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57화 (57/240)

057화 2막의 시작(4)

레이첼이 현성에게 패배의 쓴 맛을 느끼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밤.

낮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 그녀의 방을 타고 희미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으으음….”

곧 푹신한 이불사이, 레이첼이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대로 창가를 타고 내리는 아스라한 달빛이 그녀를 밝혔다.

반짝거리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

그런 레이첼의 모습은 묘한 퇴폐미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계속된 폐인 생활로 망가졌다고 한들.

뱀파이어의 타고난 외모가 어디 갈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달이 뜬 밤.

뱀파이어의 특성상 하루 종일 태양이 떠있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레이첼은 밤새 게임을 하고난 뒤. 낮부터 지금까지 푹 자고 일어난 상태.

물론 낮에는 아카데미 수업이 있었지만, 이미 그녀에게 있어 성적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못했다.

어차피 자신은 아카데미에 숨겨져 있는 전설 아이템만 찾으면 바로 돌아갈 것이다.

덕분에 화끈하게 모든 수업을 재끼고 일어난 그녀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고.

“으그극!”

그대로 레이첼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이제 푹 자고 일어났겠다.

그녀가 할 일은 정해져있었다.

“…일퀘 깨야지.”

바로 철의 권7을 키는 것.

그리고 레이첼이 게임을 키자마자 익숙한 닉네임이 떠올랐다.

HS.

“역시 오늘도 들어와 있군.”

그 닉네임을 본 레이첼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HS. 일주일 전 자신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준 그 녀석의 닉네임이었다.

그 이후로도 녀석은 꾸준히 게임에 들어오며 승부를 걸어왔다.

‘녀석, 보통이 아니야.’

처음에는 복수전을 꿈꾸며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패배, 패배, 그리고 또 패배.

도저히 무슨 짓을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기본적인 패턴부터 반응속도. 심지어는 심리전까지.’

녀석은 격투게임에 필요한 모든 센스를 갖추고 있었다.덕분에 지금껏 철의 권7에서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레이첼은 새로운 루키에게 왕좌를 뺏기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돌아온 왕좌의 탈환 기회.

“후우….”

레이첼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그에게 도전신청을 넣었다.

그러자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화면에 떠오르는 카운트 다운.

-뚜둑! 뚜둑!

이에 레이첼이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풀었다.

이미 게임은 그녀에게 인생 그 자체였다.

‘기필코 오늘을 승리하리…!’

그렇게 다짐하며 레이첼이 경건하게 패드를 부여잡았다.

* * * * *

그대로 대략 3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레이첼이 신경질적으로 패드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아! 이게 왜 맞냐고!”

그런 그녀의 게임화면에는 게임오버가 떠있었다.

이번에도 또 졌다. 제기랄.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녀의 캐릭터는 공격에 맞아 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 빈혈….”

갑작스레 화를 낸 탓일까.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빈혈기운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다시 주섬주섬 집어던진 패드를 챙겼다.

“…고장 안 났겠지?”

요새 패드를 집어던지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그 원인은 당연히 보란 듯이 죽은 캐릭터 위에서 티배깅을 하고 있는 저 녀석 때문.

레이첼이 이빨을 갈며 부들부들 거렸다.

[흐어업! 흐어업! 흐어업!]

게임기를 타고 계속해서 짜증나는 기합소리가 삐져나왔다.

이번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은 단순히 격투게임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

그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간혹 플레이어 중에 그런 부류가 있다.

게임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빡치라고 하는 거라는 신념을 가진 악질.

심지어 그는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덕분에 근 일주일간, 레이첼은 그야말로 화병으로 속이 타들어갈 정도였다.

“실제로 만나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인간주제에…!”

레이첼이 주먹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 또 보란 듯이 게임을 종료하겠지.

그게 지금껏 일주일간 그가 보여준 패턴이었다.

‘능욕할 만큼 실컷 능욕하고 마지막에는 EZ를 치고 그대로 게임 종료.’

레이첼이 답답한 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끙끙거렸다.

“이이잇…!”

상상만 해도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차라리 아카데미에서 한 번 마주치기를 빌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속된말로 현피.

‘이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플레이를 하는 녀석이라면 분명 외모도 인성만큼 구리겠지.’

물론 여기서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지금껏 그가 해온 플레이는 전부 레이첼 그녀가 즐겨하던 플레이라는 것.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그녀에게는 그런 과거의 일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잠시 뒤,

-띠링!

알림음과 함께 채팅이 올라왔다.

이에 레이첼이 보나마다 같은 내용이겠거니 하고 화면을 바라본 순간.

“…어?”

그녀가 그대로 정지했다.

채팅창에는 그동안 봐왔던 EZ대신 처음 보는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일 9시. 아카데미 구 건물. 뒤쪽 화단.]

그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현피. 그러니까 직접 만나자는 메시지.

동시에 레이첼이 몸이 작게 떨렸다.

“…이, 이 하등한 인간 녀석이…!”

처음은 분노였다.

감히 대놓고 자신을 능멸하다니.

하지만 그 다음 느껴진 감정은 의심이었다.

‘갑자기 현피를?’

이에 그녀가 빤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이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흥.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깟 도발에 걸려들 거 같아?”

그대로 레이첼이 메시지를 씹으려고 패드를 들었을 때였다.

-띠링!

다시 한 번 울리는 채팅음.

