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위험한 상견례(10)
현성의 가문이 인간계에서 영향력이 큰 가문이라고?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현성은 가주긴 가주이나, 어디까지나 몰락가문의 가주.
인간계에 영향력이라고는 1도 없는 그런 듣보잡 가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당당한 태도를 보라.
원래 거짓말은 일종의 연기다.
그야말로 혼이 담긴 구라.
그리고 그 구라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 되는 법.
그만큼 그 여파는 대단했다.
방 안에 있는 전원, 현성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도 그럴게 어느 미친놈이 뱀파이어의 본거지에서 뱀파이어의 수장을 앞에 두고 당당히 구라를 내뱉겠는가.
물론 그 미친놈이 바로 눈앞의 현성이라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오히려 그들은 현성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역시…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전부 심상치 않더니만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군.’
도서관의 망령, 비밀의 숲, 정령의 신전, 거기다 아카데미 시험까지.
지금껏 현성이 보여준 모습과 기행.
그가 그만큼 유명한 가문의 가주라면 이해할만했다.
만약 레이첼이 아카데미에 생활하면서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그의 말이 전부 개소리임을 알아차렸을 터.
허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기숙사에 박혀 게임만 하던 히키코모리.
‘…대단해.’
현성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그리고 란트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고일과 웨어울프의 습격, 레이첼의 납치사건까지 해결한 걸 보아 보통 인간은 아닐 거라 예상했었지만 설마 그만한(?)가문의 가주일 줄이야….’
이어서 알케르도가 낭패라는 듯. 이를 악물며 주먹을 꾹 쥐었다.
‘젠장, 그럼 그렇지. 레이첼의 남자친구가 그냥 인간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못해도 인간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터. 큭!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이게 전부 폐쇄적인 뱀파이어 사회 때문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허나 이런 참극은 현성에게 있어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현성의 말에 임플과 란트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그가 한 말대로라면 현성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았다.
언제까지 마족을 기다릴 수는 없는 법.
지금 이 와중에서도 피의 갈증에 고통 받는 뱀파이어들이 여럿이었다.
무엇보다 마족과 손을 잡는다한들, 지금의 세력이라면 ‘그때와 같이’ 마족과 동등한 구조가 아닌 마족들의 아래에 들어가는 형태가 될지도 몰랐다.
-욱씬!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에 임플과 란트가 자신들의 송곳니를 매만졌다.
그런 그들의 송곳니는 전부 한쪽이 비어있었다.
기본적으로 뱀파이어의 수명은 인간에 비해 훨씬 길다.
거의 불사라고 불릴 정도.
무엇보다 그들의 상징인 뾰족한 송곳니는 심지어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임플과 란트는 한쪽 송곳니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과거 마족과의 일 때문.
과거 마족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
뱀파이어는 마족과 연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뱀파이어 측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연합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뱀파이어 전체가 괴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 상황에 뱀파이어들을 이끄는 임플과 란트는 어떻게든 연합은 유지해야 했다.
이에 임플과 란트가 내린 선택은 마족과의 동등한 지위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임플과 란트는 자신들의 송곳니를 뽑았다.
과거면 한창 뱀파이어들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플과 란트는 종족을 위해 뱀파이어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송곳니를 넘겼다.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연합이 무너지면 정말 끝이었으니까.’
그 결과, 연합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에 마족이 기사단에 의해 괴멸당하며 뱀파이어들 역시 자연스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송곳니를 바치고 남은 게 몰락이라니.
임플과 란트가 마족과 손을 잡는 걸 망설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과거의 몰락을 반복할까봐.
그때 치욕을 견디면서 얻어낸 게 한 줌의 먼지로 변해 사라질까봐.
허나 그렇다고 무턱대로 현성의 손을 들어주기는 또 쉽지 않았다.
‘아무리 현성이 인간과의 다리를 이어줄 수 있다고는 하나, 알케르도는 뱀파이어의 귀족의 대표….’
생전 처음 본 이방인, 게다가 인간인 현성의 손을 들어주자니 귀족파의 반대가 거셀 게 분명했다.
그렇다. 설득력이 큰 건 현성의 의견이었지만, 명분이 있는 쪽은 알케르도였다.
거기다 혹시나 마족의 손을 잡고 찬란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면?
희망은 때때로 도박과 같았다.
상황에 따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면에서 그랬다.
“후우….”
임플의 입을 타고 깊은 한숨이 삐져나왔다.
그 후로도 임플과 란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아마 지금쯤 대략적인 판단은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모자란 건 명분이겠지.’
현성은 지금 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다음 행동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명분이 모자라면 증명, 그러니까 그 능력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구태여 현성이 나서지 않아도 마련될 예정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알케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주먹을 꾹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알케르도의 속은 그야말로 타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야말로 초조해 미칠 지경.
