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2막의 시작(3)
그대로 현성의 캐릭터가 앞으로 대시하며 공격을 펼쳤다.
시작은 상단을 노린 발차기.
그와 동시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레이첼의 피통이 줄어들었다.
“자, 드가자~!”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현성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단. 중단. 하단.
3개로 이루어진 패턴을 섞어가며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콤보.
-두두두두!!
패드 위를 움직이는 현성의 손가락은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았다.
정확한 타이밍과 빠르기.
그와 더불어 상대방의 행동을 먼저 읽고 움직이는 심리전까지.
위에 있는 시간이 깎이면 깎일수록 레이첼의 피통 역시 깎여갔다.
레이첼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재빨리 현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현성이 기가 막히게 패턴을 캔슬하고, 다른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그 결과.
-콰앙!
현성의 캐릭터가 정권을 내지름과 함께 레이첼의 캐릭터가 쓰러졌다.
게임 오버.
그대로 현성은 다운된 캐릭터에게 다가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기를 모았다.
[흐어업! 흐어업! 흐어업!]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기합소리.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다음 판을 준비했다.
방금 전 그가 한 행동은 일명 티배깅.
티배깅.
보통 게임에서 상대를 도발하는 목적으로 쓰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격투게임이라면 그 효과는 상상 그 이상.
본디 격투게임이라는 장르는 그런 곳이었다.
철저한 약육강식.
이곳에 통하는 규칙은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뉴비라서 봐주거나 그런 나약한 마음가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꼬우면 강해져서 돌아와라.
이게 이곳의 룰이었다.
그리고 레이첼 역시 격투게임의 정점에 이른 실력답게 그 인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보란 듯이 티배깅을 선사.
이는 본디 레이첼이 가장 즐겨하는 플레이 중 하나였다.
‘…진짜 히로인 아니었으면 죽빵 때리고 싶을 정도.’
덕분에 처음 격투게임에서 레이첼을 접한 플레이어는 보통 히로인들에게서 느끼는 설렘 대신 빡침을 먼저 느낀다.
또한 과거 현성 역시 레이첼에게 온갖 굴욕을 당했던 플레이어 중 하나.
‘당장 <이스페리아> 갤러리에 레이첼만 검색하면 ‘게임 X같이 한다.’라는 게시물 하나정도는 꼭 있었지….’
이에 현성은 이대로는 당할 수 없다고 판단.
미니게임에 불과한 철의 권7을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한 결과.
실력으로 레이첼을 발라버릴 정도의 컨트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흐어업! 흐어업! 흐어업!]
무엇보다 지금 티배깅 역시 그 과정에서 터득한 기술.
그렇게 다음 라운드가 시작될 때까지 현성의 티배깅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게임의 시작을 울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3…2…1…파이트!]
철의 권7은 3판 3선승제.
지금은 현성이 1승으로 앞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성의 승리가 확정된 건 아니었다.
<끝까지 갈 때까지 모른다.>
이게 바로 격투게임의 묘미였다.
또한 레이첼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만큼.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며 현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현성의 패턴을 파악하려는 심산이었다.
더군다나 전판에서 그가 보여준 실력.
레이첼은 본능적으로 현성이 그동안 상대해오던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에 현성은 돌연 허공에 기술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쓰는 기술.
당연히 레이첼이 그런 기술을 맞아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성이 노린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술사용 시 나오는 특수 모션이었다.
[어이! 어이! 어이!]
동시에 현성의 캐릭터가 상대방을 도발하듯 손바닥을 까딱거렸다.
이른바 도발 모션.
현성은 쉬지 않고 특수 모션을 남발하며 레이첼을 도발했다.
그리고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현성 그가 알고 있는 레이첼이라면 반드시 도발에 먼저 넘어오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특유의 귀족적 태도.
‘…그만큼 프라이드 하나만은 최고거든.’
자존심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고고함의 극치.
그게 바로 레이첼이었다.
그대로 3초 정도 지났을까.
-슈슉!
정말 현성의 말대로 레이첼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
이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공격을 회피했다.
-타다닥.
그리고 이어진 현성의 커맨드.
그 커맨드는 다름 아닌 철의 권7내에서 최고의 데미지를 자랑하는 기술이었다.
동시에 주먹을 타고 특유의 붉은 이펙트가 번쩍거렸다.
[우오오!!]
우렁찬 캐릭터의 기합.
그와 함께 주먹을 내지르기 무섭게 레이첼의 반에 해당하는 피가 단숨에 날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오오!!]
다시 한 번 똑같은 커맨드.
그 공격에 이제 레이첼의 피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우오오!!]
역시 똑같은 커맨드였다.
이에 레이첼의 캐릭터가 저 멀리 날아가 쓰러지고.
곧이어 떠오르는 게임오버 창.
그 사이.
현성은 또다시 레이첼에게 다가가 현란한 티배깅을 선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
‘즐겁다!’
그동안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이렇게 즐거운 적은 처음이었다.
과거 레이첼에게 당한 복수를 그대로 갚아줌은 물론.
게임 그 자체의 재미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다.
만약 지금의 현성에게 언제까지 이걸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판.
만약 여기서 현성이 이긴다면 게임은 그대로 그의 승리였다.
그만큼 레이첼은 이를 악물고 게임에 임한결과.
그녀는 현성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현재 현성의 피는 그야말로 툭 치면 죽을 정도.
그에 비해 레이첼의 피는 풀 피.