그리고 화면에는 짧은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쫄?ㅋ]

그와 동시에 레이첼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이어서 뒷골을 타고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

그 순간. 레이첼의 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하! 하하…!”

레이첼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저절로 어금니가 갈릴 정도였다.

-빠드득!

이미 의심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 레이첼에게 남은 감정은 오직 그 망할 자식을 박살내버리겠다는 분노뿐이었다.

“…오냐. 원한다면 받아주마.”

레이첼이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게임에서는 졌을지 몰라도 현피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녀는 뱀파이어.

아무리 그녀가 약해졌다고 한들.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능력을 가진다.

게다가 외모는 또 어떤가?

아마 아카데미에서 외모로 그녀를 이기려면 못해도 하시연 급은 되어야했다.

그리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더러운 인성질이나 일삼는 녀석이 그녀보다 잘날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레이첼이 승리를 확신한 듯 히죽 웃었다.

“이참에 그 콧대를 눌러주지.”

그대로 레이첼이 현피를 받아들인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네놈의 콧대를 박살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를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상대방이 게임을 종료하였습니다.]

녀석이 게임을 종료함과 동시에 채팅창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그녀의 메시지만이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이…이…으아아악!!”

결국 레이첼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기어코 마지막까지 보기 좋게 당한 레이첼의 모습.

이에 그녀가 게임화면을 째려보며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만큼은 머리를 깨버리고 말겠다고.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전의 날은 훨씬 빨리 찾아왔다.

겨우 하루에 불과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레이첼에게 있어 그 어떤 날보다 신중한 날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줄곧 잡아오던 패드대신 헤어드라이기를 잡았다.

곧 모든 준비를 끝낸 그녀가 거울 앞에 섰다.

밝은 은발의 트윈 테일과 붉게 빛나는 적안.

아카데미의 명찰이 달린 예쁜 교복.

거기다 뱀파이어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까지.

마치 레이첼이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과연 누가 이 모습을 보고 그녀가 줄곧 게임에 빠져 방안에 처박혀있던 히키코모리라고 생각할까.

적어도 지금만큼은 레이첼은 피의 왕국의 공주이자 고고한 뱀파이어 그 자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레이첼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모습이라면 적어도 초장부터 외모에 주눅들일은 결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대방이 주눅들 정도였다.

“후우.”

그대로 레이첼이 심호흡을 하며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간만에 나서는 밖이었다.

그렇게 레이첼이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아카데미 구 건물로 향했다.

-휘이잉.

밝은 달빛 아래.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밤을 걷는 은발의 소녀에게서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마치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한 여주인공이라거나.

혹은 고고한 목표를 위해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신념을 가진 여주인공 같은 모습.

그러나 정작 레이첼은 고고한 목표고 자시고 게임에서 진 게 너무 분해 현피에 나서는 겜창일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약속한 9시에 맞춰 레이첼이 아카데미 구 건물에 다다랐다.

“….”

이에 레이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순간 자신이 속은 게 아닐까라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 자식….’

현피를 신청하고 자신을 엿 먹인 것인가.

그렇다면 그동안 머리세팅하고 꾸민 시간은?

그 시간이면 랭겜을 몇 판이나 돌릴 수 있는 시간인가.

동시에 레이첼은 채 말로 표현하지 못할 허망함이 밀려왔다.

종족의 막대한 사명을 지니고 아카데미에 들어왔건만.

고작 게임하나에 빠져 살다가 이젠 엿까지 먹다니.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순간 레이첼은 이른바 현자 타임에 빠졌다.

갑자기 불어오던 밤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이에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리려는 때였다.

-사박.

누군가 등장했다.

동시에 뱀파이어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이 깨어나며 레이첼이 곧바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안녕.”

현성이 서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짙은 흑발. 차갑게 가라앉은 눈매.

거기다 균형 잡힌 몸매와 태가 잡힌 근육.

‘……의외로 괜찮게 생겼잖아?’

아니 오히려 평균 이상이었다.

이에 레이첼이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눈매를 좁혔다.

“쯧.”

내심 인성만큼 망가진 외모를 기대했건만 예상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그녀 역시 외모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

-스르륵.

그대로 레이첼이 도도한 표정으로 한쪽 머리를 사르륵 넘기며 현성을 바라봤다.

“…네가 HS?”

동시에 기선제압을 위해서 레이첼이 차갑게 눈을 깔았다.

뱀파이어만이 가지는 특유의 위압.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움츠러들 터.

“맞아.”

그러나 눈앞의 현성은 당황하는 기색하나 없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데일런트는 물론 거래의 악마까지 상대해온 현성에게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현성은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저거 힘주고 나온 거 봐라. 아주 칼을 갈고 왔구만.’

현성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과 그녀를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이름 : 레이첼]

성별 : 여성

나이 : 17

종족 : 뱀파이어

클래스 : 로열블러드

업적 : [피의 왕국의 공주], [철의 권7에 자부심을 가지는], [게임폐인], [카페인중독]

상태창에서도 보다시피 지금 시점에서 레이첼은 방구석에서 패드만 붙잡고 게임에 빠져 사는 히키코모리 게임폐인.

그런 그녀가 이렇게 꾸미고 나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현성의 계획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뭐 그러니까 현피에 응했겠지.’

일주일간 철의 권7에서 그녀를 자극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튼 이걸로 그녀와 만나는 건 성공.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가장 중요한 계획을 실행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당연히.

“…근데 너 게임 진짜 못하더라?”

도발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