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위험한 상견례(1)
어두컴컴한 방 안.
오로지 게임기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불빛만이 그 둘을 비추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천천히 레이첼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스윽.
그리고 현성이 레이첼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돌았니?”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의 얼굴을 부여잡고 옆에 있는 베개를 향해 집어던졌다.
동시에 레이첼이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흐겗!!”
그렇게 맥없이 떨어져나간 레이첼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허우적거렸다.
현성은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곧바로 현성이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밤만 되면 목덜미가 쑤셔서 잠을 못 잔다. 그러게 적당히 빨라니까 무슨 사람을 실신직전까지 가도록 빨고 있어.”
“그, 그건….”
“그러면서 뭐? 한 번 더? 아주 정신이 나갔지?”
쉴 새 없이 쏘아지는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입을 삐죽 내밀며 외쳤다.
“너, 넌 뭔가 더 맛있단 말이야!”
“쫄쫄 굶다가 먹으면 뭐든 안 맛있겠냐?”
“씨이…. 진짠데…. ”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억울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오랜만에 먹은 피인만큼 그게 맛없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현성 그의 피는 뭔가 남달랐다.
‘…그 부드러운 목 넘김과 진한 맛.’
현성의 피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존재했다.
그대로 레이첼이 침을 꿀꺽 삼키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운동을 자주해서 그런가?’
그게 아니면 마력을 품고 있어서?
왜 그런 거 있지 않는가.
그냥 돼지고기보다 허브먹인 돼지고기가 더 비싼 것처럼 현성 역시 보통의 인간들에 비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마력도 쓰다 보니 맛이 좋아졌을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왜 돼지가 먹은 허브 값을 내가 내야하는지 몰랐지만, 직접 겪어보니 가치가 있을 수도….’
사뭇 진지해진 레이첼의 표정.
이에 현성이 미간을 구기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나마나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여간 안 된다고 말했어.”
현성이 목덜미를 가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간식을 요구하는 애완동물을 저지하는 것 같은 단호한 모습.
그러자 레이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칫….”
“칫은 무슨. 그래서 아직도 별 소식 없어?”
아무튼 그것도 잠시.
현성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가 말한 소식이란 당연히 피의 왕국에 관한 게 분명했다.
“편지 보낸 지 꽤 지난 거 같은데.”
“이게 다 니가 말한 거 때문이잖아.”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전에 말한 것처럼 준비가 오래 걸리는 데에는 워낙 피의 왕국이 멀리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현성의 부탁 때문.
그는 피의 왕국 측에서 이쪽으로 올 때 반드시 세력을 2개로 나뉘어서 오라고 말했다.
이에 레이첼은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편지에 해당 내용을 포함하여 보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첼 그녀가 알고 있는 현성이라면 분명 뭔가 생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에게 물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물어보자. 도대체 왜 세력을 2개로 나눠서 오라고 했던 거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동시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어디가?”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수업.”
“….”
“오늘은 들어야할 강의가 꽤 많거든.”
그러면서 현성이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상태창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름 : 유현성]
성별 : 남성
나이 : 17
종족 : 인간
클래스 : 힘의 마법사(physical wizard)
업적 : [데일런트를 쓰러트린], [폭풍의 창을 받아낸], [새로운 마도(魔道)의 길을 걷는], [신화를 거머쥔],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 [새로운 주인공], [얼음무덤의 비밀을 알아낸], [악마의 진명을 부른], [철의 권7의 패왕], [거 삽질하기 딱 좋은 날이구만], [수호자를 쓰러트린]
체력 22
지력 20
민첩 18
행운 11
의지 16(+15)
*스킬상세
[파이어 펀치. LV4]
[얼음폭풍. LV4]
특수스킬
[투신의 길. LV2]
고유스킬
[게이머의 감각. MAX]
합동기
[빙혈. LV1]
저번에 골렘을 쓰러트린 것도 그렇고, 평소 트레이닝의 효과로 인해 스텟은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야 빠지지 말고 적당히 아카데미의 진도에 따라가면 그만.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강의?”
“그래. 강의.”
“…아하.”
강의라.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이미 레이첼의 머릿속에서는 수업이란 존재는 사라진지 오래.
허나 현성은 달랐다.
‘성적 관리하려면 열심히 굴러야지….’
그대로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그가 방을 나가기 직전.
현성이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연락 오면 말해줘.”
“…알겠어.”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때는 한판이라도 이겨봐.”
현성이 게임화면을 가리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을 미간을 구겼다.
“너 진짜…!”
그리고 현성을 향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바이바이.”
현성이 재빨리 막타를 치며 등을 돌렸다.
그대로 잠시 뒤.
-철컥.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방 안에는 레이첼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어두컴컴한 방안.
방금 전 현성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조용했나?’
현성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오늘은 익숙하게 느껴져야 할 고요함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에 레이첼이 바닥에 떨어진 패드를 잡았다.
‘됐다. 게임이나 하자.’
하지만 그도 잠시.
패드를 붙잡고 게임을 하려던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패드를 내려놓았다.
-타악.
뭔가 현성이 나가고 나서는 흥이 식은 느낌이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이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수업…같이 들어볼까?”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피의 왕국 측에서 연락이 왔다.
필요한 준비는 전부 끝, 이에 따라 마중 나갈 뱀파이어들을 보냈으니 시간에 맞춰 나오면 된다고 하였다.
“…그런 관계로 오늘 움직일 거야.”
