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휴먼 라이트닝(1)
저녁식사에서의 소란이 있고 난 뒤,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레드 룸이 열린다는 소식은 왕국 전체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 이유에는 물론 레드 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파급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목을 끈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이름이었다.
현성과 알케르도.
그 중에서 알케르도는 무려 귀족파의 대표.
즉 말할 것도 없는 피의 왕국의 유명인이었다.
거기다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무려 레이첼의 약혼자로 거론되는 뱀파이어.
그만큼 그의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현성은 어떠한가.
유현성.
일족의 지긋지긋한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인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는데 기여한 인물이자, 왕국의 공주 레이첼이 ‘직접’ 데려온 인간.
게다가 듣기로는 그녀가 납치당할 위기를 해결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거 하나만 해도 현성은 뱀파이어 사이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화제를 집중시키는 인물이었다.
허나 가장 시선을 끄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 사실은 그가 다름 아닌 레이첼 그녀와 교제하는 사이라는 것.
‘왕국의 공주의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인간이라고?!’ 라는 제목의 소설이라면 모를까, 그게 실제로 벌어지다니.
덕분에 현성의 인지도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무려 비공식 약혼자 vs 공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의 대결.
많은 대중들이 드라마에 환장하듯이, 뱀파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만큼 흥미를 끄는 대결이 없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드라마.
이에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내심 어서 레드룸이 열리길 바라는 입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당사자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왕성 내부에 위치한 레이첼의 방 안.
-타악.
그곳에는 현성과 레이첼이 마주앉은 채,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흘깃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여유로운 표정의 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아….”
그 모습에 레이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레드 룸 이야기가 오간 뒤, 3일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는 바꿔 말하면 눈앞의 현성이 알케르도와 싸울 날이 고작 4일 남았다는 뜻.
물론 맨 처음에는 현성 그라면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믿으며, 불안함을 꾹 참고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현성은 대처는커녕,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뿐이었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이런 상황에 체스나 두자니….’
정말이지 간이 큰 건지 여유로운 건지 도대체 그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현성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알케르도.’
알케르도, 그는 귀족파를 대표하는 뱀파이어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를 보고 그저 가문의 권세를 믿고 나대는 뱀파이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과거 귀족파 사이에 발생한 의견충돌이 무력까지 번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분위기가 가열되어 그 누구도 쉽사리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날 정도로 심했었지.’
그만한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임플 혹은 란트 급에 해당하는 자가 나서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 속.
먼저 나선 자가 바로 알케르도였다.
거기서 알케르도는 보란 듯이 나머지 뱀파이어들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무력이 드러났으며, 이 날 이후 그를 바라보는 입장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명실상부한 귀족파의 대표.
가문의 권세와 무력까지 모두 갖춘 뱀파이어.
그게 바로 지금의 알케르도였다.
‘…무엇보다 레드 룸은 단 두 명이서 펼치는 대결.’
정령의 신전 때처럼 위험할 때는 그녀가 나설 수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현성이 순순히 질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현재 레이첼은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돌겠네. 진짜….”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리며 체스판 위에 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그를 째려보았다.
지금 몰라서 묻는 말인가.
이에 레이첼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3일째 아무런 행동도 안하고 있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있는 거야?”
그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날 믿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
확실히 그때는 그랬었다.
그는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3일 간 아무것도 안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레이첼이 그렇게 생각하며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번 레드 룸은 단순한 결투가 아니었다.
전에 말했듯이 레드 룸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신념의 싸움.
그렇기 때문에 레드 룸에서의 패배는 곧 자격을 박탈당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만약 현성이 패배한다면 자연스럽게 알케르도를 주축으로 한 귀족파의 의견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그가 공식적으로 레이첼의 약혼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피의 왕국에 퍼진 현성과 알레르도의 싸움은 비공식 약혼자 vs 공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의 구도.
그런데 여기서 현성이 진다?
그렇다면 알케르도가 레이첼의 남자친구인 그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 사이를 가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니까 현성의 패배는 곧 알케르도 그가 내 약혼자가 된다는 말.’
동시에 레이첼이 표정을 구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최악이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자와 평생을 약속하라고?
“차라리 알케르도와 약혼할 바에는 현성과 약혼하는 게 훨씬….”
순간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무슨 말 했어?”
그러자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냐! 아무 말도 안했어!”
“그래? 그럼 말고….”
다행히 현성은 별 관심 없는 듯 다시 체스판에 눈을 돌렸다.
