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위험한 상견례(2)
그대로 레이첼과 함께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현성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덧 피의 왕국에서 마중 나오기로 했던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장소는 아카데미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이래보여도 레이첼과 그녀를 마중 나올 세력은 전부 뱀파이어들.
괜히 아카데미 근처에서 만났다가 그 정체가 발각될 경우, 큰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아무리 <이스페리아>의 세계관이 던전과 몬스터가 판치는 세상이라 한들 아직 뱀파이어들은 인간사회에 녹아들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뱀파이어들은 인간들이 아닌 마족들의 편을 택하게 되었으며, 이 선택은 플레이어에게 있어 악조건으로 작용.’
허나 지금은 달랐다.
전에 말했듯이 이번에 얻은 정령왕의 술잔을 이용해, 뱀파이어 일족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낸다면 뱀파이어 세력을 플레이어 쪽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계기와 접점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오늘 피의 왕국에서 결정될 일이었다.
이에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누이 말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대로 레이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야 괜찮지만, 다른 뱀파이어들이 너를 무조건 좋게 본다고 생각할리는 없다는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어.”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레이첼이 그랬듯이, 뱀파이어라는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종족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높다.
덕분에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종족, 특히 인간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리 친절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현성은 왕국의 공주 레이첼이 직접 데려온 손님이지만, 왕국 내에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준비는 단단히 해둬.”
레이첼이 현성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뱀파이어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현성 그가 아무리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한들,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태연한 모습.
결국 그런 현성의 모습에 레이첼이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 내말 듣고 있어?”
“음?”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웃었다.
“당연히 듣고 있지.”
“…정말?”
현성의 단호한 대답에 레이첼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이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래서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비도 해왔다고.”
“대비라고? 또 이상한 건 아니겠지?”
“이상한 건 무슨. 너만 협조해주면 돼.”
동시에 레이첼이 가던 발을 멈추고 움찔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향해 중얼거렸다.
“…니가 이런 소리할 때마다 굉장히 불안한 거 알아?”
“하하.”
레이첼의 말에 현성은 그저 작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레이첼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폭되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멈칫.
현성이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그가 멈춰선 곳은 인적이 드문 길거리.
그곳에는 그 흔한 cctv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흠….”
곧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약속장소 맞지?”
이곳이 바로 사전에 이야기했던 약속장소.
이에 레이첼이 그를 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안 그래도 이제 곧….”
그때였다.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쪽에서 검은 세단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세단이 멈춰선 곳은 레이첼 그녀의 바로 앞.
-덜컥.
그와 함께 세단의 문이 열리며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차림의 남녀 둘이 등장하였다.
이어서 그 둘이 일제히 레이첼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 말에 현성이 레이첼과 그 둘을 번갈아봤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피의 왕국에서 보낸 뱀파이어.
동시에 레이첼은 익숙한 듯이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루이, 세라. 둘 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불편한 곳은 없으셨습니까?”
“딱히. 그것보다는 대략적인 내용은 편지로 확인했지?”
그녀의 물음에 그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레이첼님 이십니다. 그런데 이쪽은….”
그대로 둘의 시선이 현성을 향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옆에 있는 현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유현성. 편지에서 말했었지? 손님하나랑 같이 가겠다고.”
“아, 그렇다면 이쪽이 그때 말한…손님이시군요.”
그러면서 루이와 세라가 심상치 않는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분명 듣기로는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소년은 인간일터.
“….”
잠시간의 정적.
잠시 뒤.
그 둘이 서로 눈빛을 공유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뱀파이어라면 모를까.
인간이라면 무조건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역시 바로 경계에 들어가는 건가.’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 상 알 수 있었다.
필시 이 불편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현성 그가 있었다.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다.
‘주인공이 인간임을 알아차리고 경계하는 뱀파이어, 여기서 플레이어의 관건은 얼마나 빨리 이 경계심을 푸는가.’
그대로 남자 쪽, 그러니까 루이가 먼저 현성을 향해 다가가려 하는 순간이었다.
“반갑습니다.”
현성이 싱긋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벌어진 상황.
이에 그가 잠시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이가 헛기침을 하며, 현성을 향해 손을 건넸다.
그러자 현성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앞서 말했듯이 제 이름은 유현성.”
