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정령왕의 술잔(14)
날아오는 붉은 광선.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진 현성.
그 찰나에 가까운 시간 속, 레이첼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스으으.
광선의 충격으로 무너지는 바닥.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폭발하는 빛.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사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생각이 레이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수많은 생각들은 곧 하나의 감각으로 합쳐졌다.
온 몸을 타고 느껴지는 불길함.
-움찔!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
모든 오감이 보내는 쉴 새 없는 경고.
이에 레이첼이 그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는다.”
동시에 무대가 막을 내리듯.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니, 절대로 죽게 두지 않아.”
나지막이 들려온 현성의 목소리.
그런 레이첼의 앞에는 현성 그가 서있었다.
“현…성?”
멍하니 중얼거리는 레이첼.
이에 현성이 언제나 그랬듯, 보란 듯이 히죽 웃으며 외쳤다.
“감히 누구 맘대로 죽어!”
그때였다.
현성의 양 손 끝에 무언가 번쩍거리더니, 그대로 그 빛이 날아오는 붉은 광선과 격돌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아앙…콰가가가각!!
마치 드래곤이 울부짖는 듯 찢어지는 소리.
거기다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은 육중한 울림이 멎지 않았다.
그 충격에 순간 레이첼이 숨을 멈출 정도였다.
그리고 그도 잠시.
“…흣!”
레이첼이 덜컥 숨을 들이쉬었다.
그와 함께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모든 감각이 한 번에 느껴지며 온 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찌릿!
머지않아 제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다름 아닌.
양 갈래로 갈라지는 붉은 광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은 바로 현성.
“지금 이게 다 무슨….”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렸다.
쏘아진 붉은 광선은 제 아무리 현성 그라도 막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허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붉은 광선을 막아낸 현성.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살아있는 자신.
“…어떻게?”
실제로 뱀파이어 특유의 기감은 틀리지 않았다.
골렘이 쏜 붉은 광선은 말 그대로 즉사기.
보통이라면 그녀는 물론이거니, 현성은 그대로 붉은 광선에 휩싸여 죽었어야 할 터.
그러나 한 가지 변수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서있는 유현성이라는 자.
그는 도저히 ‘보통’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러게 내가 말했지?”
홍해처럼 갈라지는 붉은 광선 사이.
현성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절대 죽게 두지 않는다고.”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왜 그렇게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를 만난 건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다니.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한 걸까.
그 순간이었다.
“…난 니가 없으면 안 되거든.”
현성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동시에 레이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어서 온 몸을 타고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전율.
“너…너 그게 무슨….”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레이첼.
그러나 방금 전 현성에게서는 강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대로 그가 양 팔에 힘을 주며 외쳤다.
“그러니까 일단은 여길 클리어하고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양 손에는 허름한 허수아비가 들려있었다.
* * * * *
잠시 시간을 돌려 레이첼에게 붉은 광선이 쏘아지기 직전.
그러니까 골렘이 즉사기를 날린 그 순간.
현성의 머릿속은 지금껏 없던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핵을 파괴하지 못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현성이 지금껏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느낀 사실은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그리 운이 좋지 않다는 것.
남들은 한 번에 먹는 아이템을 그는 수십, 수백 번의 트라이 끝에 먹는다거나.
지금처럼 80%확률로 있는 골렘의 핵을 박살내지 못한다거나.
현성 그는 운빨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똥손 중의 똥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현성은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있었다.
맨 첫 번째, 혹여나 골렘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경우부터 80%확률로 있는 핵을 박살내지 못하고 20% 역배의 늪에 빠질 때까지.
지금은 단지 그 20%의 확률에 걸린 것뿐이었다.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90%의 확률도 실패했던 게 현성이었다.
‘…이제 와서 80%따위에 놀랄까.’
그렇기 때문에 현성은 레이첼이 움직이지 못하는 절제절명의 상황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왜?
언제나 그렇듯 <이스페리아>의 썩은 물인 그에게는 해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해답은 다름 아닌 허름한 허수아비.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훈련용 허수아비였다.
여기서 허수아비의 출처는 아카데미 구 건물, 그러니까 공개대련 전 시연에게 부탁해 들어간 구식 훈련장이었다.
당시 현성은 그곳에서 허수아비를 이용해 모든 스텟을 10까지 올리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후 아무도 몰래 꽁쳐 온 훈련용 허수아비.
만약 그때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멀쩡한 신식 훈련장을 두고 구식 훈련장을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젠 허수아비까지 가져오다니.
그야말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현성은 알고 있었다.
이 훈련용 허수아비에는 스텟을 올려주는 것 말고도 숨겨진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 효과는 다름 아닌.
‘1회에 한해 어떤 공격이든 막아낸다는 것.’
