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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62화 (62/240)

062화 정령왕의 술잔(4)

그대로 성수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내리는 차가운 물방울이 현성의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이는 비단 현성뿐만이 아니었다.

[모, 몸이…끄아아아악!!]

도서관의 망령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성수에 녹아 흐려지는 몸.

망령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더욱 빠르게 녹아갈 뿐이었다.

이미 주변은 쏟아진 성수로 가득했다.

그런 망령의 모습에 현성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에 말했듯이 이번 도서관의 망령 공략의 핵심은 히로인.

그리고 현성이 계획한 것은 비단 레이첼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숨기고 있던 무기는 다름 아닌 하린의 성수.

보통의 경우라면 이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성수는커녕, 하린과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웬만하면 하린은 튜토리얼에서 죽어버리니까.’

하지만 <이스페리아>에 인생을 갈아 넣은 현성만은 달랐다.

튜토리얼에서 보란 듯이 하린을 구해내고, 그에 이어 성수를 이용해 레이첼에게 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 망령 공략까지.

그 사이.

마침내 성수가 전부 쏟아진 도서관.

그 바닥은 어느새 성수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수 소나기를 직격으로 맞은 도서관의 망령.

그가 마도서를 껴안은 채 비틀거렸다.

이미 망령의 형체는 사라지기 직전.

[이렇게 허무하게….]

망령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진부한 대사.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를 타고 불꽃이 타올랐다.

-화르륵.

그대로 현성이 망령을 향해 손가락을 퉁기며 말했다.

“잘 가.”

그와 동시에 현성의 손끝에 있던 불씨가 망령에게 옮겨 붙었다.

옮겨 붙은 불꽃은 순식간에 망령의 몸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끼에에엑!!]

불타오르는 불꽃 속.

망령의 비명소리가 삐져나오며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

-푸스스.

마침내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졌을 때.

망령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하얀 가루와 마도서 한 권이 자리할 뿐이었다.

곧바로 현성의 눈앞에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도서관의 망령을 퇴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 도서관의 망령 퇴치.]

퀘스트 내용

-도서관에 나타난 망령을 퇴치하시오.(완료)

보상 : 고대의 마도서

그대로 현성이 떨어진 마도서를 집으며 그에 대한 정보 창을 살폈다.

[고대의 마도서]

[특수 퀘스트 아이템]

설명 :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책으로, 정령왕의 힘이 깃든 마법의 서이다.

그에 따라 수많은 마법이 담겨있으며 일정시간 동안 페이지에 부여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하면 정령왕과 관련된 유적을 찾을 수도?

정보 창을 확인한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적혀있다시피 고대의 마법서는 단순한 퀘스트 아이템을 넘어, 부가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게 바로 마도서에 부여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언제까지고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는 건 아쉽지만.’

마도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밀의 숲에 들어가 유적을 공략할 때까지.

그리고 유적을 클리어하면 마도서는 그대로 소멸.

즉 마도서에 담긴 마법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게 이번 에피소드의 기믹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열쇠는 획득.’

이제 비밀의 숲으로 향할 차례였다.

그렇게 마도서를 획득한 현성이 고개를 돌린 순간.

“주, 죽을 뻔 했네….”

레이첼이 바닥에 잔뜩 웅크린 채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위로는 붉은 피로 이루어진 우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르르.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붉은 우산이 흩어지며 바닥에 쏟아졌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을 째려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갑자기 말도 안하고 성수를 던지다니.

“하, 하마터면 나도 같이 당할 뻔 했잖아!”

레이첼이 현성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도서관의 망령과 같은 꼴이 될 뻔했다.

언데드는 아니지만 레이첼은 어디까지나 뱀파이어.

성수와 최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구 건물에서 물고문(?)당했을 때처럼 조금씩 뿌린 것도 아니고, 아예 성수 수십 병을 한 번에 터트린 위력이었다.

그만큼 그 위력은 상상이상.

도서관의 망령이 끽 소리도 못하고 성불할 정도면 말 다 했다.

그야말로 짧지만 일정지역을 성역으로 만들 정도의 신성력.

‘만약 내가 저걸 그대로 맞았다면….’

현성이 검은 가방을 던진 순간.

빠르게 성수임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피로 우산을 만들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마터면 정화당할 뻔했네.’

레이첼이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흥건한 성수와 현성을 번갈아봤다.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다.

아니 같은 팀(?)이면 못해도 경고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너 진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붉은 피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뱀파이어 일족의 공주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막을 줄 알고 있었지.”

“그, 그건….”

“설마 아닌가봐?”

그대로 현성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움찔.

그러자 레이첼의 몸이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려 말했다.

“다, 당연하지! 이 정도도 막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러면서 레이첼이 성수를 가리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제법인걸? 그 짧은 사이 이런 방법을 생각하다니.”

“아냐. 이게 다 레이첼 니가 틈을 만들어준 덕분이지.”

웬일로 현성의 입에서 나온 칭찬.

이에 레이첼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후…후후….”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칭찬인가.

