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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75화 (75/240)

075화 정령왕의 술잔(17)

“그렇다면 슬슬 대미를 장식해도 되겠지?”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예전에 말했듯이 <이스페리아>에서는 필살기와 같이 특정기술을 쓸 때면 그에 따라 입력되는 대사가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레이첼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말이 바로 그녀가 필살기를 준비할 때의 대사.

시연의 필살기 오의 : 검무(劍舞)에 이어, 두 번째 필살기를 볼 순간이 찾아왔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지.”

동시에 저 멀리 있는 골렘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골렘의 아래로는 방금 전 레이첼의 공격으로 인한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인지, 박살난 몸의 파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

그 모습에 레이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안 그래도 슬슬 현성의 흡혈을 통해 채운 피가 떨어질 시간이었다.

이에 레이첼은 이번 마지막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생각이었다.

“먼저 시작하도록 하지.”

단호한 그녀의 한마디.

동시에 레이첼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펼쳐졌다.

-펄럭!

날개가 펼쳐지면서 붉은 깃털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신전 바닥에 흥건한 피가 레이첼을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걸로 그녀의 준비는 끝.

이에 현성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타이밍은 알아서 맞출게.”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꼭 내가 뭘 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할지 알고 있다고?

아니 단순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술술 꿰고 있는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성 그가 <이스페리아>를 플레이 하면서 받아온 궁극기가 몇 개인가.

그리고 그중에서는 2막의 보스 레이첼의 궁극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총 3개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궁극기는 <이스페리아>내에서도 상당히 화려하고 범위가 큰 궁극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눈앞을 가득 채우는 붉은 피의 향연.

그게 또 보는 맛이 끝내줬다.

곧 현성이 대답했다.

“꽤나 스케일이 큰 공격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 대답에 레이첼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제법이네. 그럼….”

그대로 레이첼이 골렘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시작해볼까?”

그런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골렘이 달려왔다.

이에 그녀가 재빨리 양 손을 펼쳤다.

그러자 바닥이 크게 요동치더니, 곧 피가 한데 어우러져 붉은 해일을 일으켰다.

-콰아아아!

그야말로 거대한 쓰나미와 같은 광경.

이어서 현성 역시 푸른 창을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양 옆으로는 당장에라도 현성을 집어삼킬 거 같은 붉은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뒤에 레이첼이 있는 한.

피의 파도는 오히려 적의 시야를 가려줄 좋은 수단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현성이 붉은 파도 사이로 모습을 감췄을 때였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거대한 파도가 순식간에 골렘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레이첼이 일으킨 파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철썩!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거대한 해일의 연속.

이에 골렘은 레이첼에게 다가가기는커녕.

앞으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다.

[우, 움직일 수가…!]

그대로 얼마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렸을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골렘이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새빨간 피의 바다 속.

무시할 수 없는 중압감이 온 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해류가 일 듯 움직이는 물결.

바다 속에 미지의 무언가 있었다.

[크르르….]

발밑아래 들리는 울음소리.

이에 골렘이 주춤거렸다.

레이첼의 사역마를 소환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골렘을 한입에 집어 삼킬 정도로 거대한 입이었다.

[이, 이게 무슨…!]

방금 전 봤던 붉은 개와는 그 규모가 달랐다.

심지어 입을 제외한 몸은 보이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빙산의 일각처럼 솟아난 송곳니 뿐.

“바스커빌, 먹어치워.”

그대로 레이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이었다.

그대로 붉은 개가 쩌억 아가리를 벌린 채, 한 입에 골렘을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콰드드득!!

그 사이로 골렘의 몸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동시에 넘실거리던 파도가 일제히 소용돌이치며 위에서 아래로 솟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용오름을 연상케 하는 모습.

-고오오…쿠르르릉!!

폐허가 된 신전에서 솟아오른 용오름은 자비 없이 골렘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공간 전체를 타고 파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이에 골렘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거대한 소용돌이에 묻혀 아무런 소리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레이첼 그녀의 궁극기 바스커빌.

