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2막의 시작(1)
불의 둥지에서의 사건이 있고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병원 안쪽에 마련된 VVIP 병실.
그곳에는 흑발의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
보기만 해도 차가워 보이는 눈빛.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하시연이었다.
-똑똑.
곧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가씨.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하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마 개인비서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에 시연이 문을 흘깃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들어와.”
잠시 뒤.
문을 열고 그녀의 예상대로 깔끔한 정장차림의 개인비서가 들어왔다.
무엇보다 정장 가슴팍에 달려있는 배지.
그런 배지에는 하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아가씨. 몸은 괜찮으신가요?”
비서가 시연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물었다.
그러자 시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 문제없어. 퇴원은?”
“그게…병원에서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주일 정도는 더 입원하는 걸 추천했습니다.”
일주일 전.
그러니까 불의 둥지에서 현성이 크루페돈을 격퇴한 직후.
현성과 시연은 결계를 깨고 들어온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둘은 생명에 지장은 없었으나, 시연 같은 경우에는 마기에 노출된 게 확인되면서 추후 발생할 후유증을 방지하기 위해 조금 더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그런 비서의 대답에 시연이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알았어. 별다른 소식은?”
동시에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가지고 온 서류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네,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발생한 불의 둥지 사건으로 인해 아카데미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가씨께서 보스를 격퇴한 게 확인되면서 가문의 이미지 자체는 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그 말에 시연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평소의 무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가문에서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가문의 이미지를 상승하는데 일조한 셈이니까요.”
“…다행이네.”
그렇게 대답하는 시연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강박과도 비슷한 느낌.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시연은 유독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 다음으로는 가문의 대외일정과 내부적인 상황에 대해 브리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주로 하 가문의 정세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연은 짧은 질문 혹은 대답을 반복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 보고는 끝입니다.”
“…그래.”
“아, 그리고 별 건 아니지만 아가씨와 같이 입원했던 학생 말입니다.”
이에 줄곧 무표정이던 시연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같이 입원했던 학생.
현성을 말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됐어?”
곧바로 시연이 되물었다.
지금껏 비서의 말을 듣고 기계적으로 질문하던 그녀의 태도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좀 더 적극적인 반응.
물론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차이를 잘 몰랐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부터 시연을 모셔온 그는 달랐다.
하지만 비서는 구태여 그 차이를 말하기보다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학생이라면 어제 퇴원했다고 합니다. 몸 상태는 물론 컨디션까지 완벽하게 회복한 모양이더군요.”
“…다행이네.”
방금 전과 같은 말.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같은 경직된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연 그녀도 모르게 튀어나온 자연스러운 말.
이에 비서가 그런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의미로요.”
“응?”
“아닙니다. 그냥 다행이라고요.”
비서가 싱긋 웃으며 시연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수고했어.”
그렇게 비서가 나가고 난 뒤.
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비서와 나눴던 말.
‘…이번에도 내가 보스를 격퇴했다고?’
선천강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만약 그 자리에 현성이 없었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크루페돈에게 죽었을 게 분명했다.
쓰러진 현성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크루페돈을 쓰러트린 건 현성이었다.
-꾸욱.
시연이 하얀 이불을 꾹 쥐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후우.”
시연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약한 게 문제라면 앞으로 더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현성을 보란 듯이 구해낼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훈련량을 2배로 늘리는 것도 고려해봐야겠어.’
그러면서 시연이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다.
‘퇴원…했다고 했었지?’
몸은 괜찮은 걸까.
시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을 타고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그 소리에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인가?
아무래도 또 다른 보고할 게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시연이 대답했다.
“들어와.”
그대로 문이 열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연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시연을 향해 말했다.
“잘 있었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현성.
“…현성?”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시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그녀가 애써 침착하며 현성을 향해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런 시연의 말에 현성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주스상자를 보여줬다.
병문안의 정석.
비타 700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그냥 병문안?”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에 시연이 당황한 것도 잠시.
그가 병문안을 왔다는 사실에 시연이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동안 병문안은커녕.
비슷한 상황에서도 항상 오는 사람들은 정해져있었다.
하 가문의 사람들 아니면 예의상 얼굴만 비추러 오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처음.
하 가문의 사람들도, 다른 가문들의 사람도 아닌 현성이 병문안을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성의 손에 들린 상자.
