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정령왕의 술잔(1)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이 텅 빈 성수통을 바닥에 던지며 검은 가방에서 또 다른 성수통을 꺼내들었다.
그런 그의 발밑에는 이미 빈 통 여럿이 뒹굴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끈질긴 녀석이군.”
그렇게 말하는 현성의 눈빛은 반쯤은 광기로 물들어있었다.
처음에는 정보만 캘 생각으로 임했던 그지만, 점점 하면 할수록 밀려오는 묘한 중독성에 그는 이미 역할에 몰입한지 오래였다.
‘…이거 은근히 재밌네.’
그리고 그 원인의 중심에는 레이첼이 있었다.
한 번 성수를 뿌릴 때마다 보여주는 화려한 리액션.
한 마디로 그녀의 타격감은 찰지기 그지없었다.
‘샌드백도 이 정도로 찰지지는 않을 텐데.’
현성이 작게 감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장 지금도 그랬다.
“아! 따가! 따갑다고! 내 말 안 들려어엇?!”
레이첼은 마치 싱싱한 한 마리의 활어처럼 펄떡이며 몸을 틀었다.
이에 현성이 그녀의 패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패드의 차례군.”
그런 현성의 말에 레이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움찔!
그러고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레이첼이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패드는…패드는 놔줘. 패드는 아무런 잘못도 없잖아!”
계속되는 성수세례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향한 저 강한 집념.
이는 현성으로 하여금 어떻게는 그녀를 굴복시키겠다는 도전의식을 자극하게 했다.
그가 가차 없이 성수의 뚜껑을 따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볼까.”
지금의 현성은 그야말로 퇴마를 행하는 바티칸의 신부 그 자체.
“오오, 신이시여!”
현성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그녀를 향해 성수를 털어냈다.
동시에 레이첼이 푸드덕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씨! 야! 그, 그만…!”
“그럼 패드?”
“그. 그건 안 된다!”
게임을 향한 저 의지를 보라.
솔직히 이 정도까지 됐으면 한번쯤 포기할만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어떻게든 패드는 사수하겠다며 온 몸으로 성수를 받아내고 있었다.
사실 성수를 뿌리는 것 자체는 뱀파이어에게 효과는 있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뱀파이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레이첼이라면 말이 달랐다.
계속된 히키코모리 생활.
오랜 시간 흡혈을 하지 못한 육체.
나태해진 정신력.
이런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의 성수세례는 버티기 힘들게 분명했다.
라고 생각했던 게 벌써 2시간째다.
이에 현성이 혀를 차며 마저 남은 물기를 털어냈다.
“징하다. 징해.”
저 의지로 노력했으면 진즉에 본 목적을 이루고도 남았을 것이다.
“앗 따가! 하지 말라고!”
그녀의 외침에 현성이 비아냥거리며 다시 한 번 물을 털어냈다.
“훼쥐말라궤~”
“으아악! 풀리기만 하면 내가 너는 꼭 죽인다!”
“해보시든가.”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물총을 발사하듯이 성수를 쭉 쏘아냈다.
그대로 쏘아진 물줄기는 시원하게 레이첼을 적셨다.
“아따따따따!”
아카데미 구 건물을 타고 울려 퍼지는 레이첼의 목소리.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에 현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것만큼은 안 쓰려 했건만….”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는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현성이 패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너 내가 장난하는 거 같냐?”
“흥. 그런다고 내가 굴복할 거 같….”
그때였다.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성이 냅다 들고 있던 패드를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고 그의 발끝을 따라 타오르는 불꽃.
-화르륵!
현성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패드를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러자 붉은 불꽃이 회오리치며 폭발했다.
-콰아앙…우지직!
폭발에 뒤덮인 패드.
잠시 뒤.
현성이 발밑에는 완전히 박살나고, 내부가 녹아내린 패드‘였던’것만 존재할 뿐이었다.
“앗아….”
동시에 레이첼이 나라 잃은 눈으로 패드의 잔해와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내 패드….”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성이 성수가 담긴 검은 가방 뒤.
또 다른 백팩을 열었다.
-스윽.
그리고 거기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게임기.
이를 본 순간.
레이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내, 내 플레X스테이션 왜 거기에서….”
레이첼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니 방에서 뜯어왔지.”
“이런 쓰레기 같은…!”
레이첼이 이를 으득 갈며 현성을 째려보았다.
패드는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게임기는 말이 달랐다.
한 번 박살나면 안에 있는 데이터까지 그대로 날아간다.
“당장 그 손 치워!”
레이첼이 현성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현성은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며 바닥에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을 타고 붉은 화염이 생성되었다.
“….”
현성 역시 그녀 못지않게 게임을 사랑하는 게이머.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거 까지는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정보는 필요 없어.”
“…뭐?”
“그냥 게임기한테 작별인사나 하라고.”
현성의 짧은 한마디.
그와 함께 현성이 게임기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꽂히기 직전이었다.
“마, 말할게!!”
결국 레이첼이 눈을 딱 감고 소리쳤다.
그 말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내지르던 주먹을 멈췄다.
그런 현성의 주먹과 게임기 간격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
“…탁월한 선택이야.”
곧 현성이 천천히 주먹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태연하게 다시 자리에 앉은 뒤.
레이첼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말해봐. 니 목표부터 지금까지 한 짓 하나하나 전부 다.”
