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정령왕의 술잔(2)
그렇게 구 아카데미 건물에서 있었던 일을 뒤로하고.
찾아온 다음 날 오후 6시.
레이첼이 웬일로 자신의 방안이 아닌, 벤치에 앉아있었다.
“…언제 오는 거야.”
그대로 레이첼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수업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이 나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하나둘씩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인파 속.
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 저 멀리 현성을 발견한 레이첼이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그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현성 역시 벤치에 앉아있는 레이첼을 발견하고 걸어왔다.
그런 현성의 손에는 아카데미 내 카페에서 들고 온 커피 두 잔이 들려있었다.
잠시 뒤.
레이첼의 맞은편에 앉은 현성이 아무 말 없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러자 레이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뭘 봐.”
“아니 넌 수업 안 듣나 싶어서.”
“피의 왕녀는 그런 수업 필요 없어.”
단호한 레이첼의 대답.
이에 현성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예예, 퍽이나 그러시겠죠.”
그런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그를 째려봤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흥. 그나저나 너무 늦는 거 아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아니 그러니까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라니까.”
“…안쪽은 사람 많아서 싫어.”
“쯧.”
현성이 혀를 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왜 뭐.”
레이첼이 작게 으르렁거렸다.
이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됐고. 이거나 먹어. 카라멜마끼아또 맞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고 맛있어하는 음료.
그게 바로 카라멜마끼아또였다.
카페인이 들어있어 밤샘 게임에 최적이고, 당분까지 들어있는 완전식품.
커피는 그녀에게 있어 그야말로 단순한 음료가 아닌 에너지 포션이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레이첼이 얼떨떨하게 커피를 받아들며 물었다.
그녀는 물론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다른 커피는 써서 잘 먹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 것은 오로지 달달한 카라멜마끼아또.
‘그냥 아무거나 사온건가?’
레이첼이 현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허나 <이스페리아>의 고인물인 현성에게 있어 그녀가 좋아하는 음료를 파악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불만이면 먹지 말든가.”
그런 레이첼의 눈빛에 현성이 다시 커피를 뺏을 것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커피를 쭉 잡아당기며 웅얼거렸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조용히 마셔.”
“흥.”
그대로 레이첼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동시에 단맛과 적당한 쓴맛이 그녀의 목을 적셨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원체 피를 먹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갈증을 달래야했다.
-꼴깍.
물론 그렇다고 피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아예 안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대로 레이첼이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비우고는 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정령왕의 술잔은 어떻게 찾을 건데. 그거 비밀의 숲인가 거기 있다며.”
레이첼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현성에게 물었다.
비밀의 숲.
아카데미 외곽에 위치한 필드의 이름으로, 말 그대로 드(럽게)넓은 대자연과 정령들이 노니는 숲이었다.
거기다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이곳은 학생들이 출입이 금지된 구역.
하지만 현성은 비밀의 숲이 아닌, 오늘 여기에서 약속을 잡았다.
이에 레이첼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여기로 나오라 한 거야?”
그 말에 현성이 뒤에 있는 아카데미 건물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도서관에 가야하거든.”
“도서관?”
현성의 답변에 레이첼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며 입을 열었다.
“너. 어제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어? 이미 도서관은 내가 다 찾아봤어. 그러니까 괜한 헛수고 하지 말고….”
그리고 채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성이 대수롭지 않게 턱을 괴며 말했다.
“그건 니가 못 찾은 거고.”
그러면서 현성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게임만큼이나 찾는 것도 못하시네.”
“아니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
동시에 레이첼이 울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현성이 생수병을 흔들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성수 아직 많이 남았어.”
“…큿.”
불과 어제 하루 종일 당했던 성수세례.
그때의 기억이 레이첼의 뇌리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이에 그녀가 툴툴거리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게임에서도 그렇고 얍삽이만 써….”
그런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꼬우면 너도 쓰던가.”
“흥. 됐고. 그래서 도서관에 있는 거 확실해.”
“그래. 좀 더 정확히는 열쇠가 거기 있지.”
“열쇠?”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나중에 되면 다 알거야.”
“그럼 도서관에는 언제 갈 건데.”
“언제 가긴.”
곧 현성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제 곧 도서관 닫을 시간 아니야?”
“그러니까 가는 거지.”
현성이 히죽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 * * * *
아카데미 안쪽에 위치한 도서관.
곧 도서관이 닫을 시간이 찾아왔다.
이에 사서가 시계를 흘깃 바라보고는 아직 도서관에 남아있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퇴실시간입니다.”
그런 사서의 말에 학생들이 하나 둘씩 책을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사서가 도서관 안쪽을 스윽 훑어보았다.
고요한 도서관.
도서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나간 모양이었다.
이에 사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나가며 불을 껐다.
동시에 입구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철커덕.
그 뒤로 5분 정도 지났을까.
고요한 도서관 속.
두 명의 남녀가 어둠 속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너 정령왕의 술잔 안 찾을 거야?”
현성의 단호한 한 마디.
그 말에 레이첼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알았으면 따라와.”
그대로 현성이 앞장서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런 도서관 내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이는 건 커다란 서재의 연속이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만.”
현성이 크게 기지개를 피며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 여기에 열쇠가 있는 거 맞아?”
“아. 글쎄. 그렇다니까.”
정령왕의 술잔.