아카데미의 강의실 바로 앞.
레이첼이 현성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오늘이라…준비는 다 끝냈어?”
그 말에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나야 챙길 건 별로 없으니 다 끝냈지.”
그녀가 최우선으로 챙겨야할 것은 정령왕의 술잔.
그 외 나머지는 솔직히 있어도 없어도 큰 상관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현성이었다.
“너야말로 괜찮겠어? 오늘 너…여기서 시험 있다며.”
바로 오늘이 현성 그의 시험 날.
이에 레이첼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출발시간이 30분 뒤라고 했었나?”
“응. 그랬지.”
피의 왕국 측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분 뒤.
그리고 현성의 시험은 1분 뒤 바로 시작.
그대로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시험이 있다는 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
레이첼이 강의실과 그를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준비해도 모자를 판에 시험을 치르고 가겠다니.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이러다 늦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하지만 현성은 타들어가는 레이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 이제 시작하겠다.”
그의 말과 동시에 울리기 시작하는 수업 종.
이에 현성은 자연스럽게 강의실로 들어가며 레이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 봐.”
“자, 잠깐 너….”
“심심하면 이거라도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카라멜 마끼아또.
동시에 레이첼이 얼떨떨하게 커피를 받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무슨 얘도 아니고…!”
“그럼 가볼게!”
그러나 레이첼이 말릴 틈도 없이 현성이 강의실로 들어가고.
자연스레 그녀는 복도 한 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오직 현성 그가 준 카라멜 마끼아또 뿐.
“…하아.”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매만졌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혼자 남겨졌다.
거기다 이번에는 30분 뒤 바로 나가야할 상황.
덕분에 레이첼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이야 진짜….”
레이첼이 강의실로 들어간 현성을 원망하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손에 들린 카라멜 마끼아또를 빤히 바라보았다.
“….”
잠시 뒤.
레이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녀가 조용히 빨대를 물고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 일단 준거니까….’
그러자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카라멜 마끼아또가 그녀의 목을 타고 전해졌다.
이에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 맛은 있네.”
그렇게 현성이 강의실로 들어가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여전히 복도에는 레이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텅 빈 커피 잔이 들려있었다.
“…시험이 끝나려면 아직 80분정도 남았으려나.”
레이첼이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총 시험시간은 90분.
현성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에휴.”
그대로 레이첼이 짧은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드르륵.
강의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을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성.
곧 현성이 레이첼이 들고 있는 텅 빈 커피 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사오길 잘했네.”
그 모습에 문 앞에 서있던 레이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뭐가?”
“시험이라며?”
그녀의 말에 현성이 태연하게 뒤에 있는 강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그래서 다 풀고 왔잖아.”
“…,”
레이첼이 멍하니 그와 강의실을 번갈아보았다.
현성이 시험을 치르고 나온 시간은 불과 10분.
상식적으로 그 사이에 문제를 다 풀고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현성은 달랐다.
그는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큼직한 설정을 비롯한 잡다한 지식을 전부 꿰고 있었으며, 그건 시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들은 수업은 이클레아의 수업.
다른 교수들의 수업이라면 몰라도 그녀의 수업이라면 현성은 눈감고도 그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아예 답을 외우고 다닐 정도.
이에 현성은 보란 듯이 10분 만에 모든 문제를 풀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금.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아직 30분 안 지났지?”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바로 가자.”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의 손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을 타고 현성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기다릴지도 모른다면서? 빨리 가야지.”
“아니 알겠으니까 소, 손은 좀…!”
* * * * *
조금 전, 한창 시험을 치르고 있는 강의실.
그곳에는 이클레아가 맨 앞에 앉아 학생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 강의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그 자체.
“…허어.”
“아니 이걸 어떻게….”
이를 반증하듯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이클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시험은 나름 쉽게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어려웠나?’
모든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이번 시험은 쉽게 냈어요.’
그리고 그건 이클레아 그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있어 이번 시험은 결코 쉬운 난이도가 아니었다.
물론 이클레아가 봤을 때는 쉬울지 몰라도, 그녀는 연금술의 영역에 있어 한 획을 그은 그야말로 천재.
아무리 쉽게 냈다한들, 그녀의 기준은 범인(凡人)의 기준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시험의 난이도는 급상승.
그에 따라 현재 시험은 불지옥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스윽.
학생 하나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성.
이에 이클레아가 그를 향해 말했다.
“다 풀었어?”
“예. 앞에 제출하고 나가면 되죠?”
그런 현성의 말에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놀람 반 의심 반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10분 내에 모든 문제를 푸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보나마나 진즉에 시험을 포기한 게 확실했다.
‘찍었다. 저 새끼 분명히 찍었다.’
‘…그냥 나도 포기하고 나갈까.’
그런 현성의 모습에 학생들은 속으로 이번 시험을 깔끔하게 드랍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
현성은 답안지를 제출하고 보란 듯이 강의실을 나섰다.
-드르륵.
그대로 현성이 강의실을 나가고.
이클레아는 그가 제출한 답안지를 쓰윽 훑어보았다.
“첫 번째도 정답, 두 번째도 맞고 흠…다 정답이네.”
놀랍게도 현성의 답안지는 전부 정답.
만약 다른 학생들이 봤다면 경악했을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하필 그 결과를 아는 것은 이클레아 뿐.
이에 이클레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번 시험은 쉬웠구만. 다음에는 좀 더 어렵게 내도 되겠어.’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