이에 레이첼이 승리를 확신하고 마지막 공격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탁! 타닥! 드르르륵!
돌연 쏜살같이 움직이는 현성의 손가락.
그리고 그와 함께 현성의 캐릭터가 신들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공격은 전부 피하면서 폭포처럼 이어지는 콤보.
-쾅! 콰과광! 두두두!
이에 레이첼의 캐릭터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뒤로 밀릴 뿐이었다.
잠시 뒤.
결국 벽에 몰린 레이첼의 캐릭터.
그 모습에 현성이 히죽 웃으며 공격키를 입력했다.
-툭!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약손공격.
동시에 화면을 타고 슬로우 모션이 걸리며 레이첼의 피통이 0을 찍었다.
그대로 게임오버가 되며 뜨는 메시지.
[Great!]
찰진 그뤠이트! 라는 음성과 함께 떠오르는 금색폰트.
딸 피를 남기고 승리할 시 나오는 특수 음성이었다.
그에 따라 결과는 3판 3승 모두 현성의 승리였다.
-띠링!
머지않아 알림을과 함께 현성의 눈앞을 타고 떠오르는 메시지창.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창이었다.
[업적달성 : 철의 권7의 패왕]
그렇게 게임이 종료되며 헤어지기 직전.
현성이 손을 움직이며 타자를 쳤다.
곧 레이첼을 향해 떠오른 짧은 채팅하나.
“EZ.”
이를 마지막으로 게임이 종료되었다.
* * * * *
한편 아카데미 구석에 위치한 어두운 방.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빛을 발하는 건 오직 게임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은발의 소녀.
“….”
그녀의 이름은 바로 레이첼.
방금 전까지 현성을 상대하던 플레이어였다.
동시에 그녀의 입을 타고 이빨 갈리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으드득!
이유는 간단했다.
게임기 화면에 떠오른 짧은 채팅 하나.
EZ.
Easy를 줄인 말로써 주로 상대를 도발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뜻은 대충.
니 게임실력이 허접해서 너무 쉬웠다ㅋ.
“으아아악!”
이에 레이첼이 들고 있던 패드를 위아래로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고도 그녀는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면을 째려보았다.
“…감히 내가 누구인줄 알고.”
레이첼.
뱀파이어를 이끄는 지도자의 딸.
피의 왕국의 공주.
그런 그녀에게 있어 처음 느껴보는 치욕이었다.
진득한 패배의 쓴맛.
다른 건 몰라도 철의 권7내에서 그녀는 유일한 1인자였다.
‘그런 내가 처음 보는 놈한테 진다고?’
3판 3승.
각각 원콤보, 3연속 정권지르기, 그레이트로 이어진 완벽한 패배.
게다가 게임이 끝날 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티배깅과 마지막 도발까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재도전 버튼을 눌렀다.
이대로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콧대를 꺾어주지.”
하지만 그때였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떠오른 메시지 창.
[상대방이 게임을 종료했습니다.]
이에 순간 레이첼이 울컥하며 게임패드를 집어던졌다.
“이런 씨…!”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이미 게임을 종료한 그는 EZ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어두컴컴한 방구석.
레이첼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돌아와…다시 붙으라고…쓰레기야….”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훌쩍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곧 방금 집어던진 게임패드를 찾은 레이첼이 패드를 주섬주섬 챙겼다.
“내 패드…고장나면 안돼….”
만약 그 모습을 다른 뱀파이어들이 봤으면 눈물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피의 왕국의 공주님께서 이렇게 변하다니.
“미안해. 패드야….”
레이첼이 패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나 그녀라고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당당했다.
밝은 은발과 붉게 빛나는 적안.
아카데미의 명찰이 달린 예쁜 교복.
거기다 뱀파이어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까지.
그때의 레이첼은 누가 봐도 완벽한 미소녀 그 자체였다.
더불어 그런 그녀의 가슴에는 뱀파이어를 부흥시키겠다는 포부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는 뭔가 잘못되어가는 걸 느꼈다.
처음 그 사실을 느낀 건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었을 때였다.
뱀파이어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전설 아이템이 필요했다.
허나 생각보다 아카데미의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덕분에 하는 일은 족족 실패할 뿐.
거기다 뱀파이어의 특성상.
밤에 몰래 행동하다보니 당연히 수업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지내면서 흡혈은 사실상 금지.
처음에는 미리 챙겨왔던 피를 몰래 먹으면서 버텨왔지만, 1년이 지나자 가져온 피는 바닥을 보였다.
그렇다고 다시 뱀파이어 측에 피를 요구하자니 눈치가 보였다.
가뜩이나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예전처럼 사람들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
때문에 뱀파이어들은 현재 극심한 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자신이 도대체 무슨 염치로 백성들의 소중한 피를 요구한다는 것인가.
그 결과.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오고 있었지만, 육체에 한계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국 현재 레이첼은 항상 극심한 빈혈상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일부 뱀파이어의 권능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
그녀가 찾은 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게임 속이라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적어도 게임 속에서 만큼은 레이첼은 1인자이자, 최고였다.
그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으며.
언제나 그녀의 앞에는 승리뿐이었다.
물론 지금 그 승리가 현성에 의해 깨졌지만, 일단은 패드가 고장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다.
레이첼은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인간, 아니 뱀파이어였다.
“다행이다….”
레이첼이 작게 웃으며 다시 게임 속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뱀파이어를 이끄는 지도자의 딸.
피의 왕국의 공주.
동시에 <이스페리아>의 2막 보스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