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위험한 상견례(6)
그렇게 한바탕 레이첼 납치사건이 있고 난 뒤.
뱀파이어들은 전보다 한층 더 경비를 강화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무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세라와 루이조차 손도 쓸 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 암살자의 등장과 동시에 벌어진 상황.
그것만으로도 암살자의 실력이 수준급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암살자의 등장은 앞으로 이런 습격이 더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물론 이 다음에는 습격이라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미 일어날만한 이벤트는 전부 일어났다.
무엇보다 <이스페리아>의 진행방식을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의 습격은 뇌절에 가까웠다.
그대로 현성이 작게 혀를 찼다.
‘두 번까지는 몰라도 세 번은 선 넘지.’
그런 의미에서 아마 세 번째 습격은 없을 터.
허나 경비를 강화해서 나쁠 건 없으니 이대로 두기로 했다.
뭐 덕분에 이동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는 했다만, 이 정도는 큰 문제없었다.
‘어차피 피의 왕국에 도착하면 이것저것 꽤나 바쁠 예정.’
차라리 지금 쉬어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 현성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창밖을 타고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거 딱 뱀파이어 만나기 좋은 날이구만.’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차에 탄 순간부터 계속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세라가 앞에 달린 거울을 통해 현성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세라뿐만이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루이까지 그랬다.
어딘가 현성을 의식하면서 머뭇거리는 모습.
‘뭐 대충 짐작 가는 건 있다만….’
응당 레이첼을 지켜야할 그들이 오히려 대놓고 눈앞에서 그녀가 납치당하는 꼴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상황에서 레이첼을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현성.
거기다 전에 가고일과 웨어울프로 인해 발생한 위급상황을 타파한 것 역시 그.
그만큼 레이첼의 경비를 자처하는 그들의 입장은 차마 고개를 못 들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하나, 현성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욱 불편하기만 했다.
이에 결국 참다못한 현성이 세라를 향해 말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동시에 세라가 움찔거렸다.
“네? 저, 그게….”
곧 세라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현성님 덕분에 무사히 레이첼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렇게 된 거 어디 한 번 호감작이나 해볼까.
“아닙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아니었습니까. 레이첼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세라님을 포함한 다른 뱀파이어 분들도 모두 똑같을 겁니다. 거기다 결국에는 늦지 않고 찾아주셨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 레이첼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첼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에 현성의 옆에 있던 레이첼 역시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러니까 세라, 루이 모두 기죽어 있을 필요는 없어. 무엇보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
“레이첼님….”
세라가 감동한 듯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첼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은 처음 레이첼님이 현성님을 데려왔을 때 웬 인간이냐며 의심했습니다. 이대로 인간을 피의 왕국에 들여도 되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세라의 말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괜히 그가 레이첼과 사귄다는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참 묘하긴 하네.’
하지만 그도 잠시.
세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현성님이라면…믿고 레이첼님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뭐라고?”
“아마 이건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모두 인정하실 겁니다.”
“아,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
그때였다.
현성이 자연스럽게 레이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만큼 레이첼은 제게 있어 소중한 존재니까요.”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엣?”
그런 현성의 물음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전에도 그렇고 왜 그러는 거야!’
처음에는 그저 연인을 연기하다보니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 그게 쌓이니 레이첼은 알게 모르게 현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암살자를 놓치고 마지막에 그가 했던 말.
‘내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니….’
심지어 그때는 주변에 다른 뱀파이어들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단순히 연기였을까.
그게 아니면.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허나 그것도 잠시.
레이첼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물론 소중하지.”
침착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이다.
레이첼이 그렇게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두 분 다 어쩜…정말 보기 좋네요.”
그대로 그런 둘을 지켜보던 세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이첼님, 아버님과 어머님한테는 제가 잘 말해드릴게요.”
그와 동시에 현성이 작게 웃었다.
‘…개꿀.’
호감작은 그야말로 성공적.
이걸로 우선 뱀파이어들에게 어느 정도 점수를 땄다고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곧 레이첼의 부모님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 그런 세라의 말은 현성에게 있어 이득이었다.
“….”
머지않아 현성의 수상한(?) 웃음을 발견한 레이첼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설마 이걸 노리고….”
이에 현성이 대답했다.
