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휴먼 라이트닝(10)
“…윽.”
그대로 현성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밀었다.
“자, 됐지?”
그러나 레이첼은 그저 그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레이첼의 모습에 현성이 물었다.
“…왜 그러는데.”
그러자 레이첼이 현성의 팔을 내리며 단호하게 목덜미를 가리켰다.
“목.”
“…뭐?”
“목이 더 좋아.”
그러니까 팔이 아닌 목덜미를 물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
그 말에 현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쎄. 채혈도 팔로 하는데 흡혈도 팔로 해보는 건 어때?”
허나 레이첼은 단호했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
“….”
“그러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첼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뒤. 현성 바로 앞에선 레이첼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털썩.
곧바로 레이첼이 현성의 무릎위에 앉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알았지?”
그런 레이첼의 행동에 현성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야말로 현성이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덕분에 둘은 서로 마주앉은 꼴이 되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오해는 무슨.”
그대로 현성과 레이첼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적극적이었을까?”
현성이 자신의 무릎위에 마주앉은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불과 임플의 집무실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레이첼은 그 좁은 공간에 있던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변한 태도.
이에 레이첼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극적이라니 난 잘 모르겠네?”
곧 레이첼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난 그저 흡혈하기에 편한 자세를 찾은 것뿐인데?”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빨갛게 보였다.
이에 현성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예상가는 거라고는…그거밖에 없구만.’
임플의 집무실에서 발생한 이벤트로 인해 상승한 호감도.
여기다 레드 룸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그의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창.
그 둘이 얽혀 이런 상황이 된 거 같았다.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도 히로인의 호감도가 특정 수치 이상 높아지면 이렇게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처럼 적극적인 레이첼같이 말이지.’
이른바 갭모에의 일종.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현성은 별 수 없었다.
딱히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곧 현성이 마주앉은 레이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신 이번에는 저번처럼 무턱대고 하진 말아줘.”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양 팔을 그의 어깨에 올리며 대답했다.
“노력은 해볼게.”
“하여간….”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대로 현성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첼이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콰악.
그러자 곧 따끔거리는 감각과 함께 현성의 목덜미를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레이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밀착하며 본격적으로 현성의 피를 빨기 시작했다.
고요한 레이첼의 방 안.
-꿀꺽, 꿀꺽.
레이첼의 피를 마시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처음 먹었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 현성 그의 피는 남달랐다.
농후한 혈향과 짙은 농도, 거기다 느껴지는 맑은 마력은 어떠한가.
깔끔한 목 넘김을 자랑하는 현성의 피는 그야말로 한 번 먹으면 쉽사리 멈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이 느낌.
레이첼은 현성의 피에서 느껴지는 그 따뜻함이 너무 좋았다.
‘…기분 좋아.’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느껴지는 행복과 풍요로움.
지금 이 시간은 레이첼에게 있어 그야말로 힐링 그 자체였다.
누구에게는 킬링일 수 있었으나, 우선 그녀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힐링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그리고 레이첼이 점점 그의 피를 탐닉할수록 현성의 눈앞으로는 계속해서 메시지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레이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레이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레이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에 현성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호감도가 쭉쭉 오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벤트는 흔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지금 현성은 만족 그 자체.
[캐릭터의 체력이 9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8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7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와 반비례하여 현성의 체력도 쭉쭉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 호감도 상승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호감도 작 개꿀.’
그대로 힐링과 킬링의 기묘한 조합이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의 체력이 50퍼센트 정도 남았을 때.
마침내 레이첼이 천천히 그의 목덜미에서 입을 떼었다.
“하아….”
레이첼이 그동안 참아왔던 호흡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현성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적당히 멈췄지?”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잘 멈췄네.”
이어서 현성이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니 가져다대기 직전.
순간 레이첼이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의 목덜미를 핥았다.
마저 남은 피가 있던 모양이었다.
동시에 목덜미를 타고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현성이 움찔거렸다.
“잠시만 너….”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야지.”
레이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퍽이나.”
“덕분에 잘 먹었어.”
레이첼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훔치며 그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그 다음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작별이네.”
전에 말했던 대로 레이첼은 피의 왕국에 남고.
현성은 다시 아카데미로 떠날 예정.
“흐음.”
그 말에 현성이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뭐야, 그 미소는?”
그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럼 이제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다.”
“지금 가게?”
“그러려고. 어차피 금방이잖아.”
그러면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방금 전 미소의 의미는 나중이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대로 그가 레이첼의 방을 나서며 말했다.
“넌 여기 남는다고 했지?”
“…그렇지.”
“그럼 가볼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문을 닫았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방 안.
조용히 현성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예의상 한 번쯤은 잡아줄 수 있는 거 아니냐구.”
그런 레이첼은 어딘가 시무룩해보였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은 흘러 어느새 현성이 피의 왕국을 떠날 시간이 왔다.
이에 세라와 루이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물론, 임플과 란트까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당연히 레이첼도 있었다.
“준비는 다 됐어?”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다 했어.”
“…그래?”
레이첼이 잠시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잘 가.”
그러자 미리 준비된 검은 세단 옆에 서있던 루이가 기다렸다는 듯 뒷문을 열었다.
“그럼 현성님. 타시죠.”
“아. 고마워요.”
그대로 현성이 세단을 향해 걸어가고.
그가 차에 오르기 직전.
돌연 현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현성님?”
그런 현성의 행동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만요.”
이어서 현성이 임플과 란트 사이에 서있는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뭔가 망설이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
이에 그녀의 옆에 서있던 란트가 입을 떼었다.
“…레이첼.”
“네?”
갑작스런 란트의 물음.
레이첼이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카데미. 정말 안가도 되겠니?”
“갑자기 그게 무슨….”
“난 개인적으로 이번 기회에 밖에 나가 더 배우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지금껏 특유의 안목으로 이 자리에 올라온 게 바로 란트이다.
그만큼 그녀의 눈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 말에 레이첼이 주먹을 꼬옥 쥐었다.
“….”
란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아이, 레이첼이 피의 왕국에 남을지, 아니면 현성을 따라 아카데미에 갈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란트가 몸을 숙여 레이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딸. 조금은 솔직해지는 게 어떨까.”
이에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란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란트가 현성과 레이첼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놓치기 싫은 게 있으면 붙잡아야지.”
그 말에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동시에 줄곧 옆에 서있던 임플이 뒤늦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했다.
곧바로 그가 란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당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글쎄요. 뭘까요. 호호.”
“…아니지? 레이첼?”
임플이 황급히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첼 너 설마 저 뺀질이 같은 녀석을 따라….”
“호호호.”
그러자 란트가 재빨리 임플의 입을 막으며 그를 저지했다.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빠른 손놀림.
그대로 능숙하게 임플의 입을 틀어막은 란트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도 참…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아니 잠깐…읍읍! 읍!”
임플이 란트의 포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미 레이첼의 시선은 현성을 향해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를 따라 아카데미로 가고 싶었다.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했을 때부터 아카데미를 더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현성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현성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만약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첼은 자꾸만 그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 애초에 현성도 같이 가고 싶었다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그 생각에 레이첼이 쉽사리 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처억.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손을 뻗으며 피식 웃었다.
“…뭐해? 이쪽으로 안 오고.”
마지막 현성의 말.
이에 레이첼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얼굴을 타고 천천히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레이첼이 앞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은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