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휴먼 라이트닝(3)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이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의 간격, 템포, 소리.
분명히 그녀의 아버지, 임플의 발소리였다.
그리고 레이첼이 임플의 발소리를 이리도 정확히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매일 새벽마다 몰래 핸드폰을 하며 단련(?)된 귀.
거기다 뱀파이어 특유의 뛰어난 기감까지 합쳐져 그녀는 발소리만으로도 임플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필 타이밍이….’
동시에 레이첼이 재빨리 현성을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을 들킨다면 골치 아파질게 분명했다.
단순히 방에 멋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현성과 같이 있다?
이건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레이첼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나가면 분명 임플과 마주칠게 분명했다.
게다가 방에는 숨을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문 말고 밖으로 빠져나가야하는데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
레이첼이 빤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뛰, 뛰어내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이성을 되찾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 임플의 방은 저택의 최상층. 그리고 여기서 떨어지는 건 미친 짓이 분명했다.
“그, 그럼….”
그대로 레이첼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 현성은?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현성은 서재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야!”
그 모습에 레이첼이 황급하게 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말 못 들었어?! 아빠 온다고!”
레이첼의 말에 서재를 뒤적거리던 현성이 멈칫거렸다.
이어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 설마 이제야 안거야?”
“….”
그대로 현성이 문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쯧.”
현성이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너 지금 뭐해?”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도 모자를 판에 서재를 뒤지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에 레이첼이 반쯤 체념한 순간이었다.
“찾았다.”
현성이 말했다.
“…뭐?”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현성이 책 한 권에 손을 올린 채 히죽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찾았다는….”
동시에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성이 책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이었다.
서재를 타고 뭔가 맞물리는 소리와 삐져나왔다.
-철컥!
그와 함께 서재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아니 열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스르륵.
그대로 갈라진 서재 뒤에는 딱 캐비넷 정도의 좁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의 옆에 서있던 레이첼이 멍하니 그와 서재를 번갈아봤다.
“…흐에?”
곧바로 현성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뭐해? 빨리 안 들어오고.”
“거, 거길 들어오라고?”
“들키면 큰일 난다며.”
그 말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레이첼이 재빨리 현성의 손을 잡았다.
딱 봐도 두 명이 들어가기에는 비좁아보였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잡기 무섭게 다시 서재가 닫혔다.
그 후로 잠시 뒤.
-철컥.
문이 열리며 임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
이에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방으로 들어온 임플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숨은 서재를 지나쳐갔다.
만약 여기서 임플에게 들킨다면 당연히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다.
레이첼과 임플의 방에 들어온다고 해도, 임플에게 들킬 경우 기회는 그대로 물 건너간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략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다시피 임플의 서재 뒤에 있는 숨겨진 공간을 활용하는 것.
서재에 꽂혀있는 특정 책을 당길 경우, 서재가 열리며 플레이어는 레이첼과 함께 이곳에 숨어 임플의 눈을 피한다.
이게 바로 임플의 방 공략법이었다.
현성이 줄곧 서재를 뒤지던 것 역시 바로 이 때문.
덕분에 현성과 레이첼은 임플의 눈을 피해 성공적으로 숨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임플이 다시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
이에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불편해도 나갈 때까지만 참아줘.”
“…응.”
그 말에 레이첼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책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현성이 임플을 주시하며 그가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 현재 레이첼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 그 자체였다.
두 명이 겨우 들어갈 좁은 공간에 몸을 맞대고 있다니.
거기다 온 몸을 타고 전해지는 현성의 체온.
여태껏 이만한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레이첼의 머릿속은 실시간으로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개를 좀만 올리면 바로 보이는 현성의 목덜미.
그와 함께 애써 참아왔던 흡혈의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성이고 자시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목덜미에 그때 달콤했던 목 넘김만이 서서히 레이첼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
이에 레이첼이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밀착한 채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대로.
-할짝.
현성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자신의 목을 타고 느껴지는 감촉에 흠칫거렸다.
“레이첼, 너 지금 무슨….”
“조금만…조금만 부탁할게.”
“너 지금 내 말 들려?”
“…시끄러워.”
레이첼은 현성의 말을 무시하고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에 현성이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레이첼은 좀 더 안쪽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미 안 들리나보군.”
그리고 머지않아 현성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그거밖에 없지.’
이번 공략은 여태껏 <이스페리아>의 전개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축에 속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기존의 전개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
그렇다. 말하자면 이번 씬은 서비스씬의 일종이었다.
주로 애니메이션에서 등굣길에 여주와 남주가 부딪힌다거나, 방과 후에 단둘이 남는다거나 하는 흔하디흔한 클리셰.