“…근데 그건?”
그러자 현성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우리 집 누구누구께서 빈손으로 갈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말라기에….”
그러면서 현성이 집에서 나오기 전.
수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문안에는 역시 비타 700이 국룰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건 뒤로 하고, 병문안인 만큼 현성이 시연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아?”
현성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말했듯이 현재 시연은 마기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혹시 몰라서 입원해있는 것 뿐.
그걸 제외하면 그녀의 몸 상태는 큰 문제없었다.
“응. 괜찮아. 다만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더 입원해야 할 거 같대.”
“그동안 심심하겠네.”
“…어쩔 수 없지.”
어느새 현성과의 대화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만큼 그가 편해졌다는 증거일까.
그게 아니면 좀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이던 시연에게는 전부 좋았다.
이에 시연이 평소 그녀답지 않은 용기를 냈다.
“그럼 온 김에 잠깐 같이 있다 갈래?”
그런 시연의 말에 현성이 창밖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뭐 나쁘지 않지. 마침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라도 갈래?”
현성의 대답에 시연이 싱긋 웃었다.
어째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거 같았다.
그대로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
“좋아. 그럼 여기 옆에 있는 산책로로….”
그때였다.
현성의 핸드폰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이에 현성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미안.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
“으, 응. 다녀와.”
덕분에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시연은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채.
그대로 현성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왔어?”
통화를 마친 현성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현성의 표정에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그게….”
시연의 물음에 현성이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잠시 일이 생겨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
“……래?”
“미안. 이럴 줄 몰랐는데.”
그러자 시연이 애써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다시 다리를 침대에 올리고는 말했다.
“아냐. 괜찮아.”
사실 내심 아쉽기는 했지만 차마 투정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시연이 현성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게 웃었다.
“그럼 들어가 봐.”
“응. 주스는 여기 두고 갈게.”
그대로 현성이 주스상자를 그녀의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그가 등을 돌리고 병실을 나가려던 때였다.
현성이 순간 뭐가 생각난 듯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그러면서 현성이 다시 등을 돌려 시연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현성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손바닥 하나에 딱 들어갈 정도로 작은 선물상자.
“이거. 전해주는 거 까먹었네.”
현성이 시연에게 선물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이에 시연이 그와 선물상자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그러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생일선물. 너 이제 곧 생일이잖아.”
“…생일?”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작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잠시 뒤.
날짜를 확인한 시연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었다.
분명 오늘은 그녀의 생일 3일전이었다.
워낙 생일이라는 걸 잘 챙기지 않다보니 잊고 있었다.
어릴 때에는 두어 번 챙기고는 했지만, 13살이 넘어서는 아예 챙기지 않다보니 그야말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거기다 그 이후로는 가문의 일을 하느라 더욱 더 바쁘다보니 생일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정도.
생일이라니.
정말이지 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시연이 신기한 듯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물론 거짓말이었다.
현성 그가 시연의 생일을 알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게임 내 이벤트 덕분이었다.
<이스페리아>에서는 히로인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한 이벤트가 몇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생일에 각 히로인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챙겨주는 것.
그리고 고인물인 현성에게 있어 히로인들의 생일과 원하는 선물을 외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이번 선물 역시도 그랬다.
그냥 생일이 다가오니 당연하게 준비했다.
언제나 그래왔던 일이니까.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성의 선물.
그대로 시연이 그의 선물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마워. 현성.”
“아냐. 이런 거 가지고 뭘.”
그러면서 현성이 선물상자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아무튼 조금 이르지만 생일 축하해.”
그리고 현성이 병실을 나가기 직전.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선물은 나중에 확인해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병실을 나갔다.
* * * * *
그렇게 현성이 병실을 나간 뒤.
이제 병실에는 시연 혼자 남았다.
고요한 병실.
“….”
시연이 주변을 살피고는 곧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작은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현성이 주고 간 선물.
과연 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부스럭.
그대로 시연이 조심스럽게 선물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검은 고양이 장식 고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시연이 멍하니 고리를 바라보았다.
“네로….”
검은 고양이 네로.
어릴 적 시연의 부모님이 그녀에게 사준 첫 선물이자, 시연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현성이 준 선물을 바라보던 시연이 싱긋 웃으며 고리를 매만졌다.
“…예쁘네.”
고요한 병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