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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67화 (67/240)

067화 정령왕의 술잔(9)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첼의 피로 이루어진 붉은 창이 마지막 땅강아지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터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콰직!

이에 땅강아지는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리를 쭉 뻗고는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곧 땅강아지가 죽은 걸 확인한 레이첼이 머리에 박힌 붉은 창을 빼들었다.

그러자 창끝을 따라 땅강아지의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윽….”

그 모습에 레이첼이 미간을 찡그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어서 그녀가 손을 휙 휘두르자 붉은 창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피가 흩어졌다.

그러고는 레이첼이 저 멀리 있는 현성을 향해 말했다.

“거기는 다 잡았어?”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손에 마저 남아있는 불씨를 툭툭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현성의 발밑에는 거대 땅강아지의 사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뒤.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 이상 없어. 클리어.”

그런 현성의 대답과 동시에 레이첼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끄, 끝났다….”

그 짧은 사이.

레이첼은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싸웠다.

물론 거대 땅강아지가 무지막지하게 강력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를 끝낸 레이첼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들어오는 데미지가 달랐다.

대놓고 달려드는 거대 땅강아지와 죽을 때마다 팡팡 터지는 체액.

“으에엑….”

아직도 실감나게 떠오르는 방금 전의 기억에 레이첼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로 그녀가 바닥에 즐비한 땅강아지 사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땅강아지는 강아지가 아닌 거야….”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걸어오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뱀파이어는 파이어니까 불이게?”

이에 레이첼이 현성을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인간은 간이니까 간처럼 생겼냐.”

“오. 좀 치네.”

“흥.”

레이첼이 작게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도 잠시.

레이첼이 땅강아지 사체와 현성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나저나 이게 니가 말한 그 방법이야?”

“그런 셈이지.”

“이걸로 뭘 어떻게 할 건데?”

“이거?”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자신의 발밑에 있는 땅강아지 사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누가 말리기도 전에 그가 땅강아지 사체를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그와 함께 살이 터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쿠지직!

그런 현성의 돌발행동에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다.

“뭐, 뭐하는 거야?!”

그러나 현성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땅강아지의 뱃속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그때였다.

사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

곧바로 현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다.

“찾았다.”

그대로 현성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녹색의 결정.

이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들고 있는 결정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게?”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를 출구로 안내해 줄 길잡이.”

“…난 잘 모르겠는데?”

“보여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성이 녹색 결정을 들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의 앞에는 두 개의 갈림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이 차례대로 갈림길에 녹색 결정을 들이밀었다.

“잘 봐.”

그렇게 처음 왼쪽 길에 결정을 갖다 대었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오른쪽 길에 결정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파앗!

돌연 현성이 들고 있던 녹색 결정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왼쪽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이에 현성이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봤지?”

그 모습에 레이첼이 작게 감탄사를 토해내며 빛을 내는 결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녀가 결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결정이 출구의 방향을 알려준다는 거지?”

“정답.”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녹색 결정을 매만졌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하나의 설명창이 떠올라 있었다.

[지하 미궁의 결정 조각]

설명 : 지하미궁 속의 몬스터가 드랍하는 녹색 결정. 겉보기에는 평범한 결정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지하미궁 끝에 있는 에너지원에 반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무 작은 조각인 나머지 15분이 지나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원이란 다름 아닌 보스룸.

즉 이 결정 조각은 지하미궁을 벗어나 보스룸의 방향을 알려주는 아이템인 것이다.

‘하지만 설명에 적혀있듯이 결정의 지속시간은 15분.’

그러니까 이번 지하미궁을 클리어하는 조건은 미궁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꾸준히 처치해나가며, 몬스터가 드랍하는 녹색 결정을 이용해 보스룸까지 도달하는 구조였다.

물론 30분 간격으로 미궁의 구조가 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적어도 어떻게 깨는지 방법은 제공하니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클리어는 가능하게 만들어뒀다.

그동안 <이스페리아>의 진행방식을 생각해본다면 꽤나 친절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데일런트나 크루페돈보다는 훨씬 쉬운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그 둘에 비하면 다시 보니 선녀 같은 난이도.’

곧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바로 가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레이첼이 오른쪽 길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그대로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멈칫.

그 웃음에 레이첼이 묘한 불안함을 느끼며 경계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을 타고 지금껏 현성 그가 해왔던 짓거리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첫 만남은 당수로 자신을 기절시키고 성수로 고문.

그 다음은 마법사랍시고 주먹질을 하지 않나.