그동안 아카데미에 온 이후 삽질만 하던 그녀에게 있어 간만의 칭찬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레이첼이 현성이 들고 있던 마도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저게 니가 말한 열쇠야?”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도서를 들었다.

“응. 이제 비밀의 숲으로 가면 돼.”

그런 현성의 말과 동시에 레이첼의 입가를 타고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마침내 아카데미에 와서 이렇다고 할 만 한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다 이번 일이 잘 풀려서 정령왕의 술잔을 얻기만 한다면….’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야 말로 레이첼은 그간의 좌절과 후회로 점철된 과거를 만회함은 물론 일족에게 크나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짜릿할 정도였다.

“좋아. 그럼 곧바로…!”

그대로 의욕에 가득 찬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나 그 순간.

그녀가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읏!”

이에 현성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어지러워?”

그의 말에 레이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긴 그만큼 피를 썼으니 그럴 만도 하지.”

현성이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말했듯이 현재 레이첼은 항상 몸에 피가 모자란 상태.

그렇기 때문에 빈혈을 포함해서 여러 문제를 겪고 있다.

어쩌면 그녀가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된 탓에는 이런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사람만 해도 피가 모자라면 만성 무기력증부터 두통, 탈모, 불면증까지 별별 증상이 나타나는데 뱀파이어인 그녀는 얼마나 심하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면 밥을 못 먹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터.

그런 와중에 가뜩이나 별로 없는 피를 썼으니 빈혈증상이 올만했다.

그대로 잠시 뒤.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

그러자 잠시 현성에게 기대고 있던 레이첼이 몸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 조금 괜찮아진 거 같아.”

그런 레이첼의 대답에 현성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그럼 이제 준비하자.”

“…뭐? 뭘 준비해?”

“뭐긴 뭐야.”

곧바로 현성이 엉망이 된 도서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튈 준비.”

“…흐에?”

얼빠진 레이첼의 대답.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 전체에 붉은 빛이 들어오며 시끄러운 경보음이 터져 나왔다.

-왜애애앵!!

이에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번갈아보았다.

“뭐, 뭐야! 이거 뭔데!”

“경보.”

현성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신발 끈을 동여맸다.

도서관의 망령 퀘스트의 진행은 이러했다.

오후 6시에 10시 사이.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진입.

그렇다면 현성이 겪은 대로 도서관의 망령과 조우하고, 망령을 퇴치 하고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연계 퀘스트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연계 퀘스트의 내용은 다름 아닌 제한 시간 내에 경비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

-띠링.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알림 음과 함께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도서관 탈출]

퀘스트 내용

-도서관을 벗어나 비밀의 숲까지 도달하시오.(진행 중)

*본 퀘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경우 곧바로 실패합니다.

머지않아 도서관 밖으로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걸음과 당장 도서관을 확인하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에 현성이 바깥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맞지?”

“…그, 그냥 대충 유령이 나와서 그랬다고 얼버무리면 안 될까?”

레이첼이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도서 뺏기고 싶으면 그래도 돼.”

“젠장.”

“거기다 벌점은 덤이지.”

“…그건 딱히 상관없지 않나?”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넌 상관없겠지만 난 좀 다르거든. 거기다 너 이번에 벌점까지 먹으면 퇴학위기 아니야?”

허를 찌르는 현성의 말.

동시에 레이첼이 흠칫거렸다.

겨우 고대의 마도서까지 얻었는데 여기서 퇴학당한다면 정령왕의 술잔은 그대로 물 건너간다.

“하아….”

이에 레이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터업.

하지만 곧바로 현성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저지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해? 도망치자며.”

“맞아. 도망쳐야지.”

“근데 왜….”

“이미 입구로 나가기에는 늦었어. 그래서 저기로 나갈 거야.”

그대로 현성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창문.

-움찔.

그런 그의 말에 레이첼이 창문과 현성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지, 진심?”

“진심.”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곧장 창틀에 발을 올렸다.

당장에라도 창문을 넘어가려는 현성에 레이첼이 황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 아니 암만 그래도 이건 좀….”

“됐고. 너도 넘어와.”

이상하리만큼 태연한 현성의 태도.

허나 그와는 상반되게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걸린다면 마도서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현성의 말대로 퇴학까지 갈 위기.

“에이씨…!”

이에 결국 레이첼이 어쩔 수 없이 창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멈추고, 도서관의 문이 열린 순간.

-벌컥!

한 끝 차이로 레이첼이 창문을 넘었다.

그대로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바짝 붙었다.

레이첼의 발밑은 까마득한 바닥.

그녀와 현성은 그야말로 한 뼘에 불과한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아무도 없어?”

“더 찾아봐!”

“예, 알겠습니다!”

도서관 안쪽은 벌써 사람들이 들어왔다.

바로 벽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외침.

아직은 들키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

“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레이첼이 현성을 바라보며 작게 속닥였다.

그러자 그가 꽉 막힌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막힌 벽 보이지?”

“벽?”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저길 뚫고 지나갈 거야.”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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