명분은 자기 쪽에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만약 이번에 밀리면 단순히 밀리는 것만으로는 안 끝난다.
귀족파에서 그의 지지가 약해짐은 물론, 레이첼의 약혼도 물 건너간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분위기를 역전할, 완벽하게 못을 박을 게 필요했다.
‘그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때였다.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 가지 묘안.
이에 서서히 알케르도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라면.’
동시에 알케르도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어서 알케르도가 입을 떼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쉽사리 결정하기는 힘든 사항으로 보이는데…맞습니까?”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네.”
임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알케르도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의 전통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뱀파이어의 전통이라면….”
“레드 룸(Red room)으로 결정하죠.”
그의 말에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레드 룸.
예로부터 이어온 뱀파이어들만의 결정방식으로, 한 곳에 두 뱀파이어를 몰아넣은 뒤 이긴 쪽의 의견을 채택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결투를 치른 방은 서로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 레드 룸이었다.
한 마디로 생사결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은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하지는 않겠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꽤나 무거웠다.
“레드 룸이라….”
“지금상황에 딱 맞는 방법 아닙니까?”
알케르도의 말에 임플이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본디 말만 앞서서는 아무것도 증명해낼 수 없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에게 자신이 가진 걸 보여주는 것.
단순히 결투의 의미가 아닌, 신념의 싸움.
그게 바로 레드 룸의 본질이었다.
“….”
임플의 침묵.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알케르도의 물음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기도 했다.
이에 알케르도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래 넌 레드 룸이 뭔지 모르겠군. 내가 직접 설명해주지.”
그러면서 알케르도가 현성을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드 룸이란….”
그렇게 그의 설명이 시작되고.
마침내 알케르도의 설명이 끝났을 때.
그가 현성에게 물었다.
“…알겠나?”
“그래.”
알케르도의 물음에 현성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실 대답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애초에 <이스페리아>의 스토리부터 온갖 설정을 꿰뚫고 있는데, 레드 룸을 모른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현성이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뭐 뱀파이어 족의 전투니, 생사결이니 뭐니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러니까 그냥 이긴 쪽이 장땡.’
그리고 결투를 치른 방이 붉게 물든다니 그런 것도 생각해보면 사실 당연한 소리였다.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싸울 때 자신의 피를 이용해 싸운다.
그러니 당연히 싸우고 난 뒤는 피가 가득할 수밖에.
“설마 겁먹은 건가? 그래, 그럴만하지. 애초에 네놈은 인간이고 난 뱀파이어. 태생의 차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알케르도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현성이 거절한다면 자연스레 분위기는 자신의 쪽으로 넘어오기 마련.
이에 알케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내가 말한 대로….”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냐. 해도 괜찮아.”
“잠깐…뭐?”
그런 현성의 대답에 알케르도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대결.
보통의 인간이라면 겁먹고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레드 룸을 해도 괜찮다니.
이에 오히려 알케르도가 더욱 당황했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자고. 레드 룸.”
동시에 알케르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하니 진짜 레드 룸을 승낙할 줄이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멍청한 인간 같으니.’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이득이었다.
눈치 볼 필요도 없다.
그저 레드 룸에서 눈앞의 인간을 박살내면 끝낼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임플과 란트는 물론.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그녀가 알케르도와 현성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냐. 아무래도 좀 더 생각하고….”
그러나 알케르도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가 재빨리 임플과 란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 다 똑똑히 들으셨죠?”
“그건 그렇지만….”
곧 란트가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 군, 천천히 결정해도 괜찮습니다.”
“아뇨.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현성의 대답은 똑같았다.
이에 알케르도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럼 레드 룸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뭐라 할 틈도 없이 알케르도가 방을 나섰다.
그렇게 알케르도가 나가고 임플과 란트, 레이첼과 현성만이 남은 방.
임플이 입을 열었다.
“…자네 진심인가?”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장인어른.”
“….”
그런 현성의 말에 임플이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임플이 턱을 매만졌다.
알케르도.
귀족파를 대표하는 뱀파이어.
그만큼 그는 절대 약한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강하다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
그런데 그런 그를 상대로 레드룸을 펼친다니.
아무리 현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들, 아예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레이첼 역시도 마찬가지.
그녀가 현성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지?”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 말대로 해서 결과가 안 좋은 적 있었어?”
그 말에 레이첼 역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단 한 번도 없었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임플과 란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딸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믿음을 가진 적 있었던가.
이에 현성이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레드 룸은 언제쯤 준비되나요?”
그의 말에 란트가 대답했다.
“아마 일주일 정도 걸릴 거 같은데….”
그러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정도면…충분할 거 같네요.”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얼굴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