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정령왕의 술잔(6)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명언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리고 지금 현성과 레이첼의 모습이 그러했다.
달빛 아래 하늘을 나는 자전거라.
멀리서보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이스페리아>에서도 그랬다.
서브 퀘스트 ‘괴짜 발명가 루비의 우주선’은 마지막에 날아가는 컷씬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컷씬은 게임 내 명장면 투표 순위에 오를 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이른바 최고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조금 달랐다.
“흐어어어어!!”
목 놓아 울려 퍼지는 레이첼의 비명소리.
눈뜨기도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폭풍.
귓가를 타고 들리는 건 오직 매서운 바람소리뿐이었다.
거기다 현성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순간이라도 목에 힘을 빼면 그대로 뒤로 꺾여나갈 것 같은 가속도.
이에 현성은 생전 겪어본 멀미 중 가장 심한 멀미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미친 게임!’
그대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끝을 모르고 공중을 질주하던 자전거는 어느새 아카데미를 훌쩍 넘어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외곽에 위치한 곳이 다름 아닌 비밀의 숲.
“저, 저거 비밀의 숲…!”
동시에 목 놓아 비명을 내지르던 레이첼이 필사적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곧 현성 역시 아래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나무가 우거진 커다란 숲이 보였다.
무엇보다 숲 외곽을 타고 길게 쳐져있는 펜스.
그런 펜스 앞에는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서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 측에서 외부인이 비밀의 숲에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둔 골렘.
그리고 골렘이 보인다면 제대로 도착했다는 소리.
‘그렇다면….’
현성이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고 핸들을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러면서 레이첼을 향해 외쳤다.
“꽉 잡아!”
그대로 현성이 핸들을 꺾은 순간.
공중을 날던 자전거가 방향을 바꿔 아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자전거는 마치 유성을 보는 듯했다.
-쉬이익!
그렇게 자전거가 점점 가까워졌을 때였다.
비밀의 숲 바로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골렘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미확인 비행물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도대체 저게 뭔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이르자.
골렘의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자전거를 타고 날아오는 두 명의 학생이었다.
[침입자?!]
이에 골렘이 재빨리 창을 꺼내들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골렘이 창을 꺼내들었을 때는 이미 자전거는 그의 코앞에 도달해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공격…!]
그대로 골렘이 경고의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 저, 저리 꺼져!”
레이첼의 급박한 목소리.
바로 이어서 그녀가 타고 있던 자전거가 가차 없이 골렘의 머리를 가격했다.
-뻐어억…우지직!
그와 함께 골렘의 머리통이 박살나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기사 골렘이라고 한들.
유성과도 같이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자전거의 가속도와 충격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이익…!
곧 보란 듯이 기사 골렘의 머리통을 박살낸 자전거가 거친 마찰음을 남기며 바닥에 착지했다.
동시에 자전거 철제바구니 앞에 앉아있던 레이첼이 자전거와 골렘‘이었던’걸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거…사람은 아니었지?”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머리통을 가리켰다.
차갑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머리통.
그러자 현성이 골렘의 잔해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사람 아니야. 골렘이야.”
현성의 단호한 대답.
이에 레이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주, 죽는 줄 알았네…”
자전거에서 내려오자마자 후들거리는 양 다리.
잔뜩 헝클어진 은발.
무엇보다 눈 아래 남겨져 있는 눈물자국.
레이첼은 그 짧은 사이.
상당히 피폐해진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현성과 함께한 특별한 자전거 여행덕분.
“야! 이런 거면 말이라도 해주든가!”
레이첼이 현성의 멱살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에 현성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흔들즈므르….”
“뭐?”
“흔들지 말라고…토 나올 거 같으니까….”
“읏!”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재빨리 현성의 멱살을 놓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곧 안정을 되찾은 현성이 크게 숨을 고르며 자전거를 바라봤다.
“게임에서는 컷씬으로 밖에 안 봐서 몰랐는데….”
이게 이렇게 익스트림하게 풀릴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런 생각도 잠시.
경쾌한 알림 음과 함께 현성의 눈앞으로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도서관 탈출]
퀘스트 내용
-도서관을 벗어나 비밀의 숲까지 도달하시오.(완료)
*본 퀘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경우 곧바로 실패합니다.
바로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창.
이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는 비밀의 숲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숲 안으로 들어갈 차례.’
곧바로 현성이 비밀의 숲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구에는 자물쇠가 걸려있는 상태.
거기다 자물쇠 겉에 그려져 있는 복잡한 문자와 마법진.
“쯧.”
아마 그 형태를 보아하니 보통 자물쇠가 아닌 마법적인 처리를 거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자물쇠를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외곽에 길게 쳐진 펜스가 문제였다.
곧 현성의 옆에 온 레이첼이 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면 안 되나?”
그대로 레이첼이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나뭇가지로 펜스를 쿡 찔렀다.
그 순간이었다.
펜스를 따라 보라색 빛깔이 번쩍이더니 사방으로 전기가 일었다.
-파지직!
동시에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떨어트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 끝은 까맣게 불타 검은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에 현성이 나뭇가지와 레이첼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이만한 전기 버틸 자신 있으면 먼저 들어가도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
“미치셨나.”
레이첼이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고개를 까닥이며 입구에 걸린 자물쇠를 가리켰다.
“아, 맞다. 너 마법사라고 했지? 그러면 무슨 해제 마법 같은 건 없어?”
“디스펠?”
“응. 그런 거. 그게 아니면 마도서에 부여된 마법이라던가.”
