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청화길드(3)
높게 솟아오른 유리빌딩.
그 겉으로는 태양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한국 최고의 길드라고 불리는 청화길드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쪽에 위치한 집무실.
“흐음, 좋아, 좋아….”
붉은 머리의 여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화연.
청화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유현성이라….”
화연이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자료에는 현성의 인적사항을 포함한 온갖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벌컥.
누군가 그녀의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에 화연이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그녀가 보고 있던 프로필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왔구나! 현….”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연의 눈이 빠르게 식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전담비서로 일명 김 비서로 불리는 자였다.
“쯧…김 비서잖아.”
화연이 대놓고 아쉬움을 표하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집무실에 들어온 비서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곧 그녀의 책상에 놓인 현성의 프로필을 발견하고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대접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이래 뵈도 저도 청화길드원인데요.”
허나 그렇게 말한다고 들어먹을 화연이 아니었다.
화연은 청화길드 내에서도 마이웨이 기질이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
심지어는 길드장의 말도 안 듣는다는 소문도 돌 정도.
곧 화연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됐고. 왜 왔는데.”
“….”
그 말에 김 비서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 하고 싶지만 화연은 청화길드의 부길드장.
직급도 직급이지만, 애초에 뭐라 말한다고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었다.
이에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서류뭉치를 가리켰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레이드 하나 잡힌 거 있잖습니까.”
“레이드?”
“왜 화이트레이 있지 않습니까.”
“…윽.”
그 말과 동시에 화연이 미간을 좁히며 움찔거렸다.
화이트레이.
일명 설산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보스몬스터로, 이번에 청화길드를 비롯한 여러 길드에서 레이드를 계획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화연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김 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다시 한 번 보여주며 물었다.
“아니 3개월 전부터 계속 이야기 했던 거 아닙니까. 그새 까먹으셨어요?”
이어서 김 비서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때 분명 화연님 입으로 ‘이번 일 까먹으면 내가 개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집무실 가득 흐르는 정적.
그대로 잠시 뒤.
화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월월.”
“….”
그와 동시에 김 비서가 그녀를 향해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녀의 행동.
이에 화연이 푸드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흐갹!”
그 와중에 화연이 두 손을 휘적거리며 김 비서를 향해 소리쳤다.
“야! 이거 월권행동이야!”
“요즘은 개가 말을 하는군요.”
“으아아악! 그만! 그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비서의 가차 없는 응징은 멈추지 않았다.
그에 따라 집무실에서는 계속해서 화연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청화길드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도 또….’라는 눈빛으로 집무실을 흘깃 쳐다보고 업무에 집중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
놀랍게도 이게 한국 최고의 길드라 불리는 청화길드의 일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당장 레이드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 인원구성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음….”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화연이 곧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까짓 거 정 안되면 그냥 나 혼자라도 가지. 뭐.”
“혼자 말입니까?”
“응,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아무리 다른 길드와 같이 진행한다고 해도 단 한명이라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김 비서는 안경을 고쳐 쓰며 태연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죠.”
아마 다른 길드에서도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청화길드의 부길드장, 화연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마이스터 계열의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인재.
그게 바로 진화연이었다.
“아무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데려갈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럼 너도 같이 갈래?”
“싫습니다.”
그런 화연의 말에 김 비서가 칼같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6시 이후로는 일 안합니다.”
김 비서. 그는 청화 길드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완벽한 일처리를 자랑하는 자이자, 동시에 단 한 번도 6시 칼퇴를 놓친 적 없는 여러모로 대단한 자였다.
이에 화연이 턱을 괴며 미간을 좁혔다.
“칫….”
“아. 그리고 오늘 오기로 했던 현성 학생 말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라는 말에 화연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대로 화연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뭔데? 뭔데? 언제 온데?”
그 모습에 김 비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모시는 화연이라는 사람이란 항상 이런 사람이었다.
한 번 꽂히는 게 생기면 당분간은 거기에 빠져 살았다.
‘뭐 그런 기질이 있기에 마이스터로서 성공할 수 있으셨던 거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이번에 꽂힌 것은 유현성이라는 아카데미 출신의 학생인 모양이었다.
길드장의 명령으로 스카우트를 하러갔던 이후.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분명…체술을 쓰는 마법사라고 했었나?’
확실히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해 보이는 학생이었다.
아무튼 방금 전 그 학생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 비서가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방금 도착했다는군요. 바로 만나시겠습니까?”
그 말에 화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김 비서의 안내를 받고 화연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성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쉬익!
현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화연이 불쑥 현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간만에 보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움 반, 기대 반이 섞여 있었다.