이를 찾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도서관에 있는 열쇠를 찾아야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섣불리 비밀의 숲에 들어갔다가는 정령의 장난에 길을 잃고 숲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니까.’
괜히 아카데미에서 비밀의 숲을 금지구역으로 지정한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나침반은 물론 발자국을 비롯한 모든 수단이 소용없었다.
필요한 건 오직 도서관에 있는 열쇠, 그러니까 책이었다.
이에 뒤에서 따라오던 레이첼이 말했다.
“…너 설마 밤새 도서관을 뒤질 생각으로 이 시간에 들어온 건 아니지?”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한눈에 봐도 상당한 규모.
그리고 이 도서관을 전부 다 뒤져서 열쇠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성은 그저 여유롭게 도서관을 거닐 뿐이었다.
“야. 무슨 말 좀 해봐.”
그리고 현성이 말이 없으면 없을수록 레이첼은 점점 더 불안해져갔다.
단순히 열쇠를 못 찾을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도서관에는 과거 이곳의 주인이었던 망령이 떠돌아다닌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내려져오는 오랜 전통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망령.
레이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현성의 옷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기…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될까? 하물며 낮에라도….”
“낮에는 너 나오기 싫어하잖아.”
“그치만….”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설마 도서관의 망령 때문에 그래?”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움찔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너도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알다시피 레이첼은 과거에 혼자 도서관을 뒤졌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책이 쏟아지며 기절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기절하기 직전.
레이첼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바로 사신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망령의 존재를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 따위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호기롭게 도서관을 뒤졌다.
허나 직접 망령을 조우하고 기절까지 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진짜 망령이 존재했다니.
그 이후로 레이첼은 도서관 주변으로는 얼쩡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열쇠가 도서관에 있다는 거야….’
레이첼이 속으로 현성을 원망하며 빽빽한 서재사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불 꺼진 도서관.
당장 지금에라도 그때의 망령이 튀어나올 거 같은 분위기였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그거 거짓말 아니라니까!”
레이첼이 현성의 팔을 꽈악 붙잡으며 말했다.
이에 현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아. 거짓말 아닌 거.”
“…뭐?”
“여기 진짜 귀신 나와.”
그 말에 레이첼이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굳어버렸다.
실제로 도서관에서는 망령이 나온다.
그리고 현성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본디 이런 게임에서 도서관에는 유령이 있는 게 국룰.’
그런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그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거짓말이지?”
그러자 현성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향해 말했다.
“니가 거짓말 아니라며….”
“아니. 근데 너까지 나온다고 하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현성의 물음에 레이첼이 바깥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다, 다음에 오면 안 될까?”
“응. 안 돼.”
“아. 제발 귀신 다 죽었으면…왜 죽어서도 난리야….”
단호한 현성의 대답에 레이첼이 웅얼거렸다.
그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잊을까봐 말하지만 레이첼은 뱀파이어다.
“따지고 보면 니도 귀신 사촌 아니냐? 뱀파이어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냐!”
“별 다를 거 없는데 무슨….”
그때였다.
도서관을 타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
-스으으.
하지만 도서관은 창문은 물론 문이란 문은 전부 닫힌 상태.
바람이 불 리가 없었다.
이에 레이첼이 더더욱 현성의 팔을 꾹 껴안으며 말했다.
“…와, 왔다.”
그녀가 망령을 조우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뱀파이어 특유의 날카로운 기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도서관에 현성과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 존재한다.
“야. 혹시 모르니 조심…!”
그리고 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옆에 있던 커다란 서재가 쓰러졌다.
동시에 서재에 꽂혀있던 책들이 현성과 레이첼을 향해 쏟아졌다.
“젠장!”
이에 현성이 재빨리 레이첼을 껴안았다.
그대로 수십, 수백 개의 책이 그 둘을 뒤덮었다.
-콰앙!
그렇게 책이 쏟아지고 잠시 뒤.
레이첼이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쏟아지는 책을 몸으로 막은 현성이 보였다.
“…괜찮아?”
마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다니.
레이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근데 너는….”
그 순간이었다.
현성의 머리 위로 책 한권이 떨어졌다.
이에 레이첼이 황급히 외쳤다.
“위, 위험해!”
그 말에 현성이 슬쩍 고개를 꺾어 떨어지는 책을 피했다.
그야말로 재빠른 운동신경.
그리고 현성이 피한 덕분에 떨어지는 책은 그대로 레이첼의 이마를 가격했다.
“흐갹!”
동시에 레이첼의 머리를 타고 진한 고통이 느껴졌다.
정정한다.
로맨스 소설이 될 뻔 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현성이 그런 레이첼을 향해 건성으로 말했다.
“씨이…너 일부러 그랬지?”
“아니 맞으면 아프잖아. 그래서 피했지.”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이마를 매만지며 그를 째려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꼬우면 너도 피하던지.”
그 말에 울컥한 레이첼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
너 나중에 진짜 밤길 조심해라. 내가 나중에 벽돌로 니 뒤통수 후려칠 거니까.”
“해보시던가.”
“아아악! 짜증나!”
하지만 그도 잠시.
뭔가 발견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야. 근데 싸우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
그러면서 현성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그 열쇠. 찾은 거 같거든.”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앞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망령이 서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책.
저게 바로 현성이 찾으려는 열쇠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