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정령왕의 술잔(15)
“어때? 들어볼래?”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감지한 그녀가 움찔거렸다.
이번에도 이 패턴이었다.
항상 현성이 저런 눈빛과 미소로 자신을 바라볼 때면 높은 확률로 이상한 짓거리가 펼쳐졌다.
물론 그 결과는 좋았지만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감출 수는 없는 법.
레이첼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 안할래.”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듣고 나면 다를걸?”
“….”
“이대로 정령왕의 술잔을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잖아.”
현성의 말과 동시에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몇 번씩이나 똑같은 패턴이었지만, 그걸 알고도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종족의 사명은 그녀에게 있어 의미가 남달랐다.
-꾸욱.
이에 결국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함정에서 빠져나온 골렘이 그녀를 향해 돌진해왔다.
“…!”
그 모습에 현성이 재빨리 소리쳤다.
“어떻게 할 거야! 빨리 말해!”
그 와중에도 골렘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로 거리가 줄어들고 500m, 300m, 100m.
그리고 마침내 골렘이 팔을 휘두르기 직전.
“에이씨…!”
레이첼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하, 할게! 하면 될 거 아냐!”
폐허가 된 신전을 타고 레이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은 선택이야.”
그와 함께 현성이 마도서를 펼치고 레이첼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현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꽉 잡아.”
그런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도서를 타고 푸른빛이 번쩍였다.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융단폭격은 불가능.
그러나 단순한 마법 한 두 개쯤은 별 문제 없었다.
그리고 현성이 선택한 마법은 다름 아닌.
“텔레포트.”
동시에 푸른 입자가 현성과 레이첼의 몸을 휘감더니 잠시 뒤.
그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어서 방금 전까지 현성과 레이첼이 있던 곳에 꽂히는 골렘의 주먹.
-콰앙!
그대로 바닥을 타고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이미 둘은 어딘가로 순간 이동한 상태.
이에 골렘이 마구잡이로 애꿎은 바닥을 연신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쾅! 콰광! 콰앙!
그때였다.
신전 구석에 위치한 기둥 위.
그런 골렘을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중얼거렸다.
“…살벌하네.”
그러자 뒤늦게 레이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현성이 레이첼과 이동한 곳은 골렘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난 신전의 끝.
그대로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당분간은 골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미리 머리를 박살내둔 탓에 골렘의 머리가 재생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
그 사실을 알려주듯 현재 골렘의 몸 위로는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골렘의 인지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 말을 곧 머리를 재생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에 레이첼이 긴장한 듯 침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
“방법? 별거 없어.”
그대로 현성이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와이셔츠만 입은 현성이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흐에?!”
그 모습에 잔뜩 당황한 레이첼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 뭐하는 거야!”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하긴. 단추 풀고 있지.”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내 앞에서…!”
“뭐래. 너 생각해서 이러는 건데.”
그렇게 말하는 현성이 천천히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기둥 위에 서있는 레이첼과 현성.
이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으나.
-터억.
레이첼의 뒤는 벽으로 막혀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은 현성이 자리하고 있는 상황.
그대로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 자, 잠깐! 야!”
덕분에 지금 레이첼은 그야말로 정신이 날아갈 정도였다.
그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게임만 했던 그녀에게 지금은 자극(?)이 너무 강했다.
게다가 전투 중에 벌어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점점 현성이 다가올수록 레이첼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에 결국 그녀가 두 손을 꼬옥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후로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너 뭐하냐?”
돌아온 것은 어이없다는 현성의 한 마디.
그 말에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현성의 목덜미였다.
“엣.”
그 모습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뚱멀뚱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성이 자신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빨라고.”
“…뭐?”
“피 빨라고.”
그렇다.
현성이 말한 방법이란 바로 흡혈.
방금 전에 그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의’ 현성과 그녀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미래의 레이첼이라면 달랐다.
레이첼, 그녀가 누군가.
무려 <이스페리아> 2막의 보스.
이 말은 곧 그녀에게는 크루페돈 만큼의 포텐셜이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잠재된 포텐셜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피.
즉 혈액이었다.
‘피가 뱀파이어의 생명과 힘이 근원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
여기서 2막 보스의 레이첼과 지금의 레이첼을 비교했을 때.
지금의 그녀에게 모자란 것은 단지 혈액뿐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의 레이첼에게 잠재된 포텐셜을 이끌어낼 만큼의 충분한 혈액이 제공된다면?