그 모습에 김 비서가 현성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사람인지라…다음부터는 단단히 주의하겠습니다.”
마치 산책 중 애완동물이 잘못하면 주인이 사과하는 것과 비슷한 말투.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대로 김 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연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그럴까요.”
화연의 말에 현성이 자리에 앉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김 비서가 의외라는 눈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화연의 텐션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태반.
그러나 현성은 오히려 태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화연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 순간.
현성은 그 작은 움찔거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있었다는 눈치.
‘…그 정도면 당황할 법도 한데 신기하네.’
왠지 화연이 주목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비서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화연이 알아서 할 터.
“그럼 두 분 편하게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응. 그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밖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말씀해주십쇼.”
김 비서의 말에 화연이 그녀를 가리키며 현성에게 말했다.
“들었지? 필요하면 마음대로 불러.”
“….”
이에 김 비서가 화연을 찌릿 째려보았다.
-움찔.
그 눈빛에 화연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런 화연의 모습에 김 비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방을 나섰다.
“그럼 전 이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 비서가 방을 나가고.
화연의 집무실에는 현성과 화연.
이렇게 단 둘만 남았다.
“자, 그럼….”
화연이 손을 비비며 눈을 반짝였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은 눈빛.
그와 함께 화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기의뢰 때문에 왔다고 했었지. 현성 군?”
그녀의 말에 현성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름 : 진화연]
성별 : 여성
나이 : 29
종족 : 인간
클래스 : 메카닉
업적 : [천재 공학자], [청화길드의 부길드장], [황금의 거장 마이더스의 후예]
이름 진화연. 메카닉 클래스의 청화길드의 부길드장.
<이스페리아>의 설정 그대로였다.
곧 상태 창을 확인한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현성 그가 청화길드에 온 것은 무기의뢰 때문.
그리고 화연 역시 사전에 그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대로 화연이 펜을 빙글 돌리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연락이 왔을 때는 당연히 길드가입과 관련한 말인 줄 알았지만 말이지.’
한 해에 청화길드에 가입하고 싶다는 신청서만 해도 수백, 수천 개였다.
그만큼 현성에게 연락이 온 것도 그런 줄 알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무기의뢰.
이에 화연이 현성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우리 청화의 무기의뢰는 꽤나 까다로운 거 알고 있지?”
무려 청화길드에 요청한 무기의뢰였다.
한 해에 수천의 가입요청을 받는 만큼, 청화의 무기의뢰는 그렇게 쉽게 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어서 화연이 팔짱을 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아직 아카데미 학생 아닌가? 그렇다면 무기는 딱히 필요 없을 텐데?”
그런 화연의 말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최근에 약간 고민이 생겨서 말입니다.”
“…고민?”
“네. 사실은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조언을 구하고 싶어 찾아온 것도 있습니다.”
그 말에 화연이 흥미로운 듯 미간을 좁혔다.
‘가만 있어봐라….’
화연이 처음 현성에게 명함을 준 목적은 길드의 스카우트와 관련해서였다.
동시에 그를 영입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개대련에서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현성이 유일했기 때문.
실제로 그녀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공개대련에서 보여준 활약.
그 모습대로라면 훗날 성장이 기대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만약 그런 현성을 청화에서 영입한다면?
청화에게 있어 이건 놓칠 수 없는 찬스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난 현성은 무기의뢰 때문에 왔다고는 했지만, 고민이 있다면 약간 말이 달라졌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꼬드길 수 있겠는데?’
벌써 화연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보란 듯이 현성의 고민을 해결한 뒤.
‘청화라면 언제든지 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라는 멋들어진 대사를 날려주며 그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은.
‘그러니 우리 청화에 들어와라.’
동시에 화연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 이거지!’
하지만 그도 잠시.
화연이 애써 흥분을 감추고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언이라…근데 청화길드의 부길드장의 조언은 생각보다 꽤 비쌀 텐데 괜찮아?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 난 아무한테나 무기 안 만들어줘.”
무릇 이런 상황에서는 약간의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법.
그러니까 한마디로 구미가 당길만한 패를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연이 원하는 것은 공개대련 때와 같은 그의 모습.
“그렇군요. 그럼….”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어떤 모습을 보여드리면 될까요?”
그런 현성의 말에 화연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호오? 이 녀석 봐라?’
보통 눈치가 빠른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화연도 망설일 필요 없었다.
그대로 화연이 들고 있던 볼펜으로 현성의 프로필이 적힌 서류를 탁 찍으며 말했다.
“그럼 개인적으로 간단한 테스트를 진행해봤으면 좋겠는데 어때?”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