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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87화 (87/240)

087화 휴먼 라이트닝(2)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과 레이첼은 방을 나와 왕국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수나 정원 같은 자잘한 곳부터 시작해서 연회장 같은 내부까지.

그럴 때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메이드들이 현성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직접 말을 걸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이유는 바로 옆에 있는 레이첼 덕분이었다.

만약 현성 혼자라면 의심을 받았을 수 있었으나, 레이첼과 같이 다니는 이상.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첼을 따라 왕국의 반 정도 둘러보았을 때였다.

“이걸로 연회장도 끝. 이 정도면 볼만한 곳은 거의 다 둘러봤어.”

레이첼이 자신의 뒤에 있던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래? 잘 봤어.”

그러나 말과는 달리 현성은 딱히 별 감흥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현성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고는 다시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장소는?”

“….”

그 모습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기껏 안내해달라고 해서 직접 안내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줄곧 저런 태도였다.

무엇보다 그는 계속 뭔가를 확인하는 듯 수시로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제대로 듣고 있어?”

결국 참다못한 레이첼이 불만스러운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는 계속 뭘 보고 있는 거야?”

“응? 뭘 보고 있냐고?”

그 말에 현성이 대수롭지 않게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그런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다름 아닌 일기예보가 띄워져있었다.

이에 레이첼이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기예보? 갑자기 그건 왜 보고 있어?”

동시에 현성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잔뜩 먹구름이 껴있는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곧 비가 쏟아진다하더니 그게 정말인 모양이었다.

“…아마 곧 알게 될 거야.”

현성이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대답에 레이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맨날 저런 식으로 말한다니까….”

그런 레이첼을 보고 현성이 작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그래서 안내는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아?”

“글쎄. 그렇다니까.”

“…진짜?”

현성의 뻔뻔한 답변에 레이첼이 눈을 흘기며 현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눈에 봐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

이에 현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방금 보여준 연회장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상직적인 장소라며. 동시에 너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라고 했잖아. 그 이후로도 경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쓰이는 공간이라고 했지? 그 전에 보여준 분수는 니가 어릴 적에 소원 빌려고 동전 던졌다가 잘못 던져서 맨 위쪽에 있는 장식 깨부쉈다며.”

-움찔.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주춤거렸다.

방금 전 그가 한 말은 지금껏 그녀가 한 설명과 똑같았다.

그대로 레이첼이 말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 한눈팔고 있는 줄 알았더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당연하지. 누가 설명해준 건데.”

그와 동시에 레이첼의 입 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 내가 직접 설명해주는데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지.”

어느새 레이첼은 방금 전 불만스러운 표정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은근 기분이 좋은 듯 연신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곧바로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혹시 더 궁금한 곳은 없어?”

“…그야 있기는 한데 좀 까다로운 곳이라 걱정이네.”

그 말에 레이첼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까다롭기는 무슨. 적어도 왕국 내부라면 나랑 같이 가면 못 들어갈 곳은 없는 거 몰라? 걱정 말고 말해봐.”

“그래?”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하튼 참 다루기 쉬운 등장인물이었다.

이에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잠시 고민하는 척 턱을 매만졌다.

“음….”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너의 부모님 방도 괜찮아?”

“…뭐?”

이에 레이첼이 멈칫거리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역시 이건 안 되려나? 하긴 아무리 너라도 그건 좀 그렇겠다.”

“….”

그대로 레이첼이 아무 대답 없이 제자리에 서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냐. 왜? 뭐가 문제야?”

“그럼 안내해줄 수 있어?”

동시에 레이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말했잖아. 왕국 내에서라면 문제없다고.”

그와 함께 레이첼이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따라와. 바로 안내해줄게.”

“그럼 나야 고맙지.”

곧바로 현성이 작게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 당당한 뒷모습을 보라.

역시 프라이드가 강한 뱀파이어다웠다.

현성은 이때만큼은 뱀파이어 특유의 성격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이 얼마나 레이첼을 따라갔을까.

왕국 맨 위에 위치한 복도.

-타악.

그곳에 레이첼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저택을 청소하던 메이드가 서있었다.

하지만 그 메이드는 아래층에 있는 다른 메이드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안경너머로 느껴지는 차가운 눈매.

그리고 여타 메이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복장.

무엇보다도 가슴팍에 달려있는 문양.

‘…저 문양은?’

머지않아 현성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메이드장이군.’

메이드장.

말 그대로 메이드들의 장(長)을 일컫는 단어로, 저택의 모든 메이드들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사람을 뜻하였다.

그리고 맨 위층은 임플의 방이 있는 만큼, 다른 층처럼 다른 메이드들이 청소하는 게 아닌 메이드장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게 바로 현성 그가 레이첼과 함께 온 이유였다.

다른 곳도 비슷하지만, 이곳 맨 위층만은 결코 플레이어 혼자 올라올 수 없었다.

