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63화 (63/240)

063화 정령왕의 술잔(5)

“…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현성을 향해 되물었다.

막힌 벽을 뚫고 지나간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니가 드디어 미쳤구나.”

“진심인데.”

“…벽돌 같은 거 없냐?”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벽돌을 왜 찾아?”

그러자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걸로 니 머리 후려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나 싶어서.”

그런 레이첼의 답변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미치셨나.”

“내 말이 그 말이야!”

지금 레이첼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벽 너머의 사람들은 점점 창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엇, 잠시만요. 저기 창문이 열려있는데요?”

“창문?”

“그럼 창문으로 나갔다는 거야? 여긴 5층인데?”

“혹시 모르니까….”

그 말에 레이첼이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며 현성에게 속닥였다.

“어쩔 거야!”

하지만 현성에게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방금 말했잖아. 벽 뚫고 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현성은 어느새 막힌 벽 쪽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며 현성과 창문을 번갈아보았다.

지금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원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껏 잘해오다가 왜 이래?!’

심지어 마도서를 찾을 때만 해도 잘만하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레이첼이 다시 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허무하게 마도서를 뺏길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마도서를 가지고…!’

그대로 레이첼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벽 바로 옆에 있던 현성이 보이지 않았다.

“…흐에?”

이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 갑자기 어디로….”

혹시나 싶어 아래를 바라보았지만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어둠이 내려앉은 바닥 뿐.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진 현성에 레이첼의 사고가 정지했다.

허나 그때였다.

“야. 뭐해. 빨리 오라니까.”

위쪽에서 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레이첼이 황급히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느새 옥상 위로 올라간 현성이 보였다.

“…뭐야. 너 어떻게 올라갔어?”

보란 듯이 옥상 위에 올라가있는 현성.

그리고 지금 레이첼이 있는 난간과 옥상과의 거리는 못해도 10m는 훌쩍 넘어보였다.

거기다 난간과 옥상사이에는 타고 올라갈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뭘 타고 올라간다 해도 그 짧은 시간 내에 저 위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에 레이첼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고개를 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나, 나는 어떻게 해!”

“올라오라니까?”

“어떻게?!”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벽을 가리켰다.

“벽에 비벼.”

“…뭐?”

“계속 비비다 보면 올라올 수 있어.”

얼토당토 않는 현성의 답변에 레이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창문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터벅터벅.

이에 레이첼이 움찔 거리며 벽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대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찌됐든 현성 그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두고 보자….”

그와 함께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리며 벽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꽉 막힌 벽 앞.

레이첼이 막힌 벽에 대고 몸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한 번 비빌 때마다 레이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뱀파이어 일족의 공주.

고귀한 혈통의 그녀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

“씨이….”

그렇게 레이첼이 계속해서 몸을 비볐다.

몇 초가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이었다.

“지금! 앞으로 내딛어!”

위에 있던 현성이 뭔가 발견한 듯 신호했다.

이에 레이첼이 눈 딱 감고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르륵.

그녀의 발끝을 타고 뭔가 통과되는 느낌이 들었다.

앞은 분명 꽉 막힌 벽.

그대로 의문을 갖기도 전에 뭔가 오묘한 감각이 온 몸을 감쌌다.

-슈슉!

그리고 레이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현성이 있는 옥상 위로 올라와있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

“…?!”

이에 레이첼이 어안이 벙벙한 듯.

현성과 아래를 번갈아보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올라왔다. 그것도 옥상 위로.

아니 올라왔다는 말보다는 오히려 순간이동을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동시에 그런 레이첼의 모습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이것이 바로 일명 벽뚫이라고 불리는 기술.

현성이 아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도 되는군.’

모든 게임은 완벽할 수 없다.

어디든 버그는 존재한다.

다만 아직 그 버그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리고 방금 현성이 행한 기술 ‘벽뚫’ 역시 일종의 버그성 테크닉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맵 어딘가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을 찾아 이동하는 법.

그게 바로 벽뚫이었다.

‘역시 이곳이 <이스페리아>라면 존재할 수밖에 없지.’

현성이 작게 웃으며 벽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이 마치 벽을 통과하듯 스르륵 사라졌다.

앞서 말했듯 모든 게임은 완벽할 수 없다.

그건 <이스페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넓은 맵 어딘가에 존재하는 버그를 찾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걸 찾는다면 그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운이 더럽게 좋거나 혹은 게임에 인생을 갈아 넣을 정도로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거나.

그리고 당연히 현성의 경우는 후자.

이곳은 한창 그가 <이스페리아> 스피드런 공략을 만들 때 찾아낸 장소 중 하나였다.

‘…내가 이거 찾느라 고생 좀 했지.’

현성이 과거를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이곳 하나 찾겠다고 그는 <이스페리아>의 벽이란 곳은 전부 확인하며 화면을 돌리고 비집고 아주 생난리란 난리는 전부 해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결실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평타 캔슬에 이은 벽뚫이라니.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나는 기행.

보통 이런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미친놈.”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처음에는 미친놈인줄 알았다고.”

그러면서 레이첼이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어떻게 이런 걸 찾은 거야? 아니 애초에 무슨 원리인거야?”

그러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아카데미에서 실험한 공간이동마법의 일종일지도 모르지.”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고 굳이 말하자면 물리엔진의 신비함정도가 될 터.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레이첼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쿡 찔렀다.

