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정령왕의 술잔(10)
전에 말했듯이 지하미궁을 클리어하는 정석은 다음과 같았다.
지하미궁에 나오는 몬스터를 처치.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온 녹색결정을 획득해 방향을 찾는다.
위 과정을 반복하여 탈출로를 찾는다.
하지만 이 방법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바로 30분마다 지하 미궁의 구조가 바뀐다는 거지같은 룰 덕에 꽤나 시간을 먹는다는 점.
과거 현성이 스피드런을 준비하며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비밀의 숲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성수나 벽뚫, 루비의 자전거를 이용해 소요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령의 신전에 진입하여, 지하미궁을 클리어하는 것은 어떤 수를 써도 시간을 줄이는 게 불가능했다.
그나마 있는 방법이라고는 미궁이 변할 타이밍에 최대한 빠른 길이 나오도록 물 떠놓고 기도하는 게 전부.
현성은 이 사실이 너무나도 불만족스러웠다.
스피드런에 있어서 가장 시간을 많이 먹는 구간을 겨우 운에 의지해야한다니.
‘…뭔가 이러면 꼭 내가 게임에 지는 느낌이잖아.’
이에 현성은 지하미궁 클리어 타임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지하미궁의 컨셉부터 몬스터까지 모든 요소를 차근차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게임의 파일까지 뜯어가며 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야말로 광기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
그때 당시 현성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 조지 말로리.
그는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 (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게 거기 있어서.(Because it is there)”
그리고 현성의 대답 역시 같았다.
‘그곳에 공략이 있기 때문.’
그런 현성의 답변은 수많은 게이머의 추천을 받으며 올라갔고, 이는 커다란 광기의 물결을 일으키며 다른 게이머들을 현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 횟수가 200번을 넘어갔을 때.
현성은 한 가지 힌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대 땅강아지의 생태.’
<이스페리아>에는 수백, 수천에 다다르는 몬스터가 존재하며, 몬스터들은 당연히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지하 미궁에 등장하는 거대 땅강아지라는 몬스터의 생태는 이러했다.
[주로 지하에 땅을 파고 생활하며, 진동이 느껴질시 땅 위로 나와 먹이사냥을 시작한다. 덕분에 거대 땅강아지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은 그 지반이 약해 약한 충격에도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성이 주목한 문장은 처음과 끝이었다.
우선 처음 지하에 땅을 파고 생활한다는 부분과 마지막 지반이 약해 약한 충격에도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만약에, 아주 만약에 플레이어가 거대 땅강아지가 땅을 파고 생활하는 굴을 찾아낸다면?
‘거대 땅강아지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 크기 상,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며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또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게 <이스페리아>의 고인물 현성이 세운 가설이었다.
이에 그는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지하미궁에서 땅강아지가 나온 곳을 집중적으로 파헤치자, 그 아래 땅강아지들이 파놓았던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다.
‘…기존의 루트가 아닌 새로운 히든 루트의 발견.’
무엇보다 히든 루트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었다.
그 장점은 다름 아닌 불변성.
즉 30분마다 구조가 변하는 기존의 루트와는 달리 히든 루트는 30분이 지나도 그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하 미궁의 룰에서 벗어난 단 하나의 루트.’
그게 바로 히든 루트였다.
본디 지하 미궁에서 가장 까다로운 컨셉이 바로 30분마다 구조가 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지하 미궁의 난이도는 급격하게 내려갈 뿐만 아니라, 클리어 타임 역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현성은 이 히든 루트를 이용해 평균 클리어 시간 3시간에 다다르는 지하 미궁을 단 50분 만에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이자 스피드런의 취지에 맞는 최적의 공략법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그런 현성의 발견은 “널리 플레이어들을 이롭게 한다.”라는 이념을 가지며, ‘홍익공략’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그 공략이 여기서 다시 재현된다는 사실이었다.
* * * * *
“바로 이게 니가 땅을 파야하는 이유지.”
위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한 현성이 레이첼에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신경질적으로 삽으로 흙을 푸며 대답했다.
“아! 알겠다고! 그래서 지금 파고…있잖아…!”
그대로 레이첼이 삽을 들자, 흙 한 무더기가 딸려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고 현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외쳤다.
“어이! 레씨! 손이 느리다~”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빠드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흐즈믈르그….”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팔은 이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거기다 어느새 땀범벅이 된 얼굴.
옷에 묻은 흙먼지쯤은 더 이상 신경 끈 지 오래였다.
“에이. 원래 이럴 때는 다 ~씨 라고 부르는 거야.”
현성이 곡괭이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마저 삽으로 흙을 퍼 나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삽으로 니 머리 찍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아. 예.”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깜깜한 지하미궁 속.
현성과 레이첼이 있는 곳을 타고 들리는 소리는 단 하나였다.
-까앙! 푸욱. 까앙! 푸욱.
곡괭이가 돌을 깨고, 삽이 흙을 푸는 작업의 반복.
그에 따라 지하 미궁은 마치 탄광을 연상케 하는 노가다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사이 들려오는 것은 오직 레이첼의 거친 숨소리 뿐.
“허억…이거…언제까지…하악….”
“언제까지 해야 되냐고?”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허나 실제로 그녀의 작업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죽어 가느냐하면 그 원인은 그녀의 나약한 육체에 있었다.
혈액이 모자란 만성 빈혈의 육체.
거기다 다년간의 히키코모리 생활로 인한 쥐꼬리만 한 근육.
“으아아악!!”
그 결과는 지금 보는 대로.
-까앙!
