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정령왕의 술잔(16)
그런 레이첼의 자태에 현성이 목덜미를 움켜쥐며 히죽 웃었다.
저게 바로 레이첼의 진정한 면모.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과 타오를 듯한 붉은 눈동자.
무엇보다도 조소하고 있는 입가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송곳니.
거기다 그녀의 주변에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검붉은 피까지.
<이스페리아>에서 그가 상대했던 보스시절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신전의 구석에 위치 한 기둥 위.
현성이 아래에 있는 레이첼과 골렘을 번갈아보며 작게 웃었다.
“본격적인 공략 시작이다.”
그와 함께 레이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골렘을 향한 가벼운 손짓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풍경은 도저히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촤아악!
그녀의 발밑 아래.
아지랑이처럼 깔려있던 혈액이 단숨에 불어나 전방을 휩쓸었다.
그 크기만 해도 신전 반절을 채울 정도.
-고오오.
몸집을 불린 채 쇄도하는 피는 말 그대로 붉은 파도와도 같았다.
그대로 피의 파도가 골렘을 집어삼켰다.
그 충격에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저게 바로 레이첼의 사기적인 면모 중 하나.’
단번에 공간을 장악하는 무지막지한 범위공격.
덕분에 그녀의 모습은 <이스페리아> 커뮤니티 내에서도 짤로 많이 돌아다녔다.
그로 인해 형성된 하나의 밈.
‘그게 아마 <피가 없는 곳에서 이정도의 혈둔을…!> 이었지?’
일본의 모 유명 애니메이션에서 따온 대사를 변형한 밈.
그만큼 밈으로도 많이 쓰였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운 피의 파도라니.
“허어….”
이에 현성이 작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골렘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 파도를 온 몸으로 받아낸 골렘은 이미 피에 가려져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사방으로 튀어 올랐던 핏방울들이 공중을 타고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뭉쳐진 혈액들은 저마다 붉은 창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렇게 공중에 생성된 수십, 수백 개의 창.
그리고 레이첼이 검지를 아래로 까닥인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붉은 창들이 일제히 골렘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자 일순간, 신전을 타고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골렘의 육체와 창이 부딪히며 커다란 충격음이 끊이지 않았다.
-쾅! 콰광! 콰앙!
마치 방금 전 현성이 고대의 마도서를 사용했을 당시를 착각하게 하는 충격.
물론 그 위력은 마도서보다는 덜 했을 테지만, 레이첼의 공격은 이제야 시동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쏟아져 내리던 창이 멎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있는 골렘의 몸 이곳저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나있었다.
심지어는 균열을 남긴 채 갈라진 부분까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맨 처음 레이첼이 골렘을 상대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위력.
이에 골렘이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를 타고 느껴지는 무게감.
하지만 레이첼은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까짓 게 알아서 뭐하겠어.”
레이첼의 도발.
이에 골렘이 몸을 털어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침입자 주제에 건방지구나!]
그와 함께 골렘이 깍지를 낀 채.
곧바로 레이첼이 있는 곳을 향해 주먹을 내려찍었다.
-부우웅!
그대로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골렘의 주먹이 레이첼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이 눈 깜짝할 새 박쥐로 변해 사라졌다.
-퍼드득!
그렇게 흩어진 박쥐들은 다시 허공에 뭉치기 시작했다.
곧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레이첼.
그런 그녀는 등에 붉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흐음, 도대체 어디를 노리는 건지 모르겠군.”
레이첼이 골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뭐 됐다. 어차피 나도 직접 내 손을 더럽히기 싫었으니….”
그리고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흥건한 피 웅덩이들이 꿈틀거렸다.
그대로 잠시 뒤.
피 웅덩이를 타고 커다란 붉은 개들이 기어 나왔다.
[으르르르….]
마치 피로 이루어진 화염늑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
어느새 붉은 개들은 골렘의 주위를 에워싸며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기둥 위에서 모든 전투를 지켜보던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나왔군.’
저게 바로 그녀의 사역마.
실제로 레이첼과 보스전을 진행할 경우 나오는 그녀의 주요 패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레이첼을 상대할 때 가장 거슬리는 패턴이 바로 이것이었다.
-따악.
그대로 공중에 떠있던 레이첼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붉은 개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골렘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달려드는 개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숫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크르릉! 커엉!]
사방에서 달려드는 붉은 개.
한 마리를 처리했다 싶으면 아래에 깔린 피 웅덩이에서 다른 사역마가 나와 달려들었다.
이에 점점 골렘은 수적 열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크, 크윽…!]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골렘과 레이첼을 번갈아보았다.
괜히 이 기술이 가장 거슬리는 패턴인 게 아니었다.
피 웅덩이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붉은 개들.
거기다 하나를 쓰러트린다 한들.
레이첼에게 돌아가는 타격은 제로.
근본적으로 이걸 파훼하기 위해서는 그 술자인 레이첼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 많은 수의 사역마들 뚫고 레이첼에게 도달하는 것 자체가 고역.’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힐링포션을 꺼내들었다.
‘그럼 난 그동안 꿀이나 빨랜다.’
<이스페리아>에서 흔치 않는 꿀빨 타임.
이를 현성이 놓칠 리가 없었다.
곧바로 그가 힐링 포션을 들이키며 전투를 지켜보았다.
* * * * *
그 사이 골렘은 어느새 붉은 개들에게 뒤덮인 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골렘을 덮은 붉은 개들이 들썩들썩 거리더니 곧 그 속에서 분노에 찬 골렘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전부 다 신성한 정령왕의 신전에서 꺼지지 못할까!]
