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정령왕의 술잔(11)
성인 남성 여럿정도는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크기의 통로.
레이첼이 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기가 니가 말한 그곳이야?”
“맞아. 하마터면 여길 발견하기도 전에 그대로 묻힐 뻔했지만 말이지.”
현성이 방금 전 뚫고 내려온 통로 위를 바라봤다.
그런 위쪽에는 파고 온 구멍은커녕 작은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 아래 잔뜩 쌓여있는 흙무더기 뿐.
-푸스스.
아무래도 현성이 뚫고 내려온 통로는 던전 변형이 시작됨과 동시에 쏟아져 내린 흙으로 전부 막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조금만 늦었다면 현성을 물론 레이첼 역시 저 흙속에 매장되었을 터.
“…살아있는 게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레이첼이 높이 솟아있는 흙무더기를 흘깃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령왕의 술잔은 물론이며, 술잔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죽을 뻔했다.
거기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게 삽질이라니.
만약 그대로 묻혔으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아무리 못해도 정령왕의 술잔은 만져보고 가야했다.
아무튼 그런 생각도 잠시.
“근데 넌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지하미궁 아래에 통로를 뚫어서 돌파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보통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설사 세기의 곤충학자 파브르가 환생한다 해도 거대 땅강아지의 통로를 찾아 길을 뚫을 생각은 못했을 터.
그만큼 현성이 해낸 결과는 단순히 경이로움을 넘어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대충 그동안 배웠던 생태지식이 빛을 발했다고 해둘게.”
“아카데미에서 그런 것도 가르친단 말이야?”
그 말에 레이첼이 작게 감탄사를 토해내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만 들으면 넌 아카데미 안다니는 줄 알겠다?”
여기서 혹시나 싶어 짚고 넘어가자면 레이첼도 일단은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다만 학생치고 드럽게 수업을 듣지 않을 뿐.
이에 레이첼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어차피 술잔만 얻으면 상관없단 말이야….”
애초에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 해본 것도.
같이 시간을 보낸 것도.
전부 현성이 처음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친구든 뭐든 관계를 만든다 해도 그녀의 말마따나 결국에는 헤어질 운명.
굳이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그녀는 뱀파이어.
애초의 인간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레이첼의 눈앞에 있는 현성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사실 알고 보니 이종족이었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레이첼이 현성을 빤히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지금껏 보여준 능력은 물론 보통의 인간이라면 평생 모를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잠깐…생각해보니 이번 일을 도와준다며 내건 조건이 우리 부모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거였지?’
그렇다면 설마 현성은 뱀파이어 종족과 교류를 노리는 이종족?
찬찬히 되짚어보니 그리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충분히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나처럼 종족의 사명을 가지고 접근한 거라거나….’
실제로 이종족 사이에는 이런 일이 꽤 있다고 들었었다.
심지어는 종족의 미래를 위해 정략결혼을 하는 종족까지 있었다.
‘잠깐 그렇다면….’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흘깃 바라보았다.
‘…나와의 정략결혼을 노리고?’
그럼 자연스레 현성 그가 자신의 부모님과 만남을 원하는 이유도 설명되었다.
‘상견례?!’
그렇게 한 번 시작된 레이첼의 의심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그녀의 삽질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머나먼 미래의 일.
지금 당장 밝혀질 일은 아니었다.
“이제야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가는군. 이런 파렴치한….”
그리고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에 현성이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쯧.”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동시에 현성이 그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따악!
그러자 레이첼이 비명이 내지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악!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그 말에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냥 뭔가 기분 나빠서.”
“씨이….”
단호한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이마를 문질거리며 그를 째려봤다.
그대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 진짜 두고 봐….”
“아. 예.”
이에 현성이 그동안 그래왔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통로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우선은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그런 현성의 손에는 어느새 녹색 결정이 들려있었다.
이미 거대 땅강아지의 통로에 들어왔겠다.
이제 남은 것은 녹색 결정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쭉 걸어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순조롭게 지하통로를 지나가던 레이첼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저 멀리 어둠 속.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키르륵….]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거대 땅강아지들의 울음소리.
이에 레이첼이 옆에 있던 현성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작게 속닥거렸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기로 오면 싸울 일 없다며. 근데 왜 저 앞에 쟤들이 있는데?!”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앞을 흘깃 바라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땅강아지 굴에 땅강아지가 있는 게 뭐가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순간이었다.
앞에 있던 땅강아지들이 현성과 레이첼을 향해 다가왔다.