아래층 같은 경우는 어떻게든 다른 메이드들의 눈을 피하면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이곳만은 도저히 어떻게 해도 메이드장의 눈을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옛날 생각나는구만.’

한때 현성은 단신(單身)으로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 창문으로 진입한다거나, 온갖 구조물을 이용해 엄폐한다거나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웬만한 방법들을 전부 동원했지만 결과는 전부 실패였다.

그때마다 메이드장은 어떻게든 플레이어의 침입을 알아채 출입을 저지하였다.

덕분에 <이스페리아>에서 그녀의 별명은 메이드장과 장비를 합쳐 메이드장비.

플레이어를 전부 막아내는 모습이 마치 장판파의 장비를 연상케 한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그 별명에 걸맞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결국 맨 위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레이첼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그때였다.

앞에 서있던 메이드장이 입을 열었다.

“레이첼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게다가 손님까지 같이 오시다니….”

이에 레이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저택 내부를 안내해주고 있었어.”

“…그러시군요.”

곧 메이드장이 레이첼의 뒤에 있던 현성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위층을 안내해주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인데.”

“….”

그대로 메이드장과 레이첼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먼저 입을 뗀 것은 메이드장이었다.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위층에는 임플님의 방을 포함하여 귀중품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손님에게 안내할 목적이라면 아래층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역시 그녀는 쉽게 들여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첼 역시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예술품들은 대부분 위층에 있잖아. 손님에게 우리 뱀파이어 족의 예술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레이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답지 않게 상당히 그럴싸한 답변에 현성이 내심 감탄했다.

뱀파이어 특유의 자긍심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에 메이드장이 턱을 매만졌다.

아무리 메이드장이라고 하지만 레이첼은 피의 왕국의 공주였다.

그만큼 그녀의 말은 임플 다음으로 무시하기 힘든 발언.

‘결국은 레이첼이 강경하게 주장하면 그녀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밖에 없지.’

레이첼 역시 이를 알고 있는 만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올라가는 거잖아?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안내니까 가볍게 훑고 내려올 거야.”

그러자 메이드장이 잠시 고민하며 레이첼과 뒤에 있는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확실히 아가씨와 동행한다면 그렇죠. 게다가 현성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로 에미드장이 현성을 바라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다른 손님도 아니고 무려 아가씨와 교제하는 사이니 무작정 막는 것도 실례되는 일이군요.”

그 말에 레이첼이 순간 움찔거렸으나,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나가도 될까?”

“….”

이에 메이드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안 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예외로 넘어가겠습니다.”

그와 함께 메이드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잠시 아래층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편한 시간 보내시길.”

그런 메이드장의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었다.

역시 권력이 최고다.

플레이어 혼자로는 도저히 뚫리지 않았을 철옹성이 이렇게 쉽게 뚫리다니.

그야말로 레이첼과 같이 온 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메이드장이 계단을 내려가고.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흐아아…긴장 되서 죽는 줄 알았네.”

방금 전의 태연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너는 처음 봐서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거야…진짜 나 어릴 때는 더 심했다니까.”

레이첼이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가 사라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다행히 위층에 도달했다.

이에 레이첼이 복도를 향해 걸어가며 손짓했다.

“자, 그럼 이쪽이야. 따라와.”

* * * * *

그렇게 잠시 뒤.

복도 맨 끝에 다다른 레이첼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현성 역시 발을 멈추고 앞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바로 오늘의 목표, 임플의 방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방 앞에 선 채,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막상 들어가니 눈치가 보이는 셈이었다.

“…그, 그냥 들어가고 바로 나오기만 하는 거다?”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대로 그가 문을 밀며 대답했다.

“일단 들어가고 생각해보자고.”

“야, 자, 잠깐…!”

그리고 레이첼이 채 현성을 말리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그 내부가 보였다.

정면에 보이는 업무용 탁자와 양 옆에 자리한 커다란 서재.

무엇보다도 벽 곳곳에는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술잔이나 검, 방패.

심지어는 갑옷까지.

내부는 그야말로 집무실과 전시관이 합쳐진 것만 같은 구조였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스페리아>에서 보던 것과 같은 풍경.

동시에 옆에 있던 레이첼이 말했다.

“…다 봤지? 그럼 이제 나가자.”

그 말에 현성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에 들어온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대로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 보긴 뭘. 아직 남았어.”

“뭐가?”

그 말에 현성이 아무 대답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까지나 현성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임플의 방에 숨겨져 있는 물건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장 지금 방에 전시된 예술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임플은 <이스페리아> 설정 상 예술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단순히 예술품이 아닌 고대의 아이템 역시 존재한다.

여기서 현성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 고대의 아이템.

동시에 그것이 바로 이번 레드 룸에서 알케르도를 쓰러트릴 비장의 수였다.

이에 현성이 임플의 방을 제 방처럼 누비며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게 이쯤 있었는데.”

그 순간이었다.

복도를 타고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이 발소리는….”

그대로 레이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며 중얼거렸다.

“…아빠?!”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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