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66화 (66/240)

066화 정령왕의 술잔(8)

지하미궁.

보통 RPG류 게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컨셉으로, 주로 넓은 미궁을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몬스터를 토벌하면서 길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스페리아>의 ‘정령의 신전’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을 차용했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일정시간이 지나면 미궁의 구조가 변한다는 것.

더불어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 바로 현성의 눈앞에 떠있는 메시지였다.

‘…한마디로 지금은 벌써 첫 번째 변형이 시작된 상태.’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두 번째 변형이 시작되는 것은 지하 미궁에 들어오고 나서 30분 이후.

이게 바로 <이스페리아>가 악랄한 이유 중 하나였다.

‘길을 찾아야하는 미궁 컨셉에서 30분마다 그 구조가 바뀌는 던전이라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빡세기 그지없는 방식이었다.

과거 현성 그가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할 때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방식에 분개하여 쌍욕을 날리기도 했다.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만.’

그대로 현성이 과거를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엿을 멕여도 이렇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엿을 멕이는지.

정말이지 여러모로 대단한 제작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재미만 없었으면 진즉에 때려치웠다. 이딴 망겜….’

현성이 과거 수만 번도 넘게 생각했던 그 생각을 되새기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곧 현성의 옆에 있던 레이첼이 그를 향해 되물었다.

“…지하미궁이라고? 여기가?”

“그래. 보는 대로.”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저 위에 있는 구멍을 바라보았다.

높이로 보았을 때.

아무런 발판이나 사다리도 없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사실상 무리.

“….”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미궁을 돌파하는 것.

그러면서 레이첼이 길게 뻗어있는 눈앞의 길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는 거 아냐?”

레이첼이 앞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침착하네?”

현성이 알고 있는 그녀라면 지금쯤 닭 쫒던 개처럼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면서 울먹거려도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당히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에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거든. 그리고 이곳이 미궁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뭐?”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그대로 레이첼이 뜸을 들이더니, 머지않아 당당하게 가슴을 쭉 피며 헛기침을 했다.

“엣헴! 바로 그 이유는….”

동시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주시했다.

‘…뭔지는 몰라도 또 되도 않는 헛소리를 내뱉겠군.’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레이첼의 한 마디.

“미궁에서 길 찾는 방법 정도는 이미 알고 있거든.”

“…오호라.”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잠시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한 말이 나왔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 방법이 뭔지 일단 들어나 볼까.”

“후후. 듣고 놀라지나 말라고.”

그대로 레이첼이 자신 있게 한쪽 벽을 향해 손을 짚었다.

-터억.

그 상태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너 설마 우수법은 아니지?”

-움찔!

현성의 말과 동시에 레이첼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크, 크흠. 그렇다면…!”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오른손을 왼손으로 바꾸었다.

이에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좌수법도 안 된다.”

단호한 그의 한 마디.

그러자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울먹이며 외쳤다.

“아. 왜! 이거 맞잖아!!”

“맞긴 한데….”

“그럼 꼭 그렇게 꼽을 줘야 속이 시원했냐!”

레이첼이 입술을 앙다물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그 방법 안 통해.”

“…뭐?”

우수법(右手法) 혹은 좌수법(左手法).

보통 미로에서 길을 찾기 위한 수단 중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으로, 벽에 오른쪽 혹은 왼쪽 손으로 벽을 훑으며 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유일한 단점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미로 입구, 그러니까 처음부터 써야한다는 점.’

이 방법은 오히려 미로 중간부터 쓰게 될 경우에는 반대로 길을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성과 레이첼이 있는 곳은 미로 입구.

즉 우수법 혹은 좌수법을 쓰기에는 아무 문제없었다.

그리고 레이첼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현성을 향해 물었다.

“지금 여기는 미궁 입구잖아.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야?”

그 말에 현성이 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30분 간격으로 미궁이 바뀌거든.”

우수법 혹은 좌수법을 통해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30분 안에 벽으로 손을 훑으며 길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미궁의 크기를 고려할 때 이는 불가능.

거기다 미궁 안에는 곳곳에 몬스터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그, 그럼 변형 좌수법도 안 통해?”

동시에 레이첼이 미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변형 좌수법.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헨젤과 그레텔에 나온 방법으로 왔던 길을 표시하며, 하나하나씩 변수를 제거하여 탈출로를 찾는 방법이었다.

“구조가 변하는 이상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된다고 해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테고.”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국은 어떤 방법을 쓰든 30분 안에 길을 찾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이에 레이첼이 벽에 손을 댄 채로 주르륵 쓰러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결국은 못나간다는 소리잖아….”

남는 방법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다.

경이로운 운빨을 발휘하여, 30분 안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기깔나게 탈출로를 찾아나가는 것.

