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휴먼 라이트닝(4)
왕국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
그 아래로는 현성과 레이첼이 때 아닌 등산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봉오리에 도착한 현성이 숨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 말에 뒤 따라 오던 레이첼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에서는 잔뜩 먹구름이 낀 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거기다 드문드문 보이는 천둥 번개까지.
-쿠르릉!
그야말로 최악의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마치 화창한 날씨에 등산을 온 부장님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저 멀리 번쩍이는 천둥 번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 등산하기 딱 좋은 날씨구만.”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혀를 찼다.
“…쯧.”
만약 주말에 억지로 산에 끌려온 사원이 있다면, 지금 레이첼과 비슷한 표정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슬슬 여기까지 온 이유 정도는 말해주지?”
그대로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였다.
조금 전 임플의 집무실에서 제르우스의 검을 획득한 현성은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이곳으로 왔다.
그래서 우선 현성을 따라오기는 했으나, 도대체 왜 멀쩡한 실내를 놔두고 굳이 이런 악천후에 여기까지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현성이 줄곧 들고 있던 제르우스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이걸 써야지.”
“….”
그 말에 레이첼이 물끄러미 그의 손에 들린 검, 아니 검이라고 주장하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였다.
날 부분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사람은커녕 종이라도 자를 수 있나 싶었다.
그나마 그 활용도를 찾자면 지팡이로 쓸 수는 있어보였다.
그런데 저 지팡이를 쓰겠답시고 번개 치는 날에 산 위로 올라오다니.
그야말로 정신 나간 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
‘사실 그동안 해온 짓거리를 보면 확실히 미친놈 같긴 하지만….’
레이첼이 여태껏 현성의 업적(?)을 곱씹으며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생각하면 절로 토가 쏠릴 지경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에게는 알 수 없는 묘한 믿음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항상 결과 하나만큼은 좋았단 말이지.’
시작은 미친 짓이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
이것이 레이첼 그녀가 현성을 따라다니면서 직접 봐온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미심쩍지만 일단 현성을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검을 가볍게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이 검의 이름은 제르우스의 검. 보기에는 이래도 뇌조의 힘이 깃들어 있는 아티팩트야.”
“아티팩트?”
그 소리에 레이첼이 눈을 좁혔다.
아티팩트라면 보통 마법적인 효과 혹은 그에 준하는 힘이 깃든 물건을 말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저 낡은 지팡이같이 생긴 게 아티팩트라면 그 역시 그만한 힘이 깃들어 있을 터.
“…그런 게 우리 아빠의 방에 있었단 말이야?”
“그렇지.”
“넌 그걸 또 훔쳐온 거고?”
그 말에 현성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훔쳤다니. 잠시 빌린 거지.”
“퍽이나.”
레이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지만 뭐 지금 와서 그걸 왜 훔쳐왔느니 뭐니 따질 생각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레드 룸에서 승리하는 것.
만약 패배한다면 귀족파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 그녀는 꼼짝없이 알케르도와 약혼해야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겨우 이빨 빠진 검을 훔쳐온 것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레드 룸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저런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임플에게 말해서라도 가져왔을 터.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과 제르우스의 검을 번갈아보았다.
‘…아무튼 제르우스인지 뭔지 하는 저게 아티팩트라고?’
레이첼이 유심히 검을 살폈다.
분명 그녀의 아빠, 그러니까 임플의 취미가 오래된 예술품이나 무기를 모으는 것만큼 그 중에는 아티팩트 한 두 개 쯤 섞여있는 건 딱히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저건 뭐랄까.
아무리 봐도 대단한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설마 보기에는 구려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힘이 담긴 그런 설정이야?”
왜 흔히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창작물에서 자주 나오지 않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없는 무기지만, 실상은 용사의 힘이 깃들어 있다거나 하는 그런 무기들 말이다.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설을 너무 많이 본거 아니야?”
“뭐? 그렇다면….”
“응, 이건 그냥 못써먹는 검이야.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아티팩트지”
애초에 아이템 설명에서부터 대놓고 못을 박아뒀다.
무기로는 못써먹는다고.
“하지만 대신….”
제르우스의 검에는 숨겨진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개를 불러들일 수 있어.”
“…뭐?”
“좀 더 정확히는 번개를 맞을 확률을 높여준다는 거지.”