레이첼이 울먹거리며 들고 있던 삽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못해…나 죽어….”
그래. 솔직히 이 정도면 예상보다 많이 버텼다.
라고 생각하며 현성이 곡괭이로 땅을 내려쳤다.
“안 그대로 이제 슬슬 끝이 보일….”
그 순간이었다.
현성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하나.
-띠링!
[지하 미궁에 들어온 지 25분이 지났습니다.]
[5분 뒤. 지하 미궁의 변형이 시작됩니다.]
동시에 현성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어가며 그가 손을 멈췄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성을 올려봤다.
“…왜 그래?”
그리고 현성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야. X됐다.”
그 말에 레이첼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았다.
“…뭐?”
앞서 말했듯 히든 루트는 던전 변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히든 루트에 들어갔을 때에 한할 뿐.
지금처럼 히든 루트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던전 변형의 영항을 받는다는 말.
그리고 이게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던전이 변형되면 벽이 움직이고, 벽이 움직이면 지금 땅을 파고 있는 현성과 레이첼은 그대로.
‘…생매장엔딩.’
이 방법의 유일한 주의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자칫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땅을 파는 도중에 던전이 변형되면 플레이어는 꼼짝없이 땅 속에 갇힌다.
그렇게 되면 움직이지도 못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말 그대로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
던전이 변형되면 땅을 파는 현성과 레이첼은 생매장.
그리고 지금 던전이 변형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이 사실을 레이첼에게 알려주자 그녀가 작동을 정지한 로봇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방금 전 자신이 내팽개친 삽을 재빨리 주우며 외쳤다.
“유…유씨! 땅 파!!”
그 외침을 시작으로 현성과 레이첼이 재빨리 땅을 파기 시작했다.
-깡깡깡깡!!
빠른 템포로 울려 퍼지는 소리.
그럴수록 땅이 무너져 내리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시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2분 남았습니다.]
현성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며 힘껏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까앙!
이에 레이첼이 열심히 삽을 휘두르며 물었다.
“얼마정도 남았어?!”
“2분!”
그러면서 현성이 한창 파고 있는 땅을 바라보았다.
거대 땅강아지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앞으로 조금만 더 파면 끝이 보일 터.
하지만 주요 관건은 과연 시간 내에 끝까지 팔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대로 땅을 파던 현성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흘깃 바라보았다.
어느새 남은 시간은 단 1분.
-으드득!
동시에 현성이 들고 있던 곡괭이를 내던지며 레이첼에게 말했다.
“야. 삽 넘겨봐.”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재빨리 삽을 넘겼다.
그러자 그가 삽을 꾸욱 움켜쥐고는 크게 심호흡 했다.
잠시 뒤.
-화르륵!
현성의 팔을 타고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곧이어 불꽃은 그가 들고 있는 삽 전체를 감싸고.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외쳤다.
“뒤로 물러서!”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삽으로 땅을 내려찍음과 함께 삽 끝에 불타오르던 불꽃이 폭발하며 커다란 충격이 전해졌다.
-콰아앙!!
그 충격에 땅이 울리며 흙이 쏟아졌다.
하지만 현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팔뚝을 타고 근육이 움찔거리며 불꽃이 넘실거렸다.
“마법사라며. 미친놈아….”
레이첼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기다 점점 삽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불꽃이 진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필사의 삽질.
만약 공사판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에라도 현성을 영입하려 들 정도.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경고를 하듯 현성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30초 남았습니다.]
이에 현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것만큼은 안 쓰려 했건만.
“…투신의 길.”
그와 동시에 현성의 몸을 타고 티리카의 인형이 피어올랐다.
기사단을 이끄는 수장.
그리고 기사단은 현대로 치자면 일종의 군대.
여기서 군대하면 무엇인가.
바로 삽질.
삽질로 시작해서 삽질로 끝나는 게 군대였다.
-스으으!
그에 따라 투신의 길은 최적의 경로와 위치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현성이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흐름을 따라 삽을 휘두르는 것.
-두두두두!!
그렇게 마치 드릴을 연상케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꽃이 날개를 펼쳤다.
그대로 잠시 뒤.
서서히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드디어 끝이 보였다.
이에 현성이 이를 악물며 마지막 삽을 내리꽂은 순간이었다.
-파아앗!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지하 미궁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던전의 변형이 시작됩니다.]
그대로 처음 던전이 변형될 때와 같이.
눈앞이 깜깜해지며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이 온 몸을 휘감았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여러 개의 메시지 창.
[축하드립니다. 신의 경지에 이른 삽질로 특수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특수 스킬 : 삽질의 황태자]
<삽질의 황태자>
“그의 삽질은 하늘을 가르며, 땅을 가를 지어다.”
설명 : 삽질의 극의에 다다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술로 삽질을 할 시, 최대 500%의 속도 버프를 받으며 높은 확률로 지반의 약점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다.
[축하드립니다. 신의 경지에 이른 삽질로 업적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달성 : 거 삽질하기 딱 좋은 날이구만]
곧 메시지 창을 확인한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어.”
특수 스킬 삽질의 황태자라니.
<투신의 길>급으로 희귀한 스킬을 이렇게 얻을 줄이야.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뭐 나중에 쓸데가 있겠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수스킬도 특수스킬이지만.
먼저 확인해야할게 있었다.
-스윽.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지하갱도를 연상케 하는 긴 통로.
현성의 기억과 똑같았다.
“…사, 살았다.”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새 메시지 떠올랐다.
-띠링!
[거대 땅강아지의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그제야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바로 지하 미궁의 히든 루트.
거대 땅강아지의 통로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