그 원리는 간단했다.
본디 <이스페리아>에서의 훈련용 허수아비의 효과는 이러했다.
‘무슨 짓을 해도 데미지는 1밖에 박히지 않으며, 그 외 효과는 전무(全無).’
훈련용으로 제작된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허나 한창 광기에 젖어있던 과거의 현성은 여기서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바로 ‘무슨 짓을 해도 데미지는 1밖에 박히지 않는다.’라는 문장.
이를 바꿔 말하자면 아무리 강한 공격을 날린다 한들.
허수아비에게는 단 1의 데미지밖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후 훈련용 허수아비를 뽑아 직접 실험해봤고 그 결과는 대성공.’
그야말로 <이스페리아>에서 훈련용 허수아비는 최고의 방패이자, 신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사용횟수는 단 한 번 뿐 이지만 그거라면 충분했다.
한 번에 한해 어떤 공격이든 최고의 방패?
‘아, 이건 절대 못 참지!’
현성이 군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그대로였다.
골렘의 붉은 광선을 맞고도 당당하게 버티는 이 아름다운 허수아비의 자태를 보아라!
-콰가가가각!
지금 이 순간조차 허수아비는 굳건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누구든 이 모습을 본다면 허수아비의 아름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골렘을 바라보았다.
‘즉사기? 어차피 허수아비 선에서 정리 가능하다 이거야.’
그런 현성의 눈은 이미 반쯤 광기에 젖어 있었다.
지금만큼 허름한 허수아비는 그에게 있어 신이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이게 바로 <이스페리아>의 화석이자 망령으로 불리던 자의 진가였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쏘아지던 붉은 광선이 점점 잦아들고 마침내 완전히 멈췄을 때.
비로소 현성이 들고 있던 허수아비를 내려놓았다.
-푸스스.
그와 동시에 먼지처럼 흩어져 내리는 허수아비.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기도를 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소서. 나의 1회용 신이시여.”
“….”
그리고 그런 현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이첼.
그대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역시 얜 인간은 아니야.’
아무튼 그것도 잠시.
현성이 가볍게 손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주변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
붉은 광선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흉하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깔려있던 대리석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
그만큼 즉사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만약 허수아비가 없었다면 나와 레이첼 역시 한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겠지.’
이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저 멀리 있던 골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그극…!
어느새 현성이 판 함정은 빠져나온 지 오래였다.
동시에 그런 폐허가 된 신전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골렘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였다.
현성이 골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 영상미 한 번 끝내주네.”
그러면서 현성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남은 건 골렘을 상대하는 일.
이에 현성의 옆에 있던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핵의 위치부터 알아내야겠지.”
“위치는 알고 있어?”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머리에 핵이 없는 이상. 나머지 위치는 전부 다 랜덤이야.”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80% 확률에서 실패했다면 남은 건 정말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답에 레이첼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
“팔, 다리, 심장.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있어.”
“그렇다면….”
현성이 골렘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되는대로 다 찔러봐야한다는 소리지. 뭐.”
“이런 씨….”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게임이라도 이렇게 만들었으면 진즉 접었다.”
레이첼이 무심코 던진 묵직한 말.
이에 현성은 왠지 모르게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진즉에 접을 걸 그랬나.”
“응? 뭐라고?”
“아냐. 그냥 혼잣말.”
현성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도 잠시.
그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어쩌겠냐.”
결국은 현성 그가 선택한 이스페리아.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현성이 골렘을 주시했다.
“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이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다시 한 번 마도서를 쓰면 되는 거 아냐?”
“아니. 그건 좀 힘들걸.”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마도서를 흔들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방금 전만큼 출력은 절대 안 나와.”
확실히 이번 공략의 열쇠가 고대의 마도서인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마도서는 만능이 아니었다.
마도서에 내장된 마법을 전부 다 쏟아낸 지금.
마법이 충전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골렘의 발이 풀린 지금. 방금 전처럼 마법을 난사한다고 한들 그대로 다 맞아줄 리가 없거든.”
그건 바로 골렘의 상태.
마법을 난사할 당시, 골렘은 현성의 함정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함정에서 벗어났다면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골렘이 순순히 마법을 맞아줄 리가 없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마도서가 아니라면 골렘의 방어를 뚫기는 불가능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동안 보여줬던 그의 모습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러나 현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없어. 지금 나랑 너만으로는 불가능해.”
“…뭐?”
이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그의 입에서 불가능이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다.
곧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이대로 정령의 술잔은 포기해야한다고?’
그리고 그 순간.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지금’의 나와 너로는 무리야.”
“뭐? 그게 무슨….”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고.”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골렘을 쓰러트릴 유일한 방법.”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