‘…<이스페리아> 2막의 보스, 피의 여제, 레이첼이 재림한다는 거지.’
현성의 계산상, 대략 레이첼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의 피를 빤다면 골렘의 방어를 뚫기에는 충분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이에 그녀가 현성과 그의 목덜미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럼 너 설마 그 방법이라는 게 이거였어?”
“정답.”
이어서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듣고 나면 다를 거라고.”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었다.
우선 지금까지와는 방법과는 다르게 그나마 제일 정상적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흡혈이라니.
안 그래도 싱싱한 피를 먹어보지 못한지 얼마나 오래 지났던가.
그만큼 지금 눈앞의 현성은 그야말로 최고의 식사.
“….”
그대로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방금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마치 눈 깜빡이는 걸 의식하면 그때부터 신경 쓰이는 것과 같이, 한 번 흡혈을 의식했더니 참아왔던 갈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비유하자면 지금 그녀의 상태는 단식 중 치킨을 마주한 기분.
이미 레이첼의 몸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과연 내가 중간에 멈출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절제.
한 번 피 맛을 본 뱀파이어는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레이첼 그녀도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간만에 피 맛을 본다면 레이첼은 정신없이 흡혈상태에 들어갈 터.
그만큼 중간에 멈추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레이첼이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찰나.
“…뭘 고민해.”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이거 아니면 방법 없어. 거기다 사실은….”
그대로 현성이 작게 조소하며 레이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도 사실 먹고 싶잖아.”
허를 찌르는 현성의 말.
-움찔!
이에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쥔 채 현성을 째려보았다.
‘이…이…요망한 것….’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현성의 펄떡거리는 동맥을 물어뜯고 싶었다.
와이셔츠 보이는 저 쇄골이며, 쇄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까지.
그야말로 레이첼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너 후회안하지?”
“물론.”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레이첼이 뭘 고민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성이 견뎌야 할 부분.
‘까짓 거 안 되면 당수라도 쳐서 기절시키면 그만.’
막말로 위험을 느낀다면 그때 가서 대처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험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현성은 이 도박수로 인해 얻을 이득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
“…그럼 하, 한다?”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이대로 더 시간을 끌면 그녀 스스로 못 버틸 거 같았다.
그런 레이첼의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바로 해도 좋아.”
현성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에 레이첼이 천천히 현성의 목덜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침내.
-콰득!
레이첼이 현성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을 타고 들어오는 신선한 피.
그 향기와 맛에 레이첼이 흥분한 듯 움찔거렸다.
“흐읏, 하아….”
어느새 들려오는 것은 레이첼이 현성의 피를 마시는 소리 뿐.
그만큼 간만에 마시는 피의 맛은 가히 쾌락 그 자체라고 부를 법했다.
그 모습에 현성은 레이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천히…흥분하지 말고….”
그런 현성의 눈앞으로는 메시지창이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캐릭터의 체력이 9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8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7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현성의 HP.
그럴수록 레이첼은 그의 피를 탐닉하며 격정적인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흡혈에 몰두한 모습.
[캐릭터의 체력이 5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3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멈춰야할 타이밍이 다가왔다.
이에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레이첼? 이제…슬슬….”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터업.
레이첼이 현성을 껴안으며 더더욱 깊이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동시에 현성이 미간을 구기며 움찔거렸다.
“큭…!”
그 와중에도 현성의 체력은 깎여가고 있었다.
그가 눈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캐릭터의 체력이 10%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남은 체력은 벌써 10%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결국 현성이 작게 혀를 차며 강제로 레이첼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거기냐!!]
저 멀리서 머리의 재생을 끝마친 골렘이 현성과 레이첼을 향해 달려왔다.
그대로 골렘이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나.
마침내 흡혈을 끝낸 레이첼이 입을 떼었다.
“하아….”
진한 한숨.
그런 그녀의 한숨을 타고 짙은 혈향(血香)이 퍼져 나왔다.
동시에 골렘의 주먹이 닿기 일보직전.
“방해잖아.”
레이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그녀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붉은 피가 장막을 펼치듯 솟아오르며 골렘의 주먹과 격돌했다.
그 충격에 신전이 울릴 정도였지만, 붉은 피의 장막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밀리는 건 골렘의 주먹.
[…이, 이건?!]
이에 골렘이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
레이첼이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그대로 레이첼이 골렘을 향해 조소하며 말했다.
“내 만찬을 방해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폐허가 된 신전 아래.
레이첼이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이스페리아> 2막의 보스, 피의 여제 그 자체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