지금 이 상황 역시 그 클리셰의 일종이었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문제는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이스페리아>의 보스이자 히로인.
그리고 그 동안 현성이 그녀를 도우면서 레이첼은 보스가 아닌, 히로인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클리셰에 따라 설정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이첼을 떨쳐내기도 애매했다.
서비스씬은 히로인의 호감도를 올려주는 이벤트.
만약 여기서 레이첼을 떨쳐낸다면 오히려 호감도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여기서 호감도의 하락은 손해 중의 손해.’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히로인의 호감도는 필수.
그렇다면 결국 현성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목덜미를 타고 날카로운 감촉이 느껴졌다.
“씁.”
레이첼의 송곳니가 스친 모양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되도록 이빨은 세우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레이첼은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목덜미를 작게 깨물었다.
이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벤트 씬만 끝나봐라. 넌 바로 흑역사 적립이다.’
그러면서 현성이 고개를 돌려 바깥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제 슬슬 임플이 일어날 차례.
즉 서비스 씬이 끝날 타이밍이었다.
-처억.
머지않아 현성의 예상대로 임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임플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혔다.
-철컥.
그렇게 방 안에 있는 것은 오직 현성과 레이첼 뿐.
동시에 현성이 재빨리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서재가 열렸다.
“후우….”
곧바로 현성이 밖으로 나오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걸로 서비스씬은 끝.
이에 현성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
이어서 밖으로 나온 레이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고 움찔거렸다.
-화아악!
레이첼이 얼굴이 지금껏 본 적 없던 만큼 빨갛게 물들었다.
방금 전 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고개를 돌리며 말을 더듬었다.
“미, 미안!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런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이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레이첼과 플레이어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호감도의 상승을 알려주는 메시지.
이에 현성이 작게 웃었다.
무엇보다 우호적인 관계로 변했음을 뜻하는 메시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중요했다.
본 메시지는 레이첼이 일정 호감도를 채워 역할이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레이첼이 보스로 변하는 분기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덕분에 레이첼을 보스로 상대해야하는 선택지는 고민 안 해도 되겠군.’
이걸로 <이스페리아> 2막의 보스는 스킵.
해피엔딩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곧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진짜?”
“대신 다음번에는 이빨은 세우지 말았으면 좋겠어. 약간 아프더라.”
그 말에 레이첼이 얼굴을 붉히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내 의지가 아니었다니까….”
굳이 말하자면 방금 전은 레이첼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클리셰에 따른 일종의 시스템.
이른바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만큼 레이첼의 반응 역시 충분히 이해되었다.
뭐 어찌되었든 호감도가 올랐으며 임플에게 들키는 것도 넘어갔겠다.
이 정도면 만족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작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본 목표를 이룰 때였다.
그것은 바로 임플의 방에서 획득하려던 아이템.
이어서 현성이 발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방금 전 들어간 서재의 비밀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 구석에는 붕대에 쌓여진 길쭉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상당히 낡아 보이는 하나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이첼이 현성과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보았다.
처음부터 굳이 부모님의 방을 오자고 하더니 서재의 비밀공간까지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런 임플의 등장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던 그의 태도.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답.”
이게 바로 현성이 그토록 원하던 목표.
제르우스의 검이었다.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으로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제르우스의 검]
[등급 : 레어]
설명 : 과거 하늘과 맞닿은 산맥을 지배하던 뇌조(雷鳥) 제르우스의 뼈와 깃털을 제련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검. 그러나 너무 오래된 탓에 무기로서의 성능은 사라진지 오래다. 혹시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있을지도?
눈앞에 떠오른 아이템 설명 창에 현성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니가 들고 있는 게 뭔데?”
“제르우스의 검. 너 전에 나보고 레드 룸에서 이길 자신 있냐고 했지?”
“….”
곧바로 현성이 검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자신 있어.”
“…그걸로?”
현성의 당당한 대답에 레이첼이 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물론 저런 반응도 이해된다.
그야 제르우스의 검은 겉으로 보기에는 알케르도는커녕 닭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
날은 이가 다 빠져 울퉁불퉁했으며, 검신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실제로 아이템의 설명도 그랬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무기로서의 성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지금은 그저 이가 다 빠진 검일 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혹시나 말하지만 레드룸에는 그거 들고 가지도 못하는 거 알고 있지?”
레드룸은 기본적으로 무기가 사용금지.
덕분에 제르오스의 검은 물론이며 다른 무기조차 들고 가지 못한다.
이에 현성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하려고?”
레이첼이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창 밖에는 마침 저 멀리 번개가 치고 있었다.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대로 현성이 내려치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