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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96화 (96/240)

096화 청화길드(1)

아카데미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한적한 길거리.

그러니까 처음 피의 왕국에서 현성과 레이첼 둘을 마중하러 나왔던 곳.

그곳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동시에 세라가 직접 세단의 문을 열어주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에 곧 현성과 레이첼이 차에서 내렸다.

그대로 세라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또 당분간은 못 보는 건가요?”

그 말에 레이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지.”

“그렇군요….”

세라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세라가 레이첼과 그녀의 옆에 있던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피의 왕국을 떠날 때 봤듯이.

레이첼이 계속 아카데미에 다니겠다는 것은 분명 그녀의 선택이었다.

물론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에는 여러 요소가 있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현성과 레이첼을 지켜봐왔던 그녀라면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레이첼 그녀가 피의 왕국을 떠나 아카데미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세라가 아무 말 없이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역시 레이첼님은 현성님을….’

처음에는 단순한 변심인줄 알았다.

인간과 교제한다니.

그게 아니면 현성이라는 인간이 약점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진심이었다.

그만큼 피의 왕국을 떠나기 전, 보여준 레이첼의 미소는 지금껏 세라가 본 그녀의 미소 중 가장 해맑았다.

‘…결국 피의 왕국을 떠나고, 아카데미를 택한 것은 온전히 레이첼님의 선택.’

그리고 레이첼을 모시는 자로서, 진정으로 그녀를 아낀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야함이 마땅했다.

아마 다른 뱀파이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순간.

이미 결정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마음은 잠시 묻어두는 게 맞았다.

그대로 세라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아가씨. 다음에 뵙겠습니다. 혹시라도 중간에 저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성님?”

세라가 현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저희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현성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

그만큼 그동안 현성이 보여준 모습들은 뱀파이어들의 인식을 바꿔두기에는 충분했다.

레이첼을 구해낸 거부터 알케르도를 상대로 승리한 모습까지.

다른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성 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 있을 때라면 아가씨는 유독 즐거워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 이만 저희는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작별의 시간.

세라의 말에 직감적으로 이를 알아차린 레이첼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응, 조심히 들어가.”

더 이상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세라가 마지막 인사를 올리며 등을 돌렸다.

곧 그녀가 차에 올라타고, 세단이 출발했다.

그대로 레이첼이 한참동안 멀어지는 세단은 바라보았다.

“….”

그렇게 검은 세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도 갈까?”

그런 레이첼의 말에 뒤에 있던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러면서 현성이 그녀를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다시 아카데미에 다닐 거면 바빠지겠네?”

“…왜?”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야 퇴학안당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그와 동시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윽.”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다.

그전까지는 성적이고 강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계속해서 아카데미를 다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성적관리가 필요했다.

“아마 지금 너 정도면….”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레이첼은 아카데미를 다니며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을 한 게 전부.

그렇다면 구태여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퇴학위기네.”

“아, 아니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 확실해.”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현성 역시 퇴학위기에 처했던 학생.

그만큼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그였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긴. 열심히 강의 들어야지.”

“젠장….”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넌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메꿀 수 있을 거야.”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레이첼이 약간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저, 정말?”

“이상한 짓만 안한다면?”

“이상한 짓이라니 난 그런 거 한적 없….”

이에 현성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몰래 던전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길을 잃어 일주일간 던전 속에서 표류했다거나.”

“…?!”

현성의 말과 함께 레이첼의 미간이 멈칫거렸다.

“그게 아니면 정보를 얻기 위해 교수들의 실험실에 들어갔다가, 발동한 경비시스템에 공격받아 결국 창문으로 탈출했다거나.”

“아, 아니 그건…!”

“도서관에서 특수마도서가 보관된 서재까지 뒤지다가 갑자기 책이 쏟아지며 그대로 기절한 적도 있다고 했지?”

그렇다.

지금 이 말은 전부 과거 레이첼이 아카데미에서 정령왕의 술잔을 찾겠답시고 난리치다가 벌어진 일들.

정말이지 다시 말해도 가관이었다.

그리고 레이첼 역시 그 사실을 아는 만큼 꼼짝없이 드러난 자신의 흑역사에 몸을 뒤틀었다.

그런 그녀의 귀는 어느새 빨개져있었다.