그런 현성의 모습에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가 알케르도에게 지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괘씸하네.’
본인 입으로 남자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면, 그만큼 책임을 져야하는 법.
이번 레드 룸에서 지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다니.
“야. 유현성.”
“…왜?”
“너. 적어도 남자친구 인척을 하는 동안이라면 날 지키려는 노력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대로 레이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동시에 현성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 역할에 진심인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뭐래. 어디까지나 ‘하는 척’이잖아. 그니까 그동안은 제대로 하라는 거지!”
“정말 그게 전부야?”
“흥, 당연하지.”
그러면서 레이첼이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진심인데.”
단호한 현성의 한 마디.
그와 함께 레이첼이 그대로 멍하니 정지했다.
그리고 그도 잠시.
-화악!
레이첼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지기 시작했다.
진심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너 그, 그게 무슨….”
“진심이라고.”
이에 현성이 다시 한 번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내가 남자친구를 자처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도 못 왔어.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없어. 아직 목표는 이루지도 못했거든.”
“…목표? 그게 뭔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피의 저주를 풀고 왕국 내에서 니 입지를 단단히 다지는 것.”
그런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아무런 이득이 없는 거 아냐?”
그러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득이 없긴 왜 없어.
그래야 훗날 뱀파이어가 플레이어한테 우호적인 세력으로 변하고,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을 다지는 거지.
‘내가 여태껏 뭐 때문에 그렇게 굴러왔는데….’
현성 그의 목표는 오직 해피엔딩 뿐이었다.
그리고 레드 룸에서 알케르도를 이기는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현성은 당연하게도 절대 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질 생각이었으면 승낙하지도 않았어.’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있어. 그런 게.”
“잠깐. 그럼 진심이란 게 설마 그 목표야?”
그 말에 현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
“….”
“그런 관계로 당분간은 적당히 남자친구인 척 분위기만 맞춰줘. 다른 건 더 바라지도 않아.”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그래. 현성이 자신과 교제하는 걸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없지.
‘만약 혹시나…혹시나 라도 정말 그랬다면….’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쳤나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하나 남았는데….”
이에 레이첼이 주춤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할 말이라니.
그녀가 사뭇 긴장하며 물었다.
“뭐, 뭔데?”
동시에 레이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묘한 이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현성이 움직였다.
-타악.
그대로 현성이 체스판 위로 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체크 메이트.”
“…그게 끝이야?”
“응. 내 승리.”
잠깐의 정적.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첼이 이를 으드득 갈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너 잘났다!”
곧바로 그녀가 체스판을 엎어버리며 소리쳤다.
이에 현성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뭐야! 갑자기 왜 판을 엎어!”
“아, 몰라! 나가!”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가라니 잊었어?”
“뭘?”
“체스에서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그러자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젠장,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냥 하면 심심하다고 뭐라도 걸자고 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이야.
“…이제 기억나니?”
현성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서있던 레이첼이 결국 작게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털썩.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째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서 소원이 뭔데.”
레이첼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에 현성이 곧바로 방문 밖을 가리켰다.
“별 건 아니고. 왕국 내부 구경 좀 시켜달라고. 아무래도 나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눈치 보이잖아.”
“…구경? 그거야 문제없지만 갑자기?”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
레이첼이 그런 현성의 미소를 발견하자마자 확신했다.
지금까지의 그의 패턴을 정리해보았을 때.
절대 그냥 궁금해서 그럴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그래.”
“…글쎄?”
현성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그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새 눈치가 빨라졌군.’
실제로 현성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그의 목표는 다름 아닌 임플의 집무실.
안 그래도 레드 룸이 4일 남은 지금, 계산상 이제 슬슬 움직여야할 시간이 왔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이 바로 임플의 집무실.’
그대로 잠시 뒤.
현성을 주시하던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내려면 직접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국 내부를 안내해달라고?”
“그거지.”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알겠어. 그럼 잠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봐.”
“그 정도야 뭐….”
현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방을 나가기 직전.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맞다. 그리고 니 생각은 잘 들었어.”
뜬금없는 현성의 말.
이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알케르도랑 약혼할 바에는 나랑 약혼하는 게 낫다며.”
그와 함께 레이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상황을 파악한 레이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너, 너…못 들은 거 아니었어?”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앞에 있는데 그걸 못들을 리가 있냐?”
“이, 이런….”
“그럼 난 간다.”
동시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문을 닫고 나갔다.
-철컥.
그리고 문이 닫히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첼의 방 안에서 수치심에 가득 찬 그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