“흐엑!”

이에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뭐…뭐, 뭐야 갑자기!”

“그냥 해봤어.”

현성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이걸로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는 건 피했으니 다음으로 가자.”

“…다음?”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도서관에 사람들 빠지면 내려가는 거 아니었어? 비밀의 숲으로 간다며.”

“맞아.”

레이첼의 말 그대로였다.

원래대로라면 도서관 탈출 퀘스트는 사람들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비밀의 숲으로 가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미 벽뚫을 사용한 순간부터 현성의 머릿속에는 다른 계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근데 난 조금 빠르게 가보려고.”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그가 선보일 것은 과거 <이스페리아> 게시판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았던 스피드 런.

그리고 그런 현성의 계획을 알 턱이 없는 레이첼이 되물었다.

“…어떻게?”

순수하기 그지없는 물음.

이에 현성이 앞장서며 옥상 어딘가로 걸어갔다.

보통 이런 아카데미 물에서 옥상이라 한다면 두근두근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장소임과 동시에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는 비밀의 장소.

하지만 <이스페리아>에서의 옥상은 그 용도가 조금 달랐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는 비밀의 장소.

이에 아카데미의 한 학생은 이점을 이용해 옥상을 자신만의 은밀한 실험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드르륵.

현성이 옥상 한 구석에 있던 자전거 한 대를 꺼내왔다.

그것도 앞에 철제 바구니가 달린 클래식한 자전거였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했다.

바퀴가 있어야할 곳에는 바퀴 대신 무언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력석.

이에 레이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뭔데?”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우리를 비밀의 숲까지 안내해줄 이동수단.”

“…뭐?”

소개한다.

이 자전거의 정식 명칭은 ‘괴짜 발명가 루비의 우주선’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현성의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로 아카데미의 학생 중 괴짜 발명가라 불리는 루비라는 등장인물의 발명품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스페리아>에서 옥상은 누군가의 은밀한 실험실로 쓰였다.

그게 바로 이 루비라는 학생이었으며, 현성이 이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서브 퀘스트 루비의 꿈.’

<이스페리아>는 메인 퀘스트를 제외하고, 일부 조연으로 이루어진 서브 퀘스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루비의 꿈’이었다.

본 퀘스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발명가의 꿈을 가지고 있는 루비.

그녀는 어릴 적 본 고전명화 E.T.

즉 the Extra-Terrestrial라는 영화를 너무 인상 깊게 본 나머지 그곳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직접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여기서 플레이어의 역할은 그녀를 도와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완성해 직접 타보는 것.’

이후 결과는 나름 대성공.

그리고 이를 계기로 루비는 더더욱 발명가의 꿈을 불태우며 퀘스트는 마무리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법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서브 퀘스트다.

‘보통은 여기서 이 이야기는 완결을 맞이하기 마련.’

하지만 과거의 현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루비라는 소녀의 꿈을 자신의 스피드 런에 접목시키기에 이르렀고.

그런 현성의 미친 짓거리는 놀랍게도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당시 반응은 그야말로 여러 의미로 뜨거웠다.

감히 어느 미친놈이 서브 퀘스트에 쓰이던 자전거를 스피드런에 쓸 생각을 했겠는가.

심지어 개발사마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에 관련 영상과 현성의 게시글은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스페리아>의 게시판을 충격으로 몰고 갔던 세기의 스피드 런.

그때의 미친 짓거리가 다시 한 번 펼쳐지려하고 있었다.

“좋아. 다 됐다.”

그대로 현성이 자전거 정비를 끝내고 곧바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레이첼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야. 타.”

* * * * *

그대로 잠시 뒤.

아무도 없는 아카데미 건물 옥상 위.

그곳에는 자전거에 탄 현성과 그 앞 철제 바구니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레이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거 맞아?”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크흠. 자리가 이거 밖에 없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마도서를 펼치며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괴짜 발명가 루비의 우주선’의 이동원리는 간단하다.

바퀴대신 달려있는 마력석에 바람속성 마법을 부여.

그 추진력으로 하늘을 난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

이에 현성이 앞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런 그가 들고 있는 마도서의 페이지에는 바람마법 윈드 스톰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윈드 스톰을 발동하는 것 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준비됐지?”

“…아, 아니 이거 맞아?”

레이첼의 불안한 물음.

그러자 현성은 그런 레이첼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윈드 스톰.”

그때였다.

마도서를 타고 푸른빛의 마력이 토해져 나오며 부드러운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그런 바람은 곧바로 자전거의 마력석에 모여들었고.

-우우웅.

마침내 모든 마력석에 충분한 마력이 모였을 때.

현성이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그러자 자전가 굉음을 내며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야야. 잠깐 이거 뭔가 이상…!”

“몰라. 될 대로 되라지.”

현성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전거가 옥상난간을 넘어 폭발하듯 위로 날아올랐다.

차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

그와 함께 급발진한 자전거와 함께 레이첼의 은발이 세차게 흩날렸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을 내며 공중을 도약한 자전거.

그 사이.

레이첼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녀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반짝거렸다.

“야아아아!! 이거 맞냐고오오오!!”

아름답게 빛나는 달밤 아래.

폭풍을 타고 공중을 날아가는 자전거.

그런 레이첼과 현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전명화 E.T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