“그, 그렇게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재미있다는 듯 조소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처럼 불의 둥지에서 난리를 일으킨다거나 그런 짓만 하지 말라는 거지.”

아직도 불의 둥지에서 터졌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내가 크루페돈을 쓰러트렸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기껏 튜토리얼에서 살렸던 유하린은 물론 하시연까지 사망.

즉 꼼짝없이 베드엔딩.

하마터면 그동안 굴렀던 노력이 한 순간에 사라질 뻔 했다.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물론 이제는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했으니 이런 일은 없겠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알겠지?”

“알겠다니까….”

레이첼이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꿍얼거렸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고. 가서 철의 권7이나 한 판 할래?”

레이첼도 놀렸겠다.

현성이 후련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스토리 전개상 레이첼 에피소드가 끝난 뒤로는 별일이 없으니 당분간은 쉴 수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야.’

당장에라도 쉴 생각에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몰랐다.

곧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쳐올지.

“아. 그런데 방금 전 했던 말은 뭐야?”

“…뭐?”

“아니 불의 둥지에서 난리를 일으켰다는 말 있잖아.”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그 말에 현성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긴 뭐야. 그거 니가 한 거라며.”

현성이 그녀를 가리키며 입을 떼었다.

“…너 분명 그때 불의 둥지에서의 혼란을 틈타 교장실 뒤지려다가 문 잠겨서 아무것도 못했다며?”

지금만 해도 똑똑히 기억한다.

레이첼이 정령왕의 술잔을 찾겠답시고 한 뻘짓거리 중 하나.

그게 바로 방금 현성이 말한 말이었다.

‘기껏 교장실까지 갔더니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갔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그건 맞긴 한데….”

그러나 그 다음 돌아온 레이첼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그거랑 별개로 난 불의 둥지에서 아무것도 안했어.”

“…잠깐. 뭐라고?”

“그냥 가만히 짱 박혀있었는데 갑자기 불의 둥지에서 난리 났더라? 그래서 그 틈에 빠져나와서 교장실로 갔지. 근데 하필 문이 잠겨있더라?”

그대로 레이첼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만약에 문이 안 잠겨있었으면 뭐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그랬으면 내가 니 도움 없이도 정령왕의 술잔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걸?”

레이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천천히 굳어가는 그의 표정.

“…응?”

그러자 레이첼이 그런 현성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그렇게 심각해?”

“….”

“너 설마 그거가지고 삐졌어? 에이, 뭐 그거 가지고 삐지냐?”

레이첼이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아니 애초에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이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 방금 한 말 확실해?”

현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에 레이첼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래?”

“불의 둥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 맞아?”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의 어깨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대답해줘.”

“….”

그와 함께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

거기다 작은 떨림이 느껴지는 손.

-꾸국!

그런 현성의 손을 타고 그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구기며 움찔거렸다.

“읏!”

곧바로 그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현성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미안. 괜찮아?”

그 말에 레이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은데…너야말로 괜찮은 거 맞아?”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현성의 모습이었다.

골렘을 상대할 때도, 가고일과 웨어울프의 습격이 있을 때도.

심지어 알케르도를 상대할 때도 현성은 항상 태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무슨 일에도 놀라지 않았던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나는 불의 둥지에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그건 확실해.”

“그렇다면….”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어느새 아카데미 앞에 도착했다.

이에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말했다.

“현성. 도착했는데….”

그러자 생각에 잠겨있던 현성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뒤.

그가 레이첼은 향해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첼, 아무래도 급한 일이 생겨서 철의 권7은 다음에 해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

“나야 상관없지만…무슨 일인데 그래?”

레이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대답했다.

“다 정리되면 말해줄게. 미안, 다음번에 내가 카라멜 마끼아또라도 사줄게.”

그대로 현성이 급하게 자리를 떴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 그의 기숙사 방 안.

“…제기랄.”

현성이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언제나 그랬듯, 현성이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불의 둥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제 와서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다음과도 같았다.

‘불의 둥지에서 크루페돈을 깨운 것은 레이첼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이스페리아>의 전개상, 크루페돈을 깨우는 것은 바로 레이첼.

그런데 그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

현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정해져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스페리아>의 전개가 바뀌고 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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