레이첼이 자전거를 타고 올 때 현성이 마도서를 통해 바람마법을 쓴 걸 기억해내며 말했다.
그러자 현성이 들고 있던 마도서를 흔들며 작게 웃었다.
“디스펠은 없지만 비슷한 건 있어.”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러면서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고개를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래봬도 마법사라는 거지?”
“뭐…그렇다고 할 수 있지.”
책은 지식의 보고.
그 중에서도 고대의 마도서는 수많은 마법을 지니고 있으며, 이번 컨셉 자체가 마도서에 담긴 마법을 이용하는 것.
그만큼 마도서를 이용하면 눈앞의 자물쇠를 풀 수 있었다.
“그럼 간다.”
곧바로 현성이 마도서를 펼쳤다.
동시에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이지를 따라 마력과 빛이 흘러나올 때.
-타악!
돌연 현성이 마도서를 닫아버리고는 한 손에 쥐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는 거야?”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해당 페이지를 펼쳐야함이 당연지사.
그런데 갑자기 책을 닫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마도서를 쥔 현성의 손등을 타고 굵은 핏줄이 솟아오르더니.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자물쇠를 향해 마도서를 내려쳤다.
-부웅!
그와 동시에 자물쇠와 마도서 사이에 불똥이 튀며 격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콰아앙…파지직!
그리고 머지않아 자물쇠 겉에 새겨진 마법진이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현성이 힘을 주며 마도서를 꾹 쥐었다.
그때였다.
-투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말 그대로 자물쇠가 산산조각 났다.
그에 따라 마법진 역시 박살나며 그 잔해가 공중에 흩날렸다.
이게 바로 힘법사식 디스펠.
본디 마법을 해제하는 디스펠의 원리는 단순하다.
기존 마법에 또 다른 마력을 불어넣어 강제적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 충격을 밀어 넣는다.
즉 여기서 중요한건 마력간의 간섭을 통한 균열.
그러니까 굳이 특정마법을 발동하지 않아도 충분한 마력만 간섭시킬 수 있으면 가능한 게 바로 디스펠이었다.
이게 바로 <이스페리아>의 디스펠 마법의 원리.
그리고 현성은 이를 이용해 고대의 마도서에 담긴 마력을 사용해 자물쇠에 걸린 마법에 균열을 일으킨 뒤.
충격을 줘 그대로 자물쇠를 박살낸 것이었다.
“됐다.”
현성의 짧은 한 마디.
동시에 펜스에 흐르던 스파크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 후 찾아온 잠깐의 정적.
“….”
레이첼이 할 말을 잃은 채.
아무 말 없이 멍하니 현성과 박살난 자물쇠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이첼이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라며. 미친놈아.”
그러자 현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마도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맞잖아. 마법사.”
“아니 그게….”
“아는 것이 곧 힘(물리).”
태연한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서관의 망령을 잡을 당시 불꽃주먹을 날릴 때부터.
아니 애초에 첫 만남에 당수를 꽃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내 살다 살다 별….”
레이첼이 현성을 위아래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마도서를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하지만 현성은 아무렇지 않게 마도서를 툭툭 털어내며 문을 열었다.
-끼익.
그러자 문이 열리고 그 너머 나무가 우거진 비밀의 숲이 그 둘을 맞이했다.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갈까?”
그런 현성의 말에 멍하니 있던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 응….”
곧 현성이 앞장서고 둘은 숲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비밀의 숲이 어려운 것은 어디까지나 정령들의 농간 때문.
‘정령들이 숲에 잔뜩 뿌려든 가루 덕에 비밀의 숲은 사시사철 환각마법이 걸려있기 마련.’
환각을 보는 마법의 가루.
덕분에 일부 플레이어들은 비밀의 숲을 대마의 숲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작명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그만큼 비밀의 숲을 돌파하는 게 어렵다는 거지.’
하지만 고대의 마도서를 지니고 있다면 아무 문제없었다.
그 이유는 마도서에 부여된 마법 덕분.
현성이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야.”
그런 그가 펼치고 있는 마도서 위로는 금색의 나침반이 둥둥 떠있었다.
그리고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나무로 꽉 막힌 길.
그러나 신기하게도 현성이 앞으로 발을 내딛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무가 일렁이며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이번에도 가짜지?”
그 모습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레이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품속에서 동전하나를 꺼내 현성에게 건넸다.
“아씨. 나무는 진짜인줄 알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티가 나지 않을 정도.
덕분에 마도서가 없으면 길을 잃기 십상.
괜히 아카데미에서 비밀의 숲을 출입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레이첼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날 속였지?”
“뭘?”
“길은 마도서 때문에 알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나무나 바위들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 거야.”
비밀의 숲에 들어오고 난 뒤,
현성과 레이첼은 간단한 내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나무를 포함한 것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맞히는 것.
그리고 현성에게 있어 이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캐릭터가 눈앞의 나무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현성의 패시브인 게이머의 본능 덕분.
물론 이것가지고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 정도 내기에서 승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에 지금껏 결과는 지금껏 전부 현성의 승리.
덕분에 그의 주머니는 두둑해지고 있었다.
두둑해진 주머니에 현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은 돈 좀 아낄 수 있겠군.’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매달 수연이 보내주는 생활비가 마음에 걸렸는데 잘되었다.
아마 이번 달에는 아낀 돈으로 수연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현성과는 달리 타들어가는 레이첼의 속.
“에이씨….”
레이첼이 볼 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다 맞추는 거야….”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운이지 뭐.”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