그와 함께 골렘이 자신을 포위한 붉은 개들이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충격에 골렘의 몸에 들러붙어있던 사역마들이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쿠드득!
골렘이 단숨에 쓰러진 기둥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바로 공중에 떠있는 레이첼을 향해 집어던졌다.
채 반응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
이에 레이첼이 기둥을 맞고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콰아앙!!
잠시 뒤.
벽에 부딪힌 레이첼이 천천히 일어났다.
동시에 벽의 파편이 투두둑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기다 꽤 충격이 컸던지 역으로 기괴하게 꺾인 팔.
“…쯧.”
이에 레이첼이 작게 혀를 차며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팔이 꺾인 고통보다는 불쾌함이 더욱 강해보였다.
“감히 내게 상처를 내?”
레이첼이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사역마들이 일제히 사라지며, 피가 되어 그녀의 주위를 뒤덮었다.
-스르륵.
그 순간이었다.
상처가 나있던 레이첼의 몸이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우드득! 꾸득!
곧 꺾인 그녀의 팔이 살벌한 뼈 소리를 내며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에 골렘이 움찔거리며 낭패라는 듯 주먹을 꾹 쥐었다.
[제기랄….]
하지만 레이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타고 모여드는 붉은 피.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네놈이 내게 상처를 입혔으니, 나도 구멍하나 정도 뚫어야 공평하겠지?”
레이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팔에는 어느새 거대한 괴물의 팔을 연상케 하는 갑주가 둘러져있었다.
그리고 레이첼이 발을 내딛은 순간.
-스팟!
레이첼이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착각할 정도 빠른 속도.
그렇게 순식간에 골렘을 향해 쇄도한 레이첼이 팔을 휘둘렀다.
-부웅!
그와 동시에 바닥에 깔린 붉은 피가 가시처럼 솟아났다.
솟아난 가시들은 가차 없이 골렘의 몸을 뚫어버리며 단번에 그의 몸을 속박했다.
이에 골렘은 꼼짝없이 묶인 상태.
[…?!]
그리고 그런 골렘의 앞에는 레이첼이 주먹을 당긴 채.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
“좋아. 딱 좋군.”
그와 함께 레이첼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팔을 타고 붉은 피가 드릴처럼 소용돌이쳤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골렘의 몸 정중앙.
그때였다.
레이첼의 주먹이 골렘에게 꽂히기 무섭게 마치 단단한 암석이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신전 가득 울려 퍼졌다.
-콰가가가각!!
그와 함께 사방으로 흩날리는 골렘의 파편.
그 충격에 골렘이 몸을 비틀며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악!!]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레이첼의 가시에 속박된 상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쿠웅!
육중한 소리와 동시에 골렘이 몸이 무너졌다.
그런 골렘의 몸 정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이에 레이첼이 조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직성이 풀리는군.”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위력.
그 모습에 현성이 과거 <이스페리아>에서 레이첼을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미친 개사기 캐릭터.’
공격은 물론 자가 회복부터 사역마 소환, 그리고 근접전까지.
레이첼 그녀는 모든 상황에서 압도적인 포텐셜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그 위력은 어떠한가.
‘지금은 아군이라 다행이지, 만약에 적이었으면….’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대로 저런 걸 상대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러자 곧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그대로 레이첼이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이쯤 되면 그만 지켜보고 같이 싸우지? 아무리 이 몸이 강하다한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뭐?”
그 말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피 한 번 빨았다고 저 기고만장해진 태도 좀 보아라.
‘그만큼 강력한건 인정한다만….’
곧 현성이 목덜미를 가리키며 보란 듯이 들고 있던 힐링포션을 흔들었다.
“누구누구께서 워낙 거하게 식사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체력회복이 덜 됐거든.”
“흥. 죽기 전에 멈춘 것만 해도 감사히 생각해라.”
“퍽이나.”
현성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중앙이 꿰뚫려 비틀거리던 골렘의 안광이 번쩍거렸다.
-고오오.
그리고 골렘의 바로 앞에 서있는 것은 바로 레이첼.
그대로 골렘이 이를 악물고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현성이 마저 마시던 힐링포션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빠른 속도로 골렘과 레이첼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골렘의 주먹이 레이첼을 내려찍기 직전.
-쩌어엉!
현성이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골렘의 주먹을 막아냈다.
무엇보다 그의 주의로 흩날리는 새하얀 얼음 조각.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푸른 창이 들려있었다.
“…안 그래도 이제 곧 내려갈 생각이었어.”
그것은 다름 아닌 얼음의 기사 헌리스의 창.
그 창은 크루페돈과의 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시린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역시 괜히 유니크 아이템이 아니었다.
“…안 나서도 내가 막을 수 있었어.”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막아줘도 뭐래.”
“흥.”
아무튼 현성이 그대로 골렘의 주먹을 밀어냈다.
-터엉!
그와 함께 뒤로 주춤거리며 밀려난 골렘.
현성이 그런 골렘을 바라보며 창을 빙글 돌리고는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고.”
“재촉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어련하시겠어.”
그 말에 레이첼이 미간을 구겼다.
“이게 진짜….”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고. 이번에는 확실히 끝내자고.”
“…알고 있어.”
전에 말했듯이 골렘을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끝없이 재생하는 몬스터.
그리고 지금 골렘은 정중앙을 꿰뚫었음에도 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
이에 현성이 푸른 창을 꾹 쥐고 골렘을 주시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