“딱히 부정은 하지 않을게.”
“흥, 그럼 그렇지.”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랬다. 그게 진심일리 없지.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 그런데 소중하다고 한 건 사실이다?”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대로 잠깐의 정적.
그리고 잠시 뒤.
-화악!
레이첼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졌다.
“너, 그게 무, 무, 무슨…!”
이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바라봤다.
“음? 뒤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레이첼은 무려 현성에게 있어 해피엔딩을 이끌어내기 위한 둘도 없는 소중한 히로인이었다.
그러니 그의 말은 물론 진심.
“그럼 계속 이동하죠.”
그대로 현성이 아무 일 없는 듯 대답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날씨 참 좋네.’
그런 그의 옆에는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레이첼이 앉아있었다.
* * * * *
그리고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도로의 끝이 보일 때쯤이었다.
-끼익.
인적이 드문 숲길.
마침내 현성과 레이첼이 타고 있던 세단이 정지하였다.
그와 함께 앞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루이가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면서 루이가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는 울창한 검은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알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뱀파이어들의 본거지, 피의 왕국이라는 것을.
“그럼 바로 들어가실까요?”
그런 루이의 말에 레이첼이 세단에서 내렸다.
그녀는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흐음….”
그대로 세단에서 내린 레이첼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하지. 내가 직접 데려온 손님이잖아? 이 정도는 보여줘야지.”
그러면서 레이첼이 의기양양하게 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와.”
“예예, 그러도록 하죠.”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알면서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아무래도 피의 왕국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귀엽기는.’
그대로 현성과 레이첼이 검은 숲 앞에 섰다.
동시에 레이첼이 그를 확인하고는 새끼손가락을 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잘 봐둬.”
이어서 레이첼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붉은 피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주르륵.
그때였다.
그녀의 혈액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땅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르륵.
가만히 있던 나무들이 무언가에 반응하듯 흔들렸다.
곧 흔들리는 나무의 잎사귀마저 붉게 물들고, 마침내 눈앞의 검은 숲이 붉게 변했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무들이 신기하게도 양쪽으로 갈라지며 하나의 통로를 만들어냈다.
-드드득!
이게 바로 뱀파이어들이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이유였다.
그들이 사는 영역은 오직 뱀파이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공간.
이에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때?”
그런 레이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들뜸과 뱀파이어 특유의 자긍심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새로 산 옷을 자랑하는 것처럼 어때? 대단하지? 라고 묻는 것 같은 눈빛.
그 눈빛에 현성이 작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대단하네.”
물론 <이스페리아>를 플레이 하면서 전부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눈앞의 레이첼을 보니 차마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눈치껏 맞장구 쳐주는 게 맞았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직접 보니 꽤 신기하기도 하고.’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숲이 열리면서 드러난 통로.
그곳에 발을 내딛자, 저 멀리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법한 대저택.
몰고 다니는 차는 세단임에 불구하고 왜 사는 곳은 뜬금없이 저택이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감성이지. 감성.’
아무튼 저곳이 바로 피의 왕국의 본거지이자, 뱀파이어 일족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사는 성이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비롯한 세라와 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빨리 들어가자고.”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은 간만에 온 고향에 꽤나 신나보였다.
* * * * *
곧 들뜬 레이첼을 따라 대저택 내부로 들어온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저택은 그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마저도 중세영화의 세트장을 연상케 하였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와 복도에 줄지어 서있는 예술품들.
‘…여기만 보면 <이스페리아>의 배경이 현대가 아니라 중세로 착각해도 뭐라 못할 정도.’
정말이지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귀족적인 이미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레이첼이 들어오자, 안에 있던 메이드 뱀파이어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레이첼 아가씨를 뵙습니다.”
이에 레이첼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지금 어디 계셔?”
그런 레이첼의 말에 메이드 하나가 직접 나서며 말했다.
“두 분이라면 안쪽에 계십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집에 있는 메이드라고는 수연이 전부.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레이첼 그녀가 피의 왕국의 공주라는 실감이 들었다.
-뚜벅뚜벅.
그대로 메이드의 안내를 따라, 현성이 계단을 올랐다.
동시에 그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피의 왕국을 이끄는 지도자를 만날 시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