곧바로 현성이 옆에 있는 레이첼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의 경계심을 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이스페리아>의 메인 스토리 전개 상, 플레이어가 택할 방법은 단 하나.
“현재 레이첼과 교제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아, 잘 부탁드립…예?”
현성의 답변과 동시에 루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뱀파이어 세라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현성 바로 옆에 있던 레이첼 역시도 그랬다.
“…흐에?”
레이첼이 두 눈을 깜빡이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리 말 안했구나?”
“아, 아니….”
“부끄러워하긴.”
그대로 현성이 자연스럽게 레이첼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척하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야. 알아서 협조해라.”
그 말에 레이첼이 뒤늦게 방금 전 현성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너, 너….”
그렇다.
<이스페리아>에서 주인공이 쓴 방법은 바로 이것.
레이첼과 사귀는 척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이라면 아무리 뱀파이어들이라고 한들, 쉽사리 주인공을 건들이지 못한다.
무려 피의 왕국의 공주인 레이첼이 직접 초대한 손님이자, 남자친구였다.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는 이 방법을 통해 뱀파이어들의 경계심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뭐 정확히는 경계심을 무너트린다기보다는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 결과만 좋으면 문제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눈앞의 둘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저 당황스런 얼굴들을 보아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 둘이 움찔거리며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바로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동시에 그 둘이 차 뒷좌석을 가리키며 공손하게 현성을 안내했다.
그 모습에 현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현성이 잡은 레이첼의 손을 끌어 당겼다.
“그럼 탈까?”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말을 더듬으면서도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그, 그래.”
그렇게 차에 올라탄 둘.
그대로 잠시 뒤.
레이첼이 현성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이거라면 다른 뱀파이어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
그 말에 레이첼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그럼 우리 부모님 앞에 가서도….”
“정답.”
“이런 씨!”
레이첼이 냅다 현성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세라가 뒷좌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두 분 지금 뭐하시는….”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하하. 연인사이에 흔한 스킨쉽이죠.”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손은 그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힘줄이 솟아있었지만,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두 손을 꽉 잡은 채 애써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일단은 진정하지 않을래?”
“내가 진정하게 생겼….”
그 순간.
현성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협조하면 내 피 준다.”
그 말과 동시에 레이첼의 표정이 급변했다.
-멈칫.
그와 함께 레이첼 그녀도 모르게 서서히 손아귀의 힘이 빠졌다.
만약 이번 한 번 눈 딱 감고 넘어간다면 그 대가로 1회 현성 흡혈권이라니.
그야말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콜?”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현성 그의 피만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그래. 따지고 보면 이번 한 번만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거기다 실제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사귀는 ‘척’일 뿐이잖아? 까짓 거 나중에 캐물으면 헤어졌다고 하면 그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레이첼 그녀는 적당히 이번만 눈감고 맞장구 쳐주면 그 대가로 그때의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이에 레이첼이 침을 삼켰다.
-꿀꺽.
그대로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콜.”
그런 레이첼의 대답과 동시에 현성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그렇게 피의 왕국까지 가는 도중.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는 현성과 레이첼 둘만의 모종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저 그런데….”
운전을 하고 있던 루이가 입을 열었다.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세력을 2개로 나뉘어오라고 하셨죠? 그래서 일단 시키시는 대로 하긴 했지만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의중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레이첼이 옆에 앉아있던 현성을 바라보았다.
오기 전에 세력을 2개로 나누라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현성 그의 부탁이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전에 혹시 다른 세력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런 현성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그가 대답했다.
“아. 다른 세력이라면…저희보다 좀 더 뒤에 간격을 두고 오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주실래요?”
이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갑자기 말입니까?”
“네. 가능하겠습니까?”
“뭐 불가능할거야 없지만 왜….”
그 말에 현성이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했다.
“안 그래도 이제 곧 슬슬 시작할 때거든요.”
“그게 무슨….”
그때였다.
갑작스레 옆 차선에서 트럭한대가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현성과 레이첼이 타고 있는 세단을 향해 돌진했다.
동시에 현성이 레이첼을 끌어당기며 외쳤다.
“다들 충격에 대비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와 함께 현성이 달려오는 트럭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살고 싶으면 말이죠!”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