정말이지 누가 작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뱀파이어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2병 스웩이 느껴지는 네이밍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름과는 달리 위력 하나는 가히 가공할 정도.

-쿠오오오!!

그와 동시에 지금.

현성이 나설 차례였다.

그대로 현성이 비스듬히 무너진 기둥을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랐을 때.

현성이 기둥을 밟고 공중을 향해 도약했다.

그런 그의 발아래에는 여전히 레이첼의 궁극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 뿐.’

이에 현성이 헌리스의 창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양 팔에 얼음폭풍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스페리아> 1막의 보스 불의 악마 크루페돈을 쓰러트렸을 당시.

사용했던 헌리스의 기술, 오버 프리즈.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에르시온의 권능이 없어 그 기술을 완벽히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얼음폭풍을 이용한다면 비슷하게나마 흉내 낼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 필요한 건 누적된 데미지를 터트릴 수 있는 단 한 방.

그에 따라 현성의 양팔을 따라 시퍼런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대로 얼음폭풍의 기운이 헌리스의 창끝에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창끝을 타고 모든 기운이 집중되었을 때.

현성은 본능적으로 그 타이밍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가 창을 내지른 순간.

온 몸을 타고 짜릿한 소름이 돋으며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두 개의 스킬이 합쳐집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합동기 : 빙혈(氷血)]

이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합동기.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스킬로 특수한 상황에 생성되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그 특수한 상황이란 각기 다른 두 개의 스킬이 호응을 이룰 때.

예를 들면 분진과 화염이 합쳐져 분진 폭발을 일으킨다거나.

물과 얼음이 만나 빙결상태를 일으킬 때와 같은 경우에 발동하는 스킬이었다.

이 중 현성의 경우는 레이첼의 피와 그의 얼음폭풍이 합쳐진 후자.

거기다 지금 발동한 이 스킬은 현성이 필요로 하던 최후의 일격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합동기는 첫 사용 시, 무조건 치명타가 터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치명타가 터지면 그 데미지는 기존 공격의 2배!’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외쳤다.

“내가 이 맛에 <이스페리아>를 못 끊지!!”

그런 현성의 외침과 함께 합동기 : 빙혈(氷血)이 발동했다.

그와 동시에 소용돌이치던 붉은 피가 얼어붙으며, 사방을 타고 붉은 얼음이 폭발하듯 솟아났다.

-콰가가가각….쩌저저적!!

그대로 피의 소용돌이와 얼음폭풍이 한데 뒤섞이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폐허가 된 신전 중앙에 보이는 것은 오직 가시처럼 솟아난 거대한 붉은 빙산 뿐.

그렇다면 골렘은?

-푸스스.

방금 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골렘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난 지 오래였다.

이를 증명하듯 주변에는 골렘의 파편만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성의 손에 쥐어져있는 반짝이는 푸른 구 형태의 결정.

“저건….”

이를 발견한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저게 바로 골렘의 핵.

그리고 현성이 있는 힘껏 손아귀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쨍그랑!

골렘의 핵이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경쾌한 알림 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그와 함께 현성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수호자 골렘의 핵을 파괴하였습니다.]

[업적달성 : 수호자를 쓰러트린]

[최초로 정령의 신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수호자의 반지를 획득합니다.]

이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호자의 반지]

[등급 : 유니크]

설명 : 정령의 신전에 있던 골렘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반지로, 겉에 새겨진 문양에서 수호자의 단단한 의지가 느껴진다.

*특수 스킬 : 불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수 스킬 : 불굴은 사용자의 체력이 5%이하로 내려갈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불굴.

보다시피 사용자의 체력이 5%이하에만 발동할 수 있는 스킬로.

그 효과는 발동 후 1회에 한하여 어떤 공격이던 무효화시킨다는 것.

‘…무엇보다 한 번 사용하면 파괴되는 허수아비와는 다르게, 반지는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사용가능.’

