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위험한 상견례(7)
고풍스러운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문 앞.
메이드가 먼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대로 메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레이첼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그러자 머지않아 문 너머를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오거라.”
그와 함께 문이 열리며, 마침내 현성은 피의 왕국의 지도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양쪽에는 조각상과 더불어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은발의 두 뱀파이어, 그리고 그 중앙에 서있는 소녀.
마치 가족사진을 연상케 하는 그림.
현성은 단번에 그 소녀가 어릴 적 레이첼의 모습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대로 현성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방 중앙에 길게 놓인 테이블.
그 끝에는 방금 전 전시되어 있던 그림 속과 똑같은 두 명의 뱀파이어가 앉아있었다.
“간만이구나. 레이첼.”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있던 뱀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은발과 붉은 눈동자.
얼핏 보았을 때는 기껏해야 40대정도로 보이는 미중년.
“…이게 얼마만이지.”
이어서 그 옆에 있던 여성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작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만약 레이첼이 나이를 먹는다면 딱 저런 모습이 아닐까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우한 것만으로 느껴지는 존재감은 레이첼 그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현성의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들.
[이름 : 임플]
성별 : 남성
나이 : ??
종족 : 뱀파이어
클래스 : 뱀파이어 로드
*현재 대상과의 능력치 차이가 너무 심해 상세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름 : 란트]
성별 : 여성
나이 : ??
종족 : 뱀파이어
클래스 : 뱀파이어 퀸
*현재 대상과의 능력치 차이가 너무 심해 상세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바로 뱀파이어를 이끄는 수장이자 레이첼의 부모.
임플과 란트였다.
곧 레이첼이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제가 아카데미로 떠난 후로 한 번도 못 만났으니…근 3년 만이죠.”
그리고 그녀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짧은 한 마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의 한마디에는 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기쁨과 반가움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둘 역시 그런 레이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거라. 레이첼.”
하지만 감격스러운 가족상봉의 순간도 잠시.
그 둘이 레이첼 옆에 있던 현성을 바라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코끝을 타고 느껴지는 이질적인 향기.
방금은 간만에 만난 레이첼덕분에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 달랐다.
보란 듯이 레이첼의 옆에 서있는 저 모습.
거기다 줄곧 느껴지는 이질적인 향기는 분명.
“…인간?”
인간이었다.
그와 함께 레이첼의 아버지, 그러니까 임플의 표정이 일순간에 구겨졌다.
그대로 임플이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레이첼, 그 옆에 있는 건 뭐지? 아카데미의 하인인가?”
그와 동시에 레이첼이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말했듯이 귀족적 성향이 강한 뱀파이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얕잡아 보기 마련.
거기다 피의 왕국을 이끄는 로드라면 더더욱 그 성향이 강했다.
뱀파이어 로드에게 있어서는 인간은 잘 쳐줘도 하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임플은 지금 눈앞에 서있는 현성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감히 인간주제에 버젓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쯧, 일단 됐으니 저 인간부터 내보내거라.”
임플이 미간을 찡그린 채,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에 뒤에 있던 세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임플님,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때였다.
임플이 세라를 째려보았다.
그와 함께 임플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백이 곧바로 세라에게 쏘아졌다.
-고오오.
단숨에 주변의 공기가 변할 정도의 묵직한 위압감.
그대로 임플이 세라를 향해 말했다.
“…감히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그, 그게….”
단숨에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임플의 위압감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세라는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 그만해.”
보다 못한 레이첼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자 무거운 위압감을 뿜어내던 임플이 작게 혀를 찼다.
“쯧.”
동시에 세라의 몸을 옥죄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이에 세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커헉….”
그 모습에 레이첼이 세라를 부축하며 현성과 아빠를 번갈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첫 만남에는 그렇게 경계한 마당에 자신의 부모님이라면 더 심하게 나올 게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설명해야해.’
곧바로 레이첼이 임플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그러니까 이쪽은 하인이 아니라 유현성이라는….”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서있던 현성이 돌연 레이첼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현재 레이첼과 교제하는 사이입니다.”
“야, 그걸 여기서…!”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장내에 흐르는 침묵.
무엇보다 임플과 란트는 그 자리에 멈춰선 듯 멍하니 현성과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
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세라도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인어르신? 장모님?”
뻔뻔하기 그지없는 현성의 발언.
어차피 이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될 바에는 차라리 빨리빨리 폭탄을 던지고 끝내버리는 게 나았다.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으니까.’
괜히 머뭇거리다가는 임플과 말 한마디도 못 섞고 쫓겨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치고, 레이첼과 관계를 밝힐 경우.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그냥 인간이라면 모를까.
그녀와 사귀는 사이라면 임플쪽에서 어떻게든 먼저 말을 걸어올게 분명했다.