벽을 타고 순간이동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지 않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현성이 보이는 웃음이라면 역시나 뭔가 숨겨진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레이첼은 그동안 현성에게 끌려 다니며 본능적으로 쎄함을 느꼈던 것이다.

“…뭐야. 그 웃음은?”

레이첼이 눈을 좁히며 현성을 주시했다.

그러자 현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들어봐.”

“또 무슨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려고 그래.”

그런 레이첼의 의구심에 현성이 작게 혀를 찼다.

“쯧.”

그대로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마치 모 애니메이션에서 흑막을 연상케 하는 의미심장한 대사.

이에 레이첼이 여전히 현성을 의심하며 입을 열었다.

“…너 방금 뭐라고?”

“아냐. 그냥 섭섭하다고.”

그러면서 현성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말이야. 지금껏 내 말 들어서 안 좋게 풀린 적 있었어?”

“….”

“만약 내가 아니었으면 도서관의 망령을 못 잡았을 것이며 그럼 마도서는 구경도 못했겠지? 거기다 난간으로 안 갔으면 진즉에 들켜서 마도서는 빼앗겼겠지. 그럼 넌 정령의 신전은커녕 비밀의 숲 초입도 못 들어갔을걸.”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현성의 말.

그리고 레이첼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분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만약 현성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그가 도와주기 전까지 레이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현성 없이 혼자서 끝까지 갈 수 있는가.

‘…그건 또 불안하단 말이지.’

현성의 말대로 과정은 기상천외하기 그지없었지만, 결과만 두고 본다면 하나하나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녀가 정령왕의 술잔을 얻겠다고 뺑이친 시간만 해도 3년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현성은 고작 하루 만에 정령의 신전까지 도발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구….’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며 현성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이때.

마지막 쐐기를 박는 현성의 한마디.

“무엇보다도 너 거대 땅강아지 더 잡기 싫잖아.”

-움찔!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방법이면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어.”

그의 말에 레이첼이 방금 전 전투를 떠올렸다.

당장 한 마리만 있더라도 징그러워 죽겠는데 때로 몰려오는 땅강아지 군단이라니.

거기다 작으면 모를까 크기는 무슨 사람하나만큼 했다.

거기다 그 소름끼치는 소리와 죽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체액은 어떠한가.

물론 그런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미궁을 돌아다니며 전투를 이어나갈수록 레이첼은 불리한 입장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피가 모자랄 거 같단 말이야.’

뱀파이어인 그녀는 싸우기 위해서는 무조건 피를 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레이첼은 피의 왕국의 공주는 개뿔.

그저 방구석 게임페인에 불과했다.

그나마 잘하는 건 철의 권7.

하지만 지하 미궁에서 철의 권7으로 승부를 보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스를 잡기 전까지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최고의 상황.

“….”

물론 그 끝에는 뭐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동시에 레이첼을 상대로 독심술이라도 펼치듯 혀를 놀리는 현성.

“당장 보스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상. 최대한 피를 아끼는 게 베스트 아니야? 그게 아니면 앞으로 몇 번의 전투 끝에 미궁을 벗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피를 내게?”

“….”

“아무 대답 없으면 동의하는 걸로 알아도 되는 거지?”

그대로 현성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나 혼자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너도 좋고 나도 좋다고 하는 일인데 왜 고민하고 그럴까.”

계속되는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결국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방법 확실한 거 맞지? 더 이상 땅강아지도 안 만나고 피도 안내도 되는 거지?”

“물론이지.”

“너 분명히 말했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의 옷깃을 꾹 잡고 경고했다.

“너 만약에 이게 거짓말이면 나 진짜 화낼 거야.”

현성이 그런 그녀를 보고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레이첼은 어지간히 거대 땅강아지가 싫었던 모양이다.

“자, 그럼….”

동시에 현성이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손을 타고 딸려 나오는 기다란 물건.

-터업.

이어서 현성이 레이첼의 손에 물건을 쥐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삽?”

삽.

땅을 파고 흙을 뜨는 데 쓰는 연장으로 노가다 판은 물론 실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읏차.”

현성이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내들었다.

삽과 곡괭이.

아카데미 내 상점에서 절찬 판매 중인 아이템으로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이게 뭔….”

레이첼이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삽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도대체 왜 지하미궁에서 이걸 꺼내는 것인가.

그리고 잠시 뒤.

현성에게 돌아온 말은 간단했다.

“뭐해?”

그대로 현성이 아래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

“…예?”

“파라고. 땅.”

레이첼.

피의 왕국의 공주임과 동시에 <이스페리아> 2막의 보스.

그런 그녀가 단숨에 삽질계의 꿈나무로 거듭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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