하지만 온 우주의 신이 도와주지 않는 한 이 방법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은 미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레이첼을 기다리는 운명은 정령왕의 술잔을 손에 넣기는커녕 그 모습도 못 볼 지경이었다.

곧 현성이 주저앉은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변형 좌수법도 알고 있을 줄이야. 조금 놀랐어.”

확실히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레이첼은 멍청한 건 절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각을 드러내는 부분은 암기력.’

물론 그 뛰어난 암기력을 철의 권 7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의 기술과 커멘드를 줄줄 읊는데 쓴다는 게 안타까울 다름이었다.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작게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왜? 난 이런 거 알면 안 되냐?”

이에 현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외라고.”

하지만 그도 잠시.

레이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런 거 알고 있으면 뭐하냐. 지금 상황에서는 다 못쓴다며?”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애초에 넌 그런 와중에 왜 이리 태연한 거야? 우리 여기에 갇힌 거라니까?”

우수법과 좌수법.

거기다 변형 좌수법까지.

통하는 방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현성은 당황하기는커녕 줄곧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여유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레이첼은 반대로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이스페리아>가 특유의 불친절한 난이도로 유저를 엿멕이는데 일가견이 있는 게임이라고 한들.

게임인 이상 시스템 상 깨지 말라고 설정해둔 건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데일런트같은 경우만 아니면 ‘웬만하면’ 깰 수 있게 설정해둔다.

그리고 이번 지하미궁 같은 경우는 후자.

즉 다른 방법이 안통해도 길을 찾을 방법은 존재했다.

“…방법이 있다고?”

그 말에 레이첼이 벌떡 일어서 현성을 바라보았다.

“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게 뭔데!”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눈앞의 길.

그러니까 깜깜한 어둠 너머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현재 현성과 레이첼이 지하미궁에 들어온 지는 대략 10분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라면 이제 곧 현성 그가 기다리는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낼게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삐져나왔다.

[키르르륵.]

마치 풀밭 사이에서 듣던 곤충소리를 연상케 하는 소리.

하지만 이곳은 풀밭은커녕 아래에 처박힌 지하미궁이었다.

거기다 보통의 곤충이라기에는 너무 큰 울음소리.

“설마….”

그 소리에 레이첼이 움찔거리며 어둠 너머와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커다란 곤충 같은 건 아니겠지?”

“왜? 무슨 문제 있어?”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미간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징그럽단 말이야.”

그러면서 레이첼이 어둠 너머를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만약 커다란 메뚜기 같은 거면 나 진짜 소리 지른다.”

“….”

“왜 말이 없어?”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은 그저 조용히 한 발자국 물러서 귀를 막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귀를 막은 현성을 보고 낭패라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둠 너머에서 등장한 것은.

[키르륵…!]

거대한 땅강아지였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 제발….”

저게 바로 지하 미궁에 등장하는 몬스터인 거대 땅강아지.

그리고 이번 미궁에서 탈출로를 제공할 열쇠이기도 했다.

곧바로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나왔군.’

땅강아지의 등장에 현성은 만족스러워하며 레이첼은 절망에 빠졌다.

그야말로 상반된 두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땅강아지 한 마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며 레이첼을 향해 날아왔다.

이에 레이첼이 재빨리 새끼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며 소리쳤다.

“왜 이름은 땅강아지면서 생긴 건 강아지가 아닌 건데!”

그런 레이첼의 외침과 함께 흘러내린 붉은 피가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녀의 피가 땅강아지에 닿기 직전.

붉은 빛이 새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그대로 레이첼의 혈액이 폭파하며 지하미궁 안으로 뿌연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런 폭발음을 신호로 나머지 땅강아지들이 일제히 레이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거기다 왜 나한테만 오는 거야!”

그런 레이첼의 모습에 뒤에 있던 현성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걔네들은 지하미궁을 발동시킨 사람을 먼저 공격하거든.”

그리고 지하 미궁을 발동시킨 건 다름 아닌 레이첼.

곧이어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정령의 신전에 들어올 당시.

잔뜩 신나 먼저 앞서 갔던 사실을 떠올렸다.

“뭐? 그럼 넌 그걸 알고도….”

“너무 들떠 보이는 바람에 차마 말릴 수가 없더라고.”

“너…너 진짜…!”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을 타고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으드득!

그런 레이첼 주위로 붉은 피가 소용돌이치듯 솟아올랐다.

그 사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너 이거 끝나면 두고 봐!”

“어차피 던전 클리어할 때까지는 계속 볼 건데 뭘….”

그 말에 레이첼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오며 붉은 피가 그물처럼 뻗어져나갔다.

“조용하고 빨리 돕기나 해!”

“예예.”

그러자 현성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양 손바닥을 타고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현성이 바닥을 찍어 내린 순간.

-퍼어어엉!!

거센 불길이 통로를 가득 메우며 폭발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