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정령왕의 술잔(7)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금 나침반을 따라 비밀의 숲을 돌파하던 현성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레이첼이 멈춰선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왜 그래?”
이에 현성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빽빽하게 솟아있던 나무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숲 한 가운데 펼쳐진 커다란 연못.
그대로 현성이 연못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연못과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연못을 제외하고는 딱히 별다를 거 없는 숲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령왕의 술잔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착했다고?”
“좀 더 정확히는 입구지.”
“입구?”
레이첼의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령의 신전의 입구. 일종의 던전이야.”
정령의 신전.
레이첼이 노리는 정령왕의 술잔이 있는 곳으로 <이스페리아>에 존재하는 던전 중 하나였다.
이에 레이첼이 눈매를 좁히며 연못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런 게 여기 존재한다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카데미 내에 존재하는 비밀의 숲.
그리고 그런 비밀의 숲 안에 던전이 있다니.
만약 그랬다면 아카데미 측에서 미리 공략을 진행했을 터.
하지만 지금껏 레이첼이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
“그럼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야?”
“정답.”
현성이 들고 있던 마도서를 흔들며 말했다.
정령의 신전의 해금조건은 도서관의 망령을 퇴치하고 고대의 마도서를 획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말은 즉 정령의 신전을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현성과 레이첼이 처음.
“다행이다….”
동시에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실 내심 그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아카데미 내 정령왕의 술잔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정령왕의 술잔을 노리는 다른 세력에 의해 이미 빼앗긴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실제로 현재 뱀파이어 일족을 이끄는 수장.
그러니까 레이첼 그녀의 부모들의 말에 의하면 마족 내에서도 정령왕의 술잔을 노리는 세력들이 존재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당장 웨어울프만 해도 그랬다.
정령왕의 술잔이 가진 효과는 모든 저주를 해제하는 것.
그리고 마족 내에 저주가 걸린 일족은 비단 뱀파이어뿐만이 아니었다.
하루의 일정시간을 조각상으로 살아야하는 가고일부터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이성을 잃는 웨어울프까지.
당장 정령왕의 술잔을 노리는 일족은 한 둘이 아니었다.
여기서 만약 다른 세력이 먼저 정령왕의 술잔을 손에 넣었다면 뱀파이어 일족은 영원히 피의 갈증의 저주에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레이첼은 혹여나 이미 정령왕의 술잔이 다른 녀석들의 손에 넘어간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령의 신전을 처음 발견했다니.
‘그동안 피의 왕국에 돌아가지 않고 버틴 보람이 있었어.’
레이첼이 작게 웃으며 주먹을 꾹 쥐었다.
드디어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희망을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현성.
“….”
레이첼이 빤히 현성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인간이었다.
그동안 별짓을 해도 찾을 수 없던 정령왕의 술잔에 이리 가까이 다가가다니.
물론 첫 만남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만약 현성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뭔가 머뭇거렸다.
이에 현성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야.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작게 주먹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고, 고마워….”
“뭐?”
“고맙다구!”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볼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러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됐어. 나중에 약속이나 제대로 지켜줘.”
“약속이라면….”
“그래. 이 일 끝나면 너희 부모님이랑 자리 마련 해달라는 거.”
그 말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을 대가로 현성이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님과 만나게 해달라는 것.
레이첼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면 뭐하게?”
“그냥 인사 좀 드리는 거지 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더 자세한 건 그때가면 알게 될 거야.” “….”
“뭐 아무튼 지금은 지금에 집중하라는 거지.”
그대로 현성이 연못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집중할 것은 다름 아닌 정령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일.
이에 레이첼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래서 정령의 신전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데?”
“여기 있잖아.”
그러면서 현성이 연못을 가리켰다.
그러자 레이첼이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천천히 연못과 그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여기 아래?”
“그렇지.”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움찔.
그런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 설마 그냥 들어가는 건 아니지?”
“물론이지. 그랬으면 진즉에 발견됐을걸.”
“그럼 들어가는 방법은?”
“…이걸 써야지.”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마도서를 흔들었다.
괜히 고대의 마도서가 비밀의 숲의 열쇠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정령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방법 역시 고대의 마도서를 사용하는 것.
-촤르륵.
그에 따라 현성이 곧바로 마도서를 펼쳤다.
그런 마도서를 따라 부드러운 바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된다.”
그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비밀의 숲 곳곳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멜로디.