물론 그게 호의일 가능성은 적지만 대화가 끊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임플에게 플레이어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
그리고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에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임플은 설정 상 딸 바보거든.’
그대로 현성이 임플을 바라보았다.
임플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감히 레이첼과 교제하고는 사이라고? 거기다 장인어르신?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그와 함께 임플의 눈앞을 타고 그동안 레이첼과 함께했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촤르륵!
처음 레이첼을 출산했을 당시의 모습.
아장아장 걸어 품 안에 안긴 모습.
어느덧 말을 뗀 레이첼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며 외치던 말.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거야!”
“하하. 우리 딸. 아빠가 그렇게 좋아?”
“응!”
임플에게 있어 레이첼은 정말이지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웬 인간을 데려오더니 교제하는 사이란다.
동시에 뒷목이 지끈거려왔다.
“어억!”
“어머, 당신 괜찮아요?!”
그 뒤로 펼쳐진 장면은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였다.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임플과 그런 그를 부축하는 란트.
그리고 그것도 잠시.
-콰앙!
임플이 란트의 부축을 떨쳐내고는 테이블을 힘껏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임플이 벌컥 화를 내며 현성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이, 이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면서 그가 당장에라도 테이블 위에 있는 펜을 집어던질 기세로 현성을 째려보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그러자 현성이 임플의 말을 가볍게 자르며 싱긋 웃었다.
“유현성입니다. 장인어른.”
그와 함께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편지에 안 적었어?”
“아, 아니 적긴 적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레이첼이 현성의 소매를 잡은 채 말했다.
그러나 현성은 여전히 태연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그거면 됐어.”
이에 임플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들었다.
“허어! 유현성이고 자시고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
그때였다.
임플의 옆에 있던 란트가 뭔가 떠오른 듯 임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잠깐. 유현성이라면 분명 편지에 써져 있던 이름 아닌가요?”
그러나 소중한 딸에게 인간애인이 생겼다는 충격에 눈이 돌아간 임플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알게 뭐야! 이 손 안 놔?”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임플이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 충격에 란트가 뒤로 밀리면서 그녀가 쓰고 있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이에 란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
“…여보?”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임플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현성이 작게 웃었다.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피의 왕국의 군주 임플은 그 위치만큼이나 자긍심이 강하고, 권력도 남다른 남자였다.
허나 그에게는 유일한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란트.
임플은 한 왕국을 통치하는 군주였지만, 아내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아무리 실수라고 한들.
이성을 잃어 자기도 모르게 아내를 밀쳐 안경을 떨어트리다니.
곧 현실을 자각한 임플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아, 아니. 방금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보.”
그대로 란트가 임플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이는 일종의 경고표시.
그리고 그 한계선은 3번까지.
만약 그 3번의 경고가 넘어가면 란트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그 표시에 임플이 그녀의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란트가 그런 임플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진정하셨나요. 여보?”
“크, 크흠.”
란트의 물음에 임플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란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 편지에 적혀있던 내용 기억하죠?”
“물론이지. 무려 우리 딸이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이었지.”
“그 과정에서 조력자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시나요.”
“아. 그랬지.”
종족의 사명이 달린 일이었다.
그만큼 레이첼을 도운 조력자라면 그만큼 종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여, 큰 보상을 줄 것을 약속했다.
그대로 임플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분명 이름이….”
그와 함께 임플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임플이 홱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유현성?”
그 말에 현성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제가 유현성입니다. 장인어른.”
“…오.”
동시에 임플이 짧은 감탄사를 남기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조력자가 이 녀석이었다니.
거기다 조력자가 애인?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눈이 맞았던 걸까.
그와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한 번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소중한 딸을 건드려?
‘저, 저, 저 뺀질뺀질한 놈이…!’
지금 임플의 눈에 현성은 그저 딸을 빼앗은 도둑놈으로 보일 뿐.
그대로 임플이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상황이 곤란했다.
종족의 저주를 풀 유일한 물건.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는데 도움을 준 존재가 눈앞의 현성이라니.
무엇보다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레이첼이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는 데 있어 그의 역할은 꽤나 컸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고마운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도둑놈이었지만 군주의 입장에서는 은인이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 따로 없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임플이 란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눈앞에서 딸이 빼앗길 판(?)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란트는 그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요. 레이첼이 선택한 남자잖아요. 그만큼 뭔가 있겠죠. 그리고 그런 건….”
란트가 현성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차차 알아 가면 그만이고요.”
그런 란트의 눈빛에 순간 현성은 소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답변에 임플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냐…아니라고….”
“네? 뭐가요?”
그와 동시에 임플이 번쩍 고개를 들며 현성을 향해 외쳤다.
“난 이 교제 반댈세!”
피의 왕국, 안쪽에 위치한 방.
위험한 상견례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