도대로라면 기본 틀이 다 만들어진 이상, 핵심재료 몇 개만 추가하면 끝.
‘그리고 그 재료가 바로 화이트레이의 부산물이지.’
즉 무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화연은 그런 현성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재료분배만 하면 금방 만들 수 있어.”
“아, 재료분배라면….”
“응. 다른 길드랑 분배해야지.”
그러고 보니 그 절차가 있었다.
화연이 말한 재료분배란 전에 말했듯이, 레이드가 끝난 뒤 서로의 합의하에 부산물을 나누는 것.
곧바로 화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전에도 말했었지만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들 넘겨줄 거야. 게다가….”
그대로 화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이번에는 네 활약도 크니까 그걸 빌미로 좀 더 가져올 수 있겠지.”
“나쁘지 않네요.”
“좋아, 그럼 다른 길드 좀 불러줄래? 아무래도 빨리빨리 하는 게 좋잖아?”
“그렇죠. 뭐.”
그 말에 현성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연이 말한 대로 다른 길드의 헌터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각 길드의 베테랑 헌터들이 모이고.
본격적으로 재료분배가 시작되었다.
* * * * *
그 사이.
현성은 자리를 벗어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현성의 뒤에는 이미 화연을 포함한 베테랑 헌터들이 화이트레이의 사체를 둘러싸고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발톱은 우리 백화경에서 가져갔으면 좋겠군. 이번에 신입들에게 좋은 무기 하나 정도는 쥐어주고 싶어서 말이야.”
“이쪽은 피 정도면 충분해. 최근 포션 재료가 모자라서 말이지.”
그러던 중. 엘더란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심장은 엘더란에서 가져가도 되겠나? 사실상 마지막 일격을 넣은 것도 이쪽이고, 이 정도는 요구해도 될 거 같은데.”
화이트레이의 심장.
일명 프로즌하트라고 불리며, 냉기는 물론 용족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담겨있어 모두가 탐내는 재료 중 하나였다.
이에 화연이 턱을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글쎄. 그걸 다 가져가는 건 안 될 거 같은데. 나도 노리는 게 그거라서 말이야.”
“하지만 마지막 일격은 우리 엘더란에서….”
“전략은 누가 짰는지 까먹고 있었어? 거기다 타이밍이 꼬일 때마다 바로 잡은 게 누구였더라?”
그러면서 화연이 잠시 떨어진 곳에 서있는 현성을 흘깃 바라보았다.
화연인 노리는 재료는 화이트레이의 비늘과 심장.
그러자 엘더란의 한성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청화의 역할이 컸지.”
이번 레이드에서 마지막 일격을 먹인 것은 엘더란.
허나 화연의 전략이라거나, 방금 말한 대로 꼬인 타이밍을 붙잡은 건 청화길드의 현성.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겠다. 그럼 심장은 나누는 걸로 하지.”
결국 엘더란이 한 발자국 물러서고.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현성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대로 현성이 둥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뭐 나머지는 화연이 알아서 할 거 같으니…난 잠시 빠져있을까나.’
그렇게 현성이 화이트레이 둥지 주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하연서.
“…크흠!”
그대로 연서가 헛기침을 하며 그를 불렀다.
이에 현성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곧바로 가볍게 그녀를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아, 아니! 야! 잠깐만!”
동시에 연서가 황급히 현성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뭔데?”
“그, 그게….”
그런 현성의 물음에 연서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 쭈물거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할 말 없으면 간다.”
그와 동시에 연서가 휙 고개를 들더니, 재빠르게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외쳤다.
“너! 제법이더라!”
“….”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갑자기 왜 그런담.
그 순간, 연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전에는 미, 미안했다.”
이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했더니 그런 거였구만.
아무래도 첫 전투, 그러니까 화이트 스콜피온을 상대했을 때 있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알면 됐어. 그리고 제법은 무슨…운이 좋았지.”
“…운이 좋았다고?”
“그래.”
그대로 현성이 화이트레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실제로 이번 레이드는 현성 그의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풀렸다.
이는 <이스페리아>에서 화이트레이를 잡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파티구성원이 달라서 그런가.’
과거 그가 화이트레이를 잡았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무려 네임드길드와 함께한 레이드.
그래서 그런지 이번 레이드는 굉장히 깔끔했다.
폐급 파티원들이 없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뭐 결국은 좋은 게 좋은 거지….’
현성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꿀을 빨아보겠냐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현성이 죽은 화이트레이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보다 화이트레이가 산란기가 아니었다는 부분이 제일 운이 좋았지.”
“산란기? 그게 왜?”
그 말에 연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화이트레이는 산란기 때가 되면 난이도가 급상승하거든.”
“…무슨 이유라도 있어?”
“뭐 그런 게 있어.”
그대로 잠시 뒤.
현성이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쌓여있던 눈이 푹 주저앉으며 둥지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그 아래,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공간이 드러났다.
“뭐야? 거기 뭐라도 있어?”
이어서 연서가 그의 옆에서 고개를 내밀며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나뭇가지와 솜털 따위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그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알들.
“…알?”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화이트레이의 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대로 메시지를 확인하기 무섭게 현성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화이트레이의 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화이트레이의 산란기.’
그리고 이를 알아차린 찰나.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현성이 재빨리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연서가 주춤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제길.”
그와 함께 현성이 연서를 향해 외쳤다.
“너! 당장 다른 길드원들을 대피시켜!”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빨리!”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