[아아아아!]
이에 레이첼이 흠칫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노래 소리만 들려올 뿐.
“이건….”
그러자 현성이 주변에 가득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령들이야.”
지금 들리는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령들.
비밀의 숲에 있는 정령들이 마도서의 마력에 반응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노래가 울려 퍼질수록 연못을 타고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방울이 떨어진 정도의 작은 파문.
그러나 노래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파문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수면이 출렁일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령들의 노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쿠구구궁.
연못 아래를 타고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돌연 연못이 갈라지며 그 아래에서 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문이 올라왔다.
이에 레이첼이 작게 감탄하며 문을 바라봤다.
“이게 바로….”
“정령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대로 현성이 문에 손을 가져다대자 문틈으로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문이 활짝 열렸다.
-파아앗!
문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계단.
계단은 저 아래를 향해 나있었다.
동시에 현성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정령의 신전의 문이 열렸습니다.]
[문 너머를 타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게임 속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이에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
* * * * *
정령의 신전 내부.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보이는 곳곳에 그려져 있는 벽화와 양쪽에 줄지어 서있는 제단까지.
그야말로 신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안은 의외로 별거 없네.”
레이첼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솔직히 던전이라길래 안쪽에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에 레이첼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무리 없이 정령왕의 술잔을 얻을 수 있겠어.”
레이첼이 정령왕의 술잔을 얻을 생각에 잔뜩 들뜬 모양인지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그녀는 현성보다 앞에서 그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빨리 와!”
그리고 그런 기운찬 그녀의 모습에 현성은 아무 말 없이 레이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이에 현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말투는 어딘가 안타까워보였다.
하지만 잔뜩 들뜬 레이첼은 공교롭게도 그런 말투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대로 레이첼이 등을 돌리고.
“쯧.”
현성은 저 멀리 앞서가는 레이첼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과거 게임을 플레이하던 여러 플레이어 역시 정령의 신전에 처음 들어올 때는 레이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별다른 위험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던전.’
이에 플레이어들은 이거 완전 개꿀이라며 보상도 거저먹는 거 아니냐며 설레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빌어먹은 제작사는 절대 플레이어들이 편하게 가는 꼴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플레이어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던전에 진입하고 나서 조금 후의 일이었으며.
동시에 이는 레이첼의 들뜬 마음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대로 레이첼이 신난 발걸음으로 얼마나 내려갔을까.
-처억.
마침내 레이첼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을 때였다.
현성의 눈앞을 타고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이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되겠구만.”
그 말에 앞서가던 레이첼이 고개를 돌려 현성을 바라봤다.
“응? 뭐라고?”
그 순간이었다.
돌연 바닥을 타고 심상치 않은 흔들림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심해지더니 결국 신전전체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쿠구궁…콰앙!!
심지어 바닥까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내려왔던 계단 역시 하나 둘씩 아래로 꺼졌다.
그 충격 사이.
레이첼이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게 도대체…꺄아악!”
그 와중에 레이첼이 서있던 바닥까지 흔들리며 그녀가 휘청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레이첼을 부축하며 말했다.
“기억해. <이스페리아>는 항상 X같음의 연속이었어.”
“…뭐?”
“그런 게 있어.”
그의 단호한 한마디.
그런 현성의 눈앞에는 메시지 하나가 떠있었다.
[던전의 변형이 시작됩니다.]
그와 함께 천장에서 무너져 내린 커다란 바위가 바닥을 직격했다.
-콰아앙!!
이에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엄지를 치켜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해탈한 현성의 표정.
“그럼 아래에서 보자.”
“…흐에?”
그 말과 동시에 바닥이 푹 꺼지며 현성과 레이첼이 아래로 사라졌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하 어딘가.
레이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동시에 머리를 타고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그대로 레이첼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바닥이 꺼지며 떨어진 것 뿐.
아무래도 그 이후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일어났어?”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이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레이첼이 재빨리 그를 향해 말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레이첼의 외침.
그러자 현성이 별 대수롭지 않게 툭툭 먼지를 털어내고는 위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위에는 방금 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떨어진 거야?”
레이첼이 멍하니 구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답.”
“…그, 그럼 여기는?”
레이첼이 두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물었다.
이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와. 지하미궁은 처음이지?”
그런 현성의 눈앞에는 정겹고도 거지같은 메시지 하나가 떠있었다.
[던전의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지하미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