이에 레이첼이 재빨리 다른 길은 없는지 찾아봤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외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레이첼이 어쩔 수 없이 새끼 손가락을 입에 가져대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가락을 깨물기 직전.
“가만히 있어.”
현성이 레이첼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을 따라 현성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이쪽으로.”
현성이 레이첼의 손을 끌며 벽 쪽으로 붙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가오던 땅강아지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현성과 레이첼을 지나쳐 기어갔다.
-스윽.
그 모습에 레이첼이 멍하니 현성과 지나간 땅강아지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대로 땅강아지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것도 안했어.”
그러면서 현성이 방금 전 땅강아지들이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통로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별다른 소리만 내지 앉으면 알아서 그냥 지나가더라고.”
“…뭐?”
“땅강아지들이 공격하는 조건 자체가 보통 ‘위’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감지하고 공격하거든. 그래서 같은 굴에 있으면 우리가 먼저 땅강아지를 자극하지 않는 한. 땅강아지 쪽에서 나서서 공격하는 경우는 없더라?”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은 눈빛.
실제로 레이첼은 현재 현성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무슨 이런 거까지….’
이쯤 되면 그는 모르는 게 무엇인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거기다 줄곧 여유로운 저 태도.
곧바로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너 꼭 무슨 예전에 여기 와본 것처럼 말한다?”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방금 전과 같이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배웠던 생태지식 덕분이지.”
“흐음….”
그러자 레이첼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태지식덕분이라.
아마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생각보다 꽤나 높은 질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설마하니 이런 사실까지 가르쳐줄 줄이야….’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나도 한번 들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뭔가 알아차린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동시에 급속도로 붉어지는 뺨.
그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이에 레이첼이 머뭇거리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손.”
“뭐?”
“이, 이제 손 놓아도 되잖아.”
그녀의 말에 현성이 뒤늦게 자신이 레이첼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현성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 미안. 계속 잡고 있는 줄 몰랐네. 근데 너 손 진짜 차갑더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레이첼은 피부도 그렇고 손도 유독 새하얗긴 했다.
아무래도 피가 없어서 그런 모양 같았다.
그 말에 레이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넌 손 따뜻해서 좋겠다.”
“따뜻하다고?”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한 박자 늦게 움찔거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안 그래도 붉어진 뺨이 더욱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방금 전 정략결혼을 노린 게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겹쳐 계속 현성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서, 설마 진짜 날 노리고 온 건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거절해야하나? 그게 아니면 받아들여야하나?
그러나 그런 그녀와 달리 현성은 딱히 별 생각 없는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피 모자라면 말해라.”
“뭐, 뭐라고?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아니 이제 곧 보스룸이니까 적당히 잘 조절하라고.”
“….”
이에 레이첼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현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뻐억!
동시에 현성이 휘청거리며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바라봤다.
“아우씨! 뭐하는 거야?”
그러자 레이첼이 팔짱을 낀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냥 기분 나빠서.”
“거 참 성격 한 번….”
현성이 자신의 정강이를 털어내며 툴툴거렸다.
그대로 또 얼마나 지났을까.
앞으로 걸어가던 현성이 주변을 둘러봤다.
‘흐음,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그 메시지는 다름 아닌.
[지하 미궁을 클리어 했습니다.]
[보스룸에 진입하였습니다.]
지하 미궁이 끝났음을 알림과 동시에 보스룸 진입을 알리는 메시지.
이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다 싶었더니 그의 예상이 맞았다.
“도착했다.”
“…뭐?”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건 여전히 흙 뿐.
그러자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말했다.
“어디에 도착했다는 거야?”
“어디긴 보스룸이지.”
“근데 주변은 여전히 똑같은데?”
“당연하지.”
그 질문에 현성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보스룸은 바로 위거든.”
현재 현성과 레이첼이 있는 곳은 아직 거대 땅강아지의 통로.
그에 따라 방금 전 메시지가 말한 보스룸은 다름 아닌 바로 한 층 위.
즉 이 위에 보스가 있다.
“…그럼 정령왕의 술잔도?”
“이 위에 있지.”
동시에 레이첼의 얼굴을 타고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몇 년간 찾아왔던 정령왕의 술잔이 바로 이 위에 있다니.
하지만 그도 잠시.
“….”
레이첼이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정령왕의 술잔을 얻기 위해서는 보스를 잡아야했다.
이에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위로 올라….”
그 순간이었다.
-터업.
현성이 레이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
“그전에 잠깐 내 말 좀 들어볼래?”
“…무슨 말?”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괜찮은 계획이 하나 있거든.”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