그야말로 허수아비의 상위 아이템인 격이었다.

이에 현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 하나.

[숨겨진 제단이 개방됩니다.]

동시에 골렘의 뒤로 단단히 세워진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번 던전의 진정한 목적을 이룰 시간이었다.

-쿠르르릉!

잠시 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숨겨진 공간.

단아한 하얀색 대리석으로 꾸며진 제단.

무엇보다도 그런 제단 끝에는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술잔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정령왕의 술잔.’

레이첼이 그토록 원하던 그 아이템이었다.

이에 현성의 뒤에서 감격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드, 드디어…!”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등 뒤에 있던 붉은 날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사르륵.

그대로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는 붉은 깃털.

마지막 궁극기를 쏟아 부은 만큼.

이제 남은 피를 전부 쓴 모양이었다.

“…끝난 거야?”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를 가리켰다.

“보다시피.”

“흐아….”

그런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첼이 거친 한숨을 토해내며 제자리에 드러누웠다.

-털썩!

그대로 레이첼이 눈을 꽉 감고 소리쳤다.

“깼다! 이 개 같은 거!!”

마치 현성을 연상케 하는 모습.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정령왕의 술잔은 무사히 획득 성공.’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오직 하나.

피의 왕국의 군주.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 * * * *

그 후로 일주일 정도가 지난 지금.

아카데미 구석에 위치한 레이첼의 기숙사.

그녀의 방은 여전했다.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는 내부.

빛을 발하는 건 오직 게임기뿐이었다.

허나 달라진 게 하나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니 이게 왜 맞냐고!”

“못 피했으니까 맞지. 쯧.”

“아니거든, 피했거든.”

“아 예, 퍽이나 그러시겠죠.”

“씨이….”

그녀의 방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런 레이첼의 옆에는 현성이 앉아있었다.

얼마 전 성공적으로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한 레이첼은 곧바로 이 소식을 왕국에 알렸다.

무려 레이첼이 근 몇 년간 찾아왔던 아이템이었다.

무엇보다도 뱀파이어 일족의 지긋지긋 저주인 피의 갈증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

이에 왕국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그녀를 불러올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리.

피의 왕국과 아카데미는 워낙 거리가 있다 보니 준비를 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전해왔다.

그런 관계로 둘은 어쩔 수 없이 준비가 끝날 동안 아카데미에서 기다리기로 했으며 그 결과.

레이첼과 현성은 자연스럽게 모여 그녀의 방에서 게임을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Great!]

동시에 찰진 그뤠이트! 라는 음성과 함께 떠오르는 금색폰트.

역시나 이번에도 승자는 현성이었다.

이에 현성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EZ.”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부들거리며 그를 째려봤다.

“치사하게 얍삽이만 쓰냐!”

“응, 실력이죠?”

“제대로 싸웠으면 내가 이겼어.”

“응, 졌죠?”

현성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참다못해 화를 내며 들고 있던 패드를 현성에게 집어던졌다.

“에이씨!”

그대로 날아간 패드는 정확히 현성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뻐억!

이에 현성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머리를 움켜쥐었다.

“거 패드는 왜 던지고 난리야!”

“그야 니가 게임을 좆같이 하니까 그렇지!”

“칭찬 감사.”

“….”

끝까지 깐죽거리는 현성.

그런 그의 모습에 레이첼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넌 진짜 내가 오늘 죽여 버린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덮쳤다.

그 공격(?)에 현성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가 뒤로 넘어갔다.

이에 자연스럽게 레이첼은 현성 위에 올라간 모양새가 되었다.

-움찔.

그 순간이었다.

레이첼의 눈에 들어온 현성의 목덜미.

그런 그의 목을 타고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와 같은 모습.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그때의 맛.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신선한 냄새와 혀끝에 맴도는 그 풍미….’

현성 그의 피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무언가 있었다.

그와 함께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스윽.

그대로 그녀가 현성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먹어도 돼?”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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