그리고 현성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
동시에 레이첼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 효과가 그냥 피뢰침이라고?”
“그냥 피뢰침이 아니야. 성능 좋은 피뢰침이지.”
그 말에 레이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너 설마 계속 일기예보를 확인했던 게….”
그제야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줄곧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것부터 굳이 이런 날에 산을 오르던 것까지.
레이첼이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게 전부 번개 하나 맞아보겠다고 했던 거라고?”
“정답.”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넌 뱀파이어 아냐?”
그 말에 레이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뱀파이어는 하느님 찾으면 안 되냐.”
“….”
“아니 잠깐.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과 검을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검을 이용해서 번개를 맞겠다고?”
“정확해.”
당당한 현성의 대답.
이에 레이첼이 들고 있던 우산을 현성에게 휘두르며 말했다.
“에라이, 미친놈아.”
그러자 현성이 뒤로 살짝 피하며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할 만 하다니까. 설마 내가 미쳤다고 그냥 번개를 맞겠냐.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지.”
“…뒤질 생각?”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몸을 풀었다.
“일단 보기나 해봐.”
“미리 말하지만 난 오늘 시체 치울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아. 예.”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간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제르오스의 검을 박아 넣었다.
-콰악!
확실히 지금 상황만 본다면 미친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알케르도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현성의 검 손잡이에 양 손을 올렸다.
“…그럼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천천히 검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번개가 번쩍였다.
이어서 현성이 옆에 있던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우산도 내려놓는 걸 추천할게.”
“…왜?”
“자칫하면 우산이 피뢰침 역할을 해서 너까지 같이 맞을지도 모르거든.”
이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재빨리 우산을 접고는 저 멀리 집어던졌다.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었다.
“…넌 정말 괜찮겠어?”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말이지.”
이곳이 현성 그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라면 문제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성이라고 한들 맨 정신으로 벼락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술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나.”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 와중에 저 멀리서 치던 번개는 점점 그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번개는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성 그의 바로 옆까지 번개가 떨어졌다.
이어서 제르오스의 검 주변을 타고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파지직.
검 주변에 튀어 오르는 스파크.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제 곧 큰 게 온다.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스파크가 일기 무섭게 지금껏 본 적 없는 커다란 번개가 내려쳤다.
-콰르릉!!
그대로 정확히 현성이 있는 곳을 타고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사방에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 폭발했다.
그 모습에 현성을 지켜보던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그런 레이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커다란 낙뢰였다.
그만큼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잠시 뒤.
번개가 잦아들며 낙뢰가 강타한 주변이 보였다.
바닥은 훤히 속살을 드러냈으며, 풀들은 번개에 불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렇다면 현성은?’
레이첼이 검이 꽂혀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현성이 제르오스의 검을 붙잡은 채 서있었다.
아니 사실 서있다기보다는 검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고 있다는 게 옳을 정도.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살아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향해 뛰어갔다.
“너 괜찮아?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
그 순간이었다.
레이첼의 바로 눈앞.
수십 개의 뇌전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현성을 집어삼켰다.
“아….”
레이첼의 입을 타고 짧은 단발마가 삐져나왔다.
차마 뭘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레이첼이 외쳤다.
“현성!!”
* * * * *
첫 번째 뇌전을 맞았을 당시.
마치 섬광탄을 터트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찌릿찌릿한 격통.
-으드득!
이에 현성이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
<이스페리아>의 설정대로라면 그는 죽지 않았다.
실제로 설정 상 그랬다.
일정확률로 낙뢰를 맞을 경우.
플레이어는 체력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와는 상관없이 체력 단 1을 남기고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그 설정은 지금 역시도 유효했다.
온 몸을 타고 느껴지는 격통, 그 사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낙뢰를 맞았습니다.]
[업적 획득 : 지나가다 벼락을 맞은]
[캐릭터의 hp가 1 남았습니다.]
그 메시지에 현성이 비틀거리며 히죽 웃었다.
역시 <이스페리아>의 설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아직 한 가지 관문이 더 남았다.
진짜는 두 번째 뇌전.
이에 현성이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3…2…1…’
그와 동시에 두 번째 뇌전이 내려치기 직전.
‘지금…!’
돌연 현성이 위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대로 내리꽂히는 뇌전 사이.
희미하게 레이첼이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