“그, 그게….”
레이첼이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동안 레이첼은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알다시피 그녀의 목표는 아카데미에 숨겨진 전설급 아이템을 위해.
이에 아이템이 던전에 숨겨져 있나 싶어서 몰래 던전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길을 잃어 일주일간 던전 속에서 포류.
정보를 얻기 위해 교수들의 실험실에 들어갔다가, 발동한 경비시스템에 공격받아 결국 창문으로 탈출.
도서관에서 특수마도서가 보관된 서재까지 뒤지다가 갑자기 책이 쏟아지며 그대로 기절.
들으면 들을수록 어째 점점 슬퍼지는 내용뿐이었다.
이에 현성이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 다음은 얼마 전 불의 둥지에서의 혼란을 틈타 교장실을 뒤지려고 했었는데….”
불의 둥지.
드디어 현성이 원하는 정보가 나왔다.
그 말에 현성이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했었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아무것도 못 했어.”
“….”
그런 레이첼의 대답에 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게임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냥 진짜 확 박살내버려?”
이에 레이첼이 울음을 터트리며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왜에에에 다 말했잖아! 안부순다고 했잖아!”
헝클어진 은발.
거기다 서러운 듯 울고 있는 붉은 눈동자.
그 모습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니 말은 결국은 성공한 게 단 하나도 없다고?”
“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래….”
조잡한 변명.
그 답변에 현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 정도면 넌 어머니가 한 100명은 되냐.”
“너 지금 나한테 패드립 한 거야?”
그런 레이첼의 답변에 현성이 단호하게 주먹을 들었다.
“역시 박살내는 게….”
“미안해! 미안하다고오오!”
레이첼의 처절한 절규.
이에 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지금 시점 레이첼이 약해졌다고 해도 이 정도로 엉망일 줄이야….’
원래 <이스페리아>의 설정대로라면 주인공이 레이첼을 조우하는 것은 지금보다 한참 뒤.
그전에 레이첼의 생활은 단순히 서술로만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냥 게임에 빠져 살았거니 했는데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이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선 니 목표는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정령왕의 술잔이라고?”
“응. 맞아.”
정령왕의 술잔.
아카데미에 숨겨져 있는 전설급 아이템으로.
그 효과는 모든 저주를 완벽하게 해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이첼이 이 술잔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뱀파이어라는 일족에게 걸린 최악의 저주.
피의 갈증을 해제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이 과정에서 술잔을 노리는 레이첼을 죽일 경우.
전에 말한 대로 뱀파이어 진영은 마족 편에 붙어 플레이어와 적대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 현성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었다.
‘레이첼을 도와 아카데미에 숨겨진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한다.’
무엇보다 현재 레이첼은 2막의 보스로 각성하기 전.
그 전에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해 뱀파이어의 저주를 풀어버리면 자연스레 2막 보스인 그녀와의 마찰은 없어지게 된다.
‘즉 뱀파이어를 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고 동시에 2막 슈퍼패스.’
이에 현성이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그럼 내가 그 정령왕의 술잔 찾는 거 도와준다.”
“…뭐?”
현성의 말에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그게 소중한 게임기를 인질로 삼은 것도 모자라 성수세례까지 하고 할 말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속셈이야.”
레이첼이 현성을 의심하며 말했다.
이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대신 하나만 약속해”
그대로 현성이 레이첼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네 부모님에게로 안내해줘.”
레이첼의 부모님.
즉 현재 뱀파이어 일족을 이끄는 지도자.
그녀를 도와 정령왕의 술잔을 획득하고, 이를 계기로 뱀파이어 진영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한다.
이것이 현재 현성이 계획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아, 아니 그전에 내가 뭘 믿고!”
그녀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믿을 수밖에 없을 걸.”
그러면서 현성이 방금 레이첼의 눈물을 닦은 손을 들며 말했다.
“아, 그리고 아직 손에 뭍은 성수가 덜 말랐더라고.”
“잠깐. 그럼….”
그 순간이었다.
레이첼 그녀의 눈을 타고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을 본 것과 같은 눈이 타들어가는 느낌.
그게 아니면 실수로 양파를 깐 손으로 눈을 만진 것과 같은 느낌.
“눈이…내 눈이…으아아아악!”
레이첼이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에라도 눈을 닦고 싶었지만 현재 그녀는 묶여있는 상태.
그러자 현성이 한 손에 가위와 물티슈를 들고 말했다.
“믿을래. 말래.”
“이, 이 치사한….”
이에 결국 고통을 참다못한 레이첼이 엉엉 울며 소리쳤다.
“믿을게! 믿는다고!”
“좋은 선택이야.”
그 말에 현성이 태연하게 묶인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첼이 빛과 같은 속도로 현성이 들고 있던 물티슈를 낚아채었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의 자유를 되찾은 레이첼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이첼이 곧장 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게임기를 인질로 삼고 농락하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이잇! 너 내가 가만 안 둔다 했지!”
이에 현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들고 있던 성수 통을 뒤집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머리를 숙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 성수는 반칙…흐겍?!”
허나 그녀의 머리 위로 성수가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성수통은 뚜껑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 분명 믿는다고 했지?”
“….”
“뭐해. 손 안 잡고. 정령왕의 술잔 찾으러 가야지.”
그 말에 레이첼이 마지못해 현성